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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색채로 풀어내는 남도가락의 슬픔과 희망 - 김선두

김종근


 
선과 색채로 풀어내는 남도가락의 슬픔과 희망 - 김선두



김종근 | 미술평론가

한 20여년 전일까? 내가 미술평론을 한다고 하니까 . 사촌형은 다짜고짜 너 김선두라는 화가를 아느냐고 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김선두라는 한국화가 있는지 알았다. 그러나 지금 난 그를 중요한 작가로 김선두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를 된장 뚝배기 같은 놈 , 심지어 친한 그의 화우들은 '토종 환쟁이'라고 이렇게 한마디로 질러 부른다. 김선두 . 그러나 그의 이름은 지금 우리나라 한국화단에서 결코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왜냐하면 그는 40대 작가 중에서 단연 군계일학처럼 빛나는 작가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1958년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 시서화가 뛰어난 아버지를 둔 시골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붓글씨는 물론 화론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이것을 부전자전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화가의 길로 인도한 최초의 고마운 사람을 아버지가 아닌 형이라고 했다. 형 또한 아버지를 닮아 글씨는 물론 그림 재주도 발군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형이 장남만 아니었다면 지금쯤은 한가락하는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할 정도이다.
그 기억은 다름 아닌 초등학교 시절 새 교과서를  싼 표지에 지방붓으로 과목명을 쓰고 여백에 힘차게 나는 용을 그려주면서부터이다. 
 '선두야! 느그 선생님이 보시면 우악! 하고 놀래 자빠질 것이다. 잉! 하하하'라면서 말이다.
백묘법으로 그린 정교한 용의 비늘과 날카로운 뿔과 날고 있는 자태는 어린 그에게 매혹적이었고. 언젠가는 형처럼 멋지게 그려보리라고 다짐을 했고. 그러한 형의 영향이 자연스럽게 그림에 관심을 갖고, 푹 빠져들게 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진정 그림에 대한 흥미와 열정, 그로 하여금 화가의 길을 걷도록 해준 것은 아버지와 형이라고 하지만 정작 화가가 되도록 크게 빚지고 있는 것은 그를 키워준 고향과 자연, 그 시절 궁핍했던 삶과  추억'이라고 회고한다. 이것은 그의 그림에 뿌리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알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를 알기 위해 우리가 그를 낳아준 남도의 장흥으로 가야하듯이 작품 세계를 위해 1980년대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80년대 수묵운동이 한국화단을 열병처럼 휩쓸고 지나갈 때 김선두는 1984년 제7회 중앙미술대전에서 [일그러진 달]로 그는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듬해 제4회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한국화 부문 특선의 영예를 안으면서 그는 한국화단에  혜성처럼 떠오르는 작가로 이름을 등재했다.
미술대전에서 특선한 작품은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는 모습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파격적인 구도와 과감한 채색으로 김선두만의 독특한 화법을 보여주었다.
이 주제는 유랑극단의 곡예사로 평소 그가 좋아했던 소재였다. 그는 여기서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려는 흔적과 그 자신이 도시의 이방인으로 그들의 삶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그의 작업은 인물에서 남도로 풍경으로 자유로운 소재들을 거침없이 아우르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1993년 다시 그는 미술평론가들이 주는 제12회 석남 미술상 수상작가로 선정되었고 , 작년에는 부산일보사가 주최하고 코리아아트 컨설팅이 후원하는 '부일미술대상'을 수상했다. 특히 부일미술대상은 전국규모의 40대이상의 중견 작가에게 수여하는 공정하면서, 공신력 있는 검증된 작가에게 주는 상이라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런 그가 최근 '南道연작'의 행 시리즈에서 출발하여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산 그림에 온몸과 열정을 바쳐 올인 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한국화를 이끌어갈 재목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의 그림에는 호방한 필치와 절제된 선의 품격과 격조로 기운생동을 넘치게 했다.
단아하면서도 어수룩한 듯한 필선 , 거침없이 휘감기는 생략된 필치, 조급해 하지 않고 비워두는 깊은 사색의 여백 등이 화면을 풍요롭게 감싸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지천에 깔려있는 이름 없는 들풀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그 풀들의 생명성. 그는 잡풀을 향해  '요즘 세상에 제자리를 지키는 것은 잡풀들 밖에 없는 것 같다고 그는 되뇌인다.
김선두 그는 이 고향의 이름 없는 들풀과 풍경들을 장지기법에 전통 채색기법과 바탕 위에 종이를 오려 붙이는 꼴라쥬 기법등 으로 남도의 세계와 가락을 화폭 위에 쏟아 놓는다. 
최근작들에서 그의 필치와 필력은 절정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풀들의 몸처럼 휘감기듯 삐치는 붓놀림에서 부활하는 고향의 풍경들은 화폭에서 춤추고 있다. 
그에게 있어 산수화란 바로 그가 그리고 담아내는 풍경화이다. 산과 물이 있는 경치를 그린 풍경화와도 아니고 무진한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담은 매우 이념적이고 철학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가 자연과 산을 타는 이유이며, 그 산을 다시 화폭 위에 옮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묵과 채색의 경계를 새처럼 넘나들며 먹이 필요하면 먹으로 채색이 필요하면 공작새처럼 풍부하고 운치 있는 색채로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시킨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그는 대단히 부지런한 작가이다. 올해만 해도 4번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치러냈다.
아직도 그의 방이역 화실엔 전시를 기다리는 수십여점의 작품들이 대기 중이다. 지금 그의 붓에는 물이 잔뜩 올라있는 모습을 본다. 

이처럼 김선두의 작품세계는 도시주변의 풍경 속에서 인물을 균형감 있는 구성과 정확한 표현력으로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탁월하게 묘사해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한국화 작가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그림에 있어서 형식만큼 내용을 중시하는 작가이다. 그림이 관념보다는 현실의 삶과 자연에 근거하고 형식과 내용을 잘 조화시키는 작업이야말로 진실로 가치가 있고 의미 있는 작업으로 여기고 있다.
그의 시형식은 온통 이렇게 고향과 자연을 위한 노래이다.
그의 그림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저무는 길>의 하늘 공간에 부유하는 ㅇㅎㅅㅁㄱㅌㅇ 의 자음들(시간을 뜻하는 월화수등등)을 그는 ' 풀잎을 흔드는 바람이기도 하고 길섶에 자욱한 풀벌레들의 노래 소리'라고 부른다.
이처럼 그의 예술과 오감은 남도의 땀과 한숨이 베인 남도 사람들의 삶과 자연 속에 용해되어 있다.
남도의 자연이 만들어낸 가락, 그것이 그의 그림이다.  왜 그가 남도의 가락에 온몸을 적시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체질에 맞는 한국회화를 만들고자하는 그의 집념과 열정 때문이다.
즉 자기 그림의 뿌리를 남도의 땅에서 다지고 이를 통해 자신의 독창적인 진경산수를 만들어내겠다는 정신과 그  믿음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전라도를 그는 한도 많고 눈물도 많은 억척과 끈기가 묻어나는 그리운 곳이라고 정의 했다. 그래서 그의 처절한 생존의 의지는 노랫가락 속에 스며들고 문장 속에 녹아들었다. 그렇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걸쭉한 육자배기나 농부가, 판소리 같은 남도의 노래를 넘어선.

그가 마지막으로 절창처럼 노래하는 고백은 우리들 가슴에 남는다. '나의 남도산수는 생활이 묻어 나는 그림임을 고집한다. 붉은 황토밭이나 텅 빈 들판의 벼 포기에서 생활의 고단한 땀과 눈물...정말 남도의 속살이 조금이나마 드러났을 때 나는 그것을 밑천 삼아 다른 지방으로 우리 그림을 위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나는 지금 그의 이름 속에 한국화의 새로운 별이 그에게서 빛나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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