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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 한국의 제프쿤스 팝스타

김종근


生活에 뿌리를 둔 예술
맛 좀 볼래? 멋있게 말하면 ‘맛을 체험시키기’
체험을 만들어 내는 것
니 맛, 내 맛? 진짜 맛은 내 맘대로 섞어서 만드는 거야.
눈으로 보는 맛
......
입맛대로 놀라구 그래
예술은 남의꺼, 맛은 내꺼
세계는 하나, 맛으로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이것은 최정화의 글을 줄인 것이다.

일본 요코하마에 가면 사방에 과일로 만든 설치작품이 있다. 상하이 고가도로를 지나다보면 여러 가지 꽃으로 오밀조밀하게 만든 작품이 있다. 이제 그의 작품은 프랑스 , 미국 LA에 가도 그의 설치작품을 볼 수 있다. 이런 국제적인 작가도 드물다.

최정화 한 때는 미술계의 반항아, 1961년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군인 아버지를 둔 탓으로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군기 가 든 탓인지 그는 아침 6시에서 7시에는 일어나, 산책을 하며 책도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서만 읽는다고 한다.

1987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면서 그의 활동은 시작 되었지만 고3 시절 시험을 보다가 답안지에 그려낸 낙서 때문에 얼떨결에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3에 미술을 시작하고 그 해에 그는 전국미술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대학에 들어와 중앙미술대전에서 또 상을 받았다. 실제로 상을 타려고 그림을 냈는데 막상 받으니까 이상해서 그래서 바로 다 태워버렸다고 했다. 참 웃기는 작가가 아닌가 ?

최정화 작가는 자신의 인생이 대부분 우연의 발현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 열정 그리고 그의 천재적인 발상과 노력이다.

최정화가 화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86년과 1987년 중앙미술대전이다. 그 자신의 솔직한 심정대로 그는 “대상을 수상하면 작품을 매입해주고 부상으로 유럽여행을 보내준다 길래 출품했어요. 상을 타기 위해 일부러 심사위원 구미에 맞는 신표현주의 회화 작품을 그려냈다.” 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작업을 잠시 멈추고 인테리어 회사에 들어갔다. “그림으로 사람들을 속이기가 너무 쉬워서 그림은 집어치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가히 최정화 다운 발상이다.

홍익대 동기이자 지금은 모두 각자 고유한 작업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얼굴의 작가 고낙범, 이불, 홍성민 등과 함께 ‘뮤지엄’이란 그룹을 결성하면서 점차 두각을 보이기 시작 했다.

그는 표현에서나 주제에서나 유럽 여행 후 미술관에 죽어 있는 뮤지엄이 아닌, “잡것과 날것들이 살아 숨 쉬는 뮤지엄을 지향”하며 <선데이 서울> <쇼쇼쇼> 등의 톡톡 튀며 반짝이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1989년 그는 가슴시각개발연구소를 설립하여 더욱 더 활발한 활동을 전개 했다.작가가 연구소 라니 황당하지 않은가 ?
그가 세운 연구소는 개성 넘치는 작업과 스타일로 인사동의 쌈지길·한국국제아트페어의 VIP 라운지·인사미술공간·서울문화재단 그 외에도 예술 관련 기관은 물론, 에스콰이어 ·쌈지스포츠 같은 패션 매장부터 홍대의 술집까지 다양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대 앞에 ‘올로올로’, 종로에 ‘오존’, 대학로에 ‘살’ 같은 술집에서 전시와 공연을 기획했는데 그것을 보고 외국 큐레이터들이 재미있어 했는데 바로 그것이 일본 아시아현대미술전에 초대받고 유럽에 초대받게 된 경위 이다. 낭중지추란 이런것인가? 주머니에 있는 송곳은 언젠가 뚫고 나온다는 속담이.

이어서 그는 1993년 일본 후쿠오카 유니버시아드를 전시를 시작으로 뉴욕 퀸즈미술관, 미국워터아트센터, 프랑스퐁피두센터, 일본도쿄모리미술관, 베니스비엔날레 외 수많은 국.내외 유명전시에 초대를 받으며 사실 일약 세계 화단에 최정화를 심어 놓았다.
그것은 우리나라 설치작가의 스타탄생을 상징했다. 많은 평자들은 그의 예술 철학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전시로 2006년 일민예술상 수상의 일민미술관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전시였다. 그러나 동시에 최정화 자신은 스스로 예술가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2008년 서울디자인올림픽에서 <천만 시민 한마음프로젝트-모이자 모으자>라는 제목으로 대규모 프로젝트를 선보이며 최정화는 철저하게 대중들과 함께 가슴을 나누고 대중이 함께 얘기하고 즐길 수 있는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여전히 최정화는 화가인 동시에 인테리어, 건축, 무대디자인, 공공미술, 영화미술, 전시기획 등 예술의 모든 영역을 넘나들었다. 그러면서도 작품이 철거당하거나 개인전이 취소당하는 일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무덤덤했다. 그는 예술이 무엇인가 묻는 질문에 정답은 없다고 명료하게 대답 할 정도로 주류와 비주류, 예술과 상품, 생산과 소비, 미래와 과거의 경계를 꿰뚫고 전략 있게 이용하는 사람이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그런것 처럼 그의 작품은 대단히 복합적인 만큼 다양하다, 여행중 현지의 재래시장이나 벼룩시장을 간다든가 주렁주렁 살림살이를 달고 있는 홈리스 차림의 인형처럼 그는 이 모습이 바로 미래의 최정화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래서 흔히 최정화는 키치적인 예술가로 불리지만 자신은 “ 작품은 조형적”이라고 단언한다. 재료가 바뀌었다고 해서 키치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작품 속에 조형성을 중시하고 최우선으로 한다.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 <퍼니 게임>은 그런 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1998년 초 국제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진짜 경찰 모형들을 세워 놓았다. 이들은 도로변에 과속 차량의 속도를 줄이기 위한 마네킹이었다. 이 경찰관들은 큰 키에 강인한 체격과 잘생긴 얼굴을 드러낼 뿐이다. 사실 지금도 최정화는 현재 가장 많은 비엔날레와 해외 전시로부터 ‘러브 콜’을 받는 대표적 작가로 불린다.
혹 자신은 AAA라고. Always Almost Artist라고 부른다. 번역해보면 ‘항상 거의 예술가’ 정도이다. 그처럼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이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전시장 안에 있는 미술 작품들은 참 고루해요. 그 보다도 종로 낙원상가나 동대문아파트, 아니면 성남 모란시장에 가보세요. 그 자체가 ‘아트’죠.” 최정화의 예술이다. 이것이. 최정화는 이렇게 진짜와 가짜, 작품과 상품 그리고 예술과 일상의 통속적인 관념과 영역을 해체 교란시키는 지대에 머물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과 예술의 키워드를 “생생, 싱싱, 빠글빠글, 짬뽕, 빨리빨리, 엉터리, 색색, 부실, 와글와글”이라고 정의 할정도이다.

미술사에서 보통 현수막, 생활용품, 바가지, 이태리 때밀이 타올, 트로피, 비닐, 쿠킹 호일 등을 재료로 삼는 최정화의 작품을 두고, 흔히 사람들은 ‘키치’라고 부른다. 나는 그가 미국의 키치 작가 제프쿤스와 비유 될 수 있는 진정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를 세기의 설치작가이자 오브제 작가인 제프 쿤스와 비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의 손을 거치면 키치가 우아한 작품이 되고 쓰레기가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변신하며 탄생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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