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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희 / 꽃에 관한 생각

김종근

“나의 그림은 혼란하다. 계절에도 맞지 않고 지역에도 안 맞는 꽃들, 또 어디서 왔는지 정체도 알 수 없는 꽃들이 혼재되어 있다. 오래된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우리 고유의 꽃들과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볼 수 있었던 여러 나라의 다양한 꽃들... 이렇게 뒤엉킨 꽃들이 혼란스럽다.

....무질서한 정체불명의 꽃무리를 보면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닮아 있기도 하다. 우리가 어린 시절 보던 꽃들은 거의 사라지고 이름도 정체도 모를 꽃들이 어느새 우리 화단을 차지하고 있다. 이름 모를 알 수 없는 꽃들..
.. 그러나 나는 오늘도 이러한 꽃들을 가꾸고 있다....나는 이렇게 꽃밭을 가꾸듯이 그림을 그린다....

......나는 꽃밭을 보면서 아련히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이러한 유년의 기억들은 현대의 각박한 삶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다. 그러면 혼란스러워 보이는 꽃들은 어느덧 사라지고 나만의 소중한 기억들로 화면은 가득 채워진다.”
변명희의 근작 <生- 즐거운 상상(想像)> 시리즈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그가 왜 꽃을 그리는지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가슴에는 꽃과 자연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최근에 한 가지 테마에 집중적인 흥미를 보인 것은 바로 꽃들이 무더기로 핀 화단이다. 지난 몇 년간 변명희가 보여준 작품은 집요하리만큼 화단 풍경에 열중하면서 흥미를 보였고 드디어 그는 구성과 색채 그리고 표현기법에서 자신의 화법을 찾았다. 먼저 그의 화단에 핀 꽃들은 다채롭다. 모란이며 튤립이며 화사한 꽃들이 화면 가득 넘쳐난다. 그 사이로 꽃향기를 맡고 있는 여인의 모습도 있고, 오리들이 화단을 가로 지르는 풍경도 보인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유롭고 소박하다.
화면의 구성을 보자, 그는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동양회화의 공간 여백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화면 가득 꽉 채우는 형식을 선택했다. 그것도 질서 보다는 자유분방함과 부드러움이 화면을 지배한다. 그 구성은 마치 마티스의 실내풍경을 보듯 단순하고 경쾌하며, 서정적이고 여성적이다.

색채 또한 꽃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색채에 현혹되지 않고 독자적인 그만의 색으로 특징을 구사한다. 물론 그의 구성법은 종전에 여인의 모습을 팝아트적으로 화려하게 표현하던 방식들은 거의 생략되어 있다. 대신 그들이 꽃 속으로 들어와 다소곳한 표정으로 머무르고 있다.

어떤 그림에는 소녀가 등장하고 사슴이 등장한다. 여인들의 옷차림과 표정이 주류를 이루던 꽃다운 소녀들의 환상적인 등장에서 그의 무대는 온전히 자연의 꽃 그들의 생명력이 가득한 꽃 박람회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여인의 인물화에서도 단순히 인물의 외모만이 아니라 옷차림의 묘사를 통하여 자신의 정서를 펼쳐 내었듯이 더욱 풍부하고 생동감 있는 꽃의 모습으로 마음의 사실성을 털어놓고 있다.

이러한 소재들은 물론 생활주변에서 볼 수 있는 매우 평범한 테마들이다. 그러고 보면 이런 꽃 풍경에는 아주 특이한 구성 형식이 있다. 주제와 그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보조적인 모티브들이 명백하게 구별 된다는 점이다.

자연의 빛과 공기의 작용에 흥미를 가지고 객관적인 정경을 그렸던 풍경화의 시작에서 그는 한참 벗어나 있다. 예를 들면 큰 꽃이 화면에 중심에 자리하고 주변에 작은 꽃들이 큰 꽃에 묻혀 있다. 그리고 어떤 대상이 크니까 더 크게 묘사 되어야 한다든가 하는 기본적인 질서를 그는 화면에서 고집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그는 이미 어린 시절에 생의 행복한 상상력의 지평에서 생활하며 느낀 감성들을 펼쳐 낸 것이다.

그는 이점에 대해서 아주 명료하게 추구하는 바를 분명히 밝혀왔다. “움직이고 변화하는 힘. 자연의 조화로운 생명력을 표현하려다 보니 꽃과 동식물을 끌어 쓰게 되었다.” 고. 이러한 발언만으로도 그림을 대하는 존엄성이 자연의 조화로운 생명력에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화풍에서 읽혀지듯 분명 그의 그림은 고유한 꽃의 색채표현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림이란 틀에 박힌 형식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가 동양화를 전공했음에도 공간의 여백도, 농담도 먹도 구사하지 않는 고집이 그의 예술적 성정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오히려 그는 더 많은 공간에 꽃들을 와글와글 집어넣고 정말로 아기자기하게 물을 필요도 없이 그냥 꽃다운 그만의 그림을 추구한다. 적어도 그의 그림에선 엄청난 꽃들의 대조적인 꽃 크기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필요치 않다 그의 작업은 예술성이나, 우아함 혹은 정직한 구성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그 의식을 지배하는 자유로움과 진정성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그는 어떠한 순간에도 자신의 그림이 자신의 삶의 생명력에 대한 유일한 표현이자 기준임을 지키고 있다. 그가 보여준 일련의 꽃과 인물들은 생명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주 단순한 사물들의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에 불과하다. 그 꽃 잔치에 초대 된 꽃들은 그 작가의 생각을 담아내는 소중한 부분들이다. 적어도 변명희는 화폭 속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그러한 미술의 공화국을 꿈꾸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의 화단의 풍경화가 단순히 꽃밭의 화단만이 아님을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비록 그가 무더기로 피어있는 화단을 그렸지만, 그것은 자연의 외관이 아니라 생명체 안에 들어있는 원초적 기운의 꽃, 즉 생명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기운생동’이 스며있다. 크고 작음의 질서와 강렬함과 부드러움의 하모니인 음양의 형상도 스며있다.

다만 변명희의 풍경화가 삶의 풍경을 반영하는 생명력의 단면을 화단에서 포착한 것이라면 그의 형상은 좀 더 진지하며 열정이 담긴 화단을 가꾸어야 한다. 그 때 그의 화단에는 매우 생동감 있고 정채로우며 평화롭고 감동적인 꽃들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울긋불긋한 색채도 입히지 않고, 필묵의 정취마저도 없는 담백한 자연의 모습도 아름답다.

선에 의존하여 형상을 그려낸 꽃들은 여전히 선의 예술의 품격을 가지고 있고, 간결한 색채의 몇 단계로 그는 그림 자체에 매우 풍부한 시의(詩意)를 부여하기도 한다. 마치 꽃을 그렸지만 실제 꽃은 없다. 그러나 그 속에 생명력을 느끼는 꽃이 있어 변명희의 그림은 여전히 그림 속에 꽃과 동식물을 끌어 쓰는 잔잔한 즐거움이 전해진다. 그림 속에 삶이 존재하는 그림속의 생명력 그의 화단에 더 많은 꽃들이 와글와글 피어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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