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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 무의식의 풍경 혹은 그 너머의 이미지

김종근

무의식의 풍경 혹은 그 너머의 이미지


그림은 안락의자와 같은 진정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는 색채에 있어서도 상상력으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 했다. 즉 예술가는 눈에 보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화에 관한 이러한 논리가 바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림은 충분히 그러한 다양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김창숙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림이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세계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 미술이라는 것이 더욱 확연 해진다. 시각적으로 보면 그의 그림은 일단은 무엇을 그렸는지 불투명하다. 그의 작품이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지 않고, 게다가 무수한 붓질로 그어 내린 빗금의 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 선들은 사선 방향으로 사정없이 빗줄기처럼 내리고 있으며, 세로로 누워있는 바다풍경처럼 반짝 빛나고 있다. 색채 또한 각기 붉은 색 푸른 색 등의 다양한 칼라로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 내는 풍경은 여러 가지 풍경을 떠올릴 수 있지만 비가 쏟아지는 불빛 풍경이 가장 쉽게 연상된다. 그렇다고 그가 전적으로 비오는 날의 비 이미지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명멸하는 빛과 그림자의 암시적 장면들이 형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빛들은 때로 현란한 거리의 풍경 앞에 퍼붓는 비의 단편적 풍경이기도 하고, 거리의 불빛에 갇혀 있는 기억 속에 파노라마 같은 것을 볼거리를 준다.

과연 그 풍경들은 무엇일까? 가만히 보면 그의 화폭속 인상은 온전히 풍경에 의존 한 것도 기억에 의존한 것도 아니다. 실제 그 겹겹이 쌓여 있는 빗금들이 만들어 놓는 경치는 생동하듯 장관을 이루면서 화폭 전면에 출현한다. 어쩌면 그는 그가 본 마음속의 무수한 인상들을 무의식적인 경치의 풍경으로 전이 시켜 놓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그 풍경의 마음속에서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것은 잊혀진 과거의 시간인 풍경일수도 있고 그가 일상의 현실 속에서 본 가상의 공간풍경 일수도 있다. 미술 속에서 그렇게 가상의 풍경을 담아내는 방법들은 흔히 추상 화가들의 작업 속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특히 내면의 심상을 추상적인 것으로 전환하거나 발견하는 경우, 외부적 요소의 재현에서 자유롭고 형이상학적 본질과 같은 추상성을 화폭에 표현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그림은 극단적인 모더니즘 이론을 좇아 보다 단순하고 극단적인 평면성을 나아간 것처럼 모노톤의 분위기를 전면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의 작품 속에 풍경은 그의 내면 속 풍경을 담아내는 거울에 다다르길 희망한다. 붉은 색, 푸른색들의 무수한 교차로 빚어내는 그 색채의 혼합이야말로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기억의 흔적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심상의 이미지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서 있는 과거의 기억에 대한 회상이나 기억의 파편으로 옮겨진다.

그는 이 다양한 빗금의 색채로 축제와 향연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김창숙의 작품들은 20세기 순수추상의 성격처럼 비재현적인 풍경으로 현대적 추상의 형상으로 회화의 무의식성으로 전면적 회화로 정착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형상으로 다가오든 비형상으로 다가오든 그는 자신의 무의식을 거짓 없이 진실하게 담아냄으로서 우리에게 시각적인 관심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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