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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예술의 끝, 방스의 로사리오 예배당 - Matisse Henri

김종근



마티스 예술의 끝, 방스의 로사리오 예배당 - Matisse Henri

김종근 | 미술평론가


앙리 마티스(1869~1954)는 그의 작업노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예술은 모든 두뇌 노동자의 피로를 풀어주는 편안한 안락의자 같은 것” 이라고. 그는 예술세계가 깊어지고 원숙해질수록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술을 추구했다.  
또한 그는 신체를 이루는 본질적인 선을 찾아내 그 의미를 그의 화폭 속에 응축시키고자 했다.
인간미 넘치는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 나선 그의 그림들을 우리가 한번에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꼬트 다 쥐르의 꽃이라 불리는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이다. 
시미에의 산언덕에 자리잡은 붉은 미술관에는 초기의 습작에서 말년의 걸작에 이르기까지 드로잉과 , 에칭 컬렉션, 마티스가 디자인을 맡은 댄스 시리즈, 방스 성당의 로사리오 예배당 장식을 위한 스케치 작품들이 모두 전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든 조각작품과 수집한 콜렉션도 포함되어 있다. 
이 미술관이 매력적인 것은 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습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1869년 프랑스 동북쪽에 있는 카토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뒤늦게 예술가로서 출발한다.  귀스타프 모로의 도움으로 화가로서의 꿈을 이루게 된 그는 인상주의가 버렸던 구성을 복귀 시키려는  폴 세잔느의 견고한 구성의 영향과 폴 고갱의 장식적인 색면 반 고호의 색채의 열정과 변형의 영향에서 야수파 화가로 성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림 안에서의 색채 간의 관계'을 중시했다. 한 때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입체주의(큐비즘)에 경도 되기도 했지만 , 보색과 경쾌하고 단순한 색면 효과를 평면 속에 담아내 마티스 만의 예술세계를 구축 , 세기의 천재 파블로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 위대한 화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정작 그의 예술과 사랑은 니스에서 북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방스의 로제르(Rosaire) 성당 건축에서 일찍부터 꽃피고 있었다. 1948년부터 1951년까지 니스의 방스성당의 건축과 실내장식 일체를 마티스가 맡게 된 것이다. 
이 성당의 내부에 그려진 성 도미니크 벽화를 비롯한 스테인드 글라스 모두가 그의 작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기법과 재료를 동원, 십자가와, 제단, 내부의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 십자가 안치소등 방스 성당의 모든 것들이 그의 손에 의하여 다시 태어났다. 특히 제단과 벽화의 스테인드 클라스는 단 한 군데도 예수상을 그리지 않고도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화로 푸른 등의 분위기를 연출, 정숙함으로 실내 공간을 성스럽게 하고 있다.   
이곳은 단순미와 간결미가 중심이 된 경쾌한 마티스 예술의 진수가 잘 드러난 아름다움이 결집된 예배의 공간이 되고 있다.  
성당 내부에 스테인드 글래스 통한 빛을 고려하여 색채파의 거장답지 않게 흑선 만으로 완결 짓고 있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그는 설치에 있어서 단순함을 기본 모토로 했다.  정면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측면에 성모자상의 단순한 묘사에서 그 정갈함과 단아함을 덮은 것처럼 간략하게 공간구성을 보여주었다.    
니스에서 산 속으로 들어간 깊은 이곳에 마티스가 이 성당 작업을 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1941년 71세의 마티스는 수술을 한 후 기적적으로 생명을 얻었고 , 기관지염 때문에 파리에서 공기 좋은 이 지역으로 올 수밖에 없었고, 도미니크 수도원의 배려로 머물게 된 그는 여기서 수녀 쟈크 마리와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방스에 예배당 설계를 맡게 된 것은 순전히 수녀인 모니크 부르죠아와의 우정 때문이었다. 1942-43년 그녀는 니스에 있을 때 마티스의 간호를 맡고 있었다.
그녀는 마티스와 함께 종이를 자르기도 하고 종이를 붙이는 꼴라주를 작업하면서 “재즈”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시작된 마티스의 방스(Vence)예배당의 설계와 실내장식은 그의 예술의 총결산이 된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는 일상적인 예수상이나 장식을 거부하고 가장 마티스 다운 양식으로 성당의 장식에 온 열정을 다 바쳤다. 그것은 성당을 성당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편안함을 주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실내 벽면을 장식한 성 도미니크의 타일 표현에서는 검은 드로잉의 선만으로 간결하게 서있는 입상을 표현했고, 색종이로 만든 콜라주와 스테인드 글래스 중심이 되었다.   
직접 색종이를 오리는 방법으로 소묘를 했으며 선과 색채, 윤곽선으로 화면을 하나로 통일 시켰다. 
이젤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힘들었던 그는 붓 대신에 가위를, 튜브 대신에 색종이를 사용해 콜라주로 평면을 부활시켰다. 
물론 그의 색채는 타이티와 모로코 여행으로 야수파 시대와 장식적인 현란함 대신에 아라베스크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과 색의 병치로 신선함을 창조하였다.

언제나 마티스는 '회화에 있어서 필요치 않은 요소는 해로운 것'이라는 신념으로 단순미를 성당에 바쳤다. 
어떤 작품들은 열 두 번씩이나 에스키스를 찢어내기도 하고, 로사리오 예배당을 위해 그가 머물던 호텔의 내부를 개수하여 실제 성당의 내부처럼 상상하며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던 한 무신론자의 예술은 그에게도 엄청난 양의 회화그림․콜라주․조각․건축물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노년의 마티스가 색종이와 가위로 만들어 놓은 방스 성당의 밝고 투명한 절대 순수는 그의 예술의 집대성이라 불릴만하다. 결국 예배당을 완성하고 3년후 1954년 84세를 일기로 그는 니스에서 눈을 감았다. 이제 그는 갔지만 오늘날 방스 성당을 찾는 많은 순례객과 방문자들은 20세기 최고의 기념비적인 모뉴먼트의 하나인 마티스의 그 지극히 순수했던 한 예술가의 영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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