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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 / 性과 聖사이에 단 하나의 눈

김종근

예술은 우리의 억눌린 성적 욕망의 하나의 부산물인가? 꿈을 통해서 이해되는 상징이 우리 가 의식을 통해 행하는 상징적인 표현과 동일하게 이해될 수 있는가? 인간의 무의식의 산물로 꿈의 상징을 통해 예술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예술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인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명료하지 않다. 그러나 아주 분명한 사실은 아직도 동서양의 위대한 작가들이 예술 작품 속에 성이라는 문제를 매우 중요한 모티브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며, 현대미술 속에 성에 관한 이슈들이 작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81년부터 1993년 까지 오랫동안 파리에서 체류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온 그의 작업 세계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보기 드물게 성에 대한 세계를 일관되게, 그리고 줄기차게 다루어 왔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세계는 1905년 프로이드의 성에 관한 이론이 발표 된 후의 에로스에 대한 학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성에 억압되고 왜곡 된 성욕은 노이로제를 불러오기 때문에 억눌린 性적인 욕망을 배설하고 언어화시켜 승화해야 한다는 시각인데, 작가가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81년부터 파리에서 그 자신이 밝힌 여러 가지 발언에서 확인되듯이 그가 성에 관한 다소 맹목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인간의 본질적이고 본능적인 性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聖스러움 사이에서 그가 갖는 갈등은 감성이 풍부한 입장에서 보면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채의 작품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시각이 단지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한 작가만의 언어로서 자기의식이 충만한 창조적인 형식을 만들어내는 행위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정채의 작품의 키워드는 性을 통한 사랑의 성찰이고, 사랑이 주는 큰 깨달음의 언어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을 다룬 무수한 작가들, 예를 들면 드쿠닝(Willem de Kooning)이나 제프쿤(Jeff Koons)과 같이 성을 중요한 매개체로 다루는 작가들과의 다른 에로스를 다루는 작가들의 변별성은 어디서 둘 것인가?
그가 치열하게 고민하여 형상화 해낸 이미지들이 바로 이번에 발표하는 그만의 형식의 에로스 표현이다.

그는 오히려 그의 작품이 서구의 많은 작가들이 性을 접근하는 방식, 즉 사실성과 쾌락성, 폭력성에 대한 거부감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명백히 해두고 있다. 그는 언제든지 性을 聖스럽게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드쿠닝이나, 제프쿤같이 性을 폭로하고 싶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그 안에 인류 미래의 평화를 담아내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기에 정채가 바라다보는 성의 시각은 진지하고 아름답고 성스럽다. 그가 사랑 시리즈로 제작한 작품들 대부분이 표현형식과 전개에서 에로틱하지 않게, 사랑의 행위나 존재방식을 진지하고 조형적으로 형상화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의 어느 작품에서도 우리는 에로틱하거나 천박한 섹슈얼 이미지는 발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예술의 본질이 인간 자신이 에로스적인 감성을 지닌 무한의 존재임을 알려주는 원초적인 미술형식만 가득하다. 그러기에 정채의 예술작품은 우리 시대의 미감으로 포착할 수 없는 표현적인 요소를 지니며, 인간본질을 들여다보는 종교적 성스러움의 자율성까지도 느끼게 한다. 보다 놀라운 사실은 정채의 예술작품은 절대적인 예술적 신념으로 그 만의 고유한 존재양식을 흔들리지 않고 확립했다는 것이다.

분명 정채의 여성적 표현이나 인체의 표현은 이제 충분히 독창적이며 초월의 세계에 다다르고 있다. 그것은 마치 브랑쿠지가 <우주공간의 새>에서 물질의 근원적 형태를 사용함으로써 내면화를 통해 비상하고자 하는 충동을 표현해내는 데 성공 한 것처럼, 정채는 그만의 독창적인 형태의 추구로 아름다운 성의 표현과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그렇다. 어쩌면 정채의 시각은 분명 성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얼마나 훌륭한 눈인가. 그가 말했듯이 '내 그림 속에는 사랑이 춤을 춘다. 나는 性을 통하여, 사랑을 성찰하였고, 사랑의 큰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훌륭한 발견이 아닌가? 새롭고 깊어지는 표현들, 그의 예술은 성과 속의 현상과 본질의 세계에서 찾아낸 자유로운 화가의 고백이다. 그러기에 정채는 마치 큐비스트처럼 면을 분할하고 정확한 비례에 입각하여 형태를 묘사한다. 동시에 절제된 선으로 단순해진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런 사랑의 메타포는 기본적으로 선에 의해 충실하게 표현되지만, 때로는 기호로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에로스의 형태로 표지 된다.

그의 작품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원의 형태라든가 삼각형, 사각형의 형태들은 그가 정교하게 장치해 둔 공간의 여백에서 절묘하게 에로스의 상징적 포우즈로 재구성되거나 승화된다. 그렇다고 이런 에로틱한 자세가 추한 감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그림에 진정성을 돋보이게 한다. 특히 기하학적 형태와 순수한 여체와의 조화는 오랜 구성의 원숙미를 더하며 性의 아름다운 세계로 변화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그의 작업행위는 좌선을 통해 의식의 상태와 무의식의 상태를 통합하여 초의식적인 상태로 나아가고자 하는 선(禪)의 자세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의 초기작품에서 현재에 이르는 작품의 궤적 중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지닌 다양하고 풍부한 재료의 사용이다. 흙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합판위에 사용되는 모든 표현 재료는 하나의 방향으로 집중 된다. 그가 지향하는 예술의 정의는 아니지만, 정채의 예술은 성(性)적 욕망이 성숙된 성(聖)스러운 감정의 결정판이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정채가 빚어내는 화폭속의 모든 性은 대자연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예술가의 견해라는데 에는 이견이 없다.

정채가 표출해내는 性의 표현과 창작이야말로 생명을 탄생시키는 소중한 창조와 축복의 행위임을 우리는 인정한다. 동시에 아주 뚜렷하고 명백한 어조로 '목적이 사랑이고 性은 사랑의 도구일 뿐이며, 원리는 아니다.'고 발언하는 정채의 성에 대한 개념은 진지하고 집요하여 이미 다른 작가들과 확연하게 구별 된다.
여전히 현대미술 속에 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 그는 性에 대한 자신의 독창적인 언어가 보편적인 언어가 되길 열망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언어의 회화양식은 오로지 에로스적인 것을 넘어선 초월적인 사랑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다.

한결같이 수십 년의 시간을 그는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性을 작품의 주제로 표현하게 된 것에 대하여 神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그렇다. 정채가 성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단 하나의 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훌륭한 눈인가, 성스러움에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해내는 그의 매서운 눈, 그에게 눈과 손은 그의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도구일 뿐이다. 그는 그 아름다운 성의 본질을 우리에게 치열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전해준다.

이것이 우리가 그에게 감사하는 이유이다.


김종근 | 미술평론가. 부산 국제 멀 아트 쇼 전시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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