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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민 / 반복과 연속의 패러다임

김종근

강영민의 작품을 보면서 미술에 대한 두 가지 화법 혹은 수사학을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에게 요구되는 일관성에 관한 성찰과 반성적 언어이다. 작가의 작품은 일관성 있게 어떤 주제나 테마를 다루어야한다 든가 하는 논리와 시각이다. 또 다른 하나의 미술적인 이데올로기는 그림은 늘 새로워야 하고 그러기에 동일한 형상이나 테크닉으로 반복적인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당연히 강영민의 화법은 후자 쪽에 가깝다 . 그러나 나는 그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측면에서 다분히 전자 쪽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기에 강영민의 설치작품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과 그의 예술세계와는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작업을 바라보며 내가 왜 진작 이 작가를 주목하지 못했는가나의 게으름을 질책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일상적인 예술에 대한 고정된 관념이나 혹은 선입관을 수정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강영민의 작품은 두 얼굴이 아니라 천의 얼굴을 가진 작가이다. 그러나 사실 그가 가진 본질적인 얼굴의 본 모습 또한 하나이다. 비행기의 추락, 에로틱한 얼굴의 형상, 브라운관의 얼굴 이미지 , 각기 다른 공간의 이미지의 나열 , 나무로 만든 트로이의 목마든 자세히 보면 그의 작품들은 모두 저마다의 언어와 소리를 내고 있다. 동일한 패턴과 스타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 언어에는 사실 공통된 그리고 일관된 이야기 형식이 존재 한다. 나는 그것을 편의상 강영민의 반복과 연속의 패러다임이라 부르려 한다.

작가의 발언을 인용 해 보자. “ 내 회화 작업은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같은, 매체에 의해 발생되는 시각적 일루젼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 어떻게 하면 일루젼을 더욱 일루젼처럼, 곧 가짜를 더 가짜처럼 보이게 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브라운관의 주사선이 미디어와 일루젼을 매개하는 중요한 물리적 요소라고 생각했고, 이 생각을 그대로 작품의 표면에 응용했었다.” 그는 일류전과 그 실체를 그대로 리얼하게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일루젼에 대한 시각은 많은 사진이나 이미지를 채집하여 변형 시킨 만든 작품들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즉 작가는 사진이나 영화 등의 매체에서 일어나는 일루젼과 기타 사회 문화적 현상에 관련된 소위 중독 된 이미지들을 익숙한 일루젼으로 포착한다. 그 후 자르거나 말거나 분절 된 형식으로 그 왜곡된 이미지를 다시 사실 혹은 진실의 영역으로 끌어 들인다 . 그는 “이면의 정체를 확인하는 아찔한 순간”의 표현 즉 그가 작업으로 보여주려는 것이 있다면, 아마 이런 “일루젼이 갈라지는 순간”이라고 정의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아마도 반이정이 “가늘게 분절되거나 잘게 조각난 화면처럼 ‘불안정성’의 연속이라고 서술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세상을 혹은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유를 그는 ‘탐스러운’ 여체의 피부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그것을 월간지 요리코너의 사진이 주는 즉 비식용 재료를 동원해서 갖 요리한 음식처럼 보이도록 조작“ 되는 것으로 보는 것에서 우리는 그의 비틀린 시각과 뒤집어 보려는 작가적 욕망이 교차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 이것을 그는 제3의 전환이라 부르지만 이것은 그의 예술의 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시각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그런 전형적인 작품들이 화면을 늘이거나 변형 시킨 <하루의 단편>(2004), <캘리포니아 걸의 춤>(2006)), 그리고 화면을 가로 세로로 잘라 원통으로 나누어 놓은 <조지 George>(2004), (2007))들로 제시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주목 할 만 것은 다른 작품들이 비교적 실재 이미지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비해 <중국산 트로이의 목마>(2006)) 라는 작품은 작가의 이념과 실체, 그것의 본질과 허상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하면서 오버랩 된 가장 이데아적인 작품으로 말하고 싶다.
그 점에서 강영민은 다양한 이야기를 꾸며 내거나 연출 할 수 있는 강력한 중국의 설치작가차이궈창 같은 스토리 메이커이다. 그는 동일한 언어를 말해야 한다는 예술적 관념이나 도그마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기에 그의 컨텍스트나 매체조차도 그리고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미디어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그는 여전히 시각적 트릭을 구사하는 화가로서 트로이의 목마에 포함된다.

강영민은 수많은 일루젼들과 이미지들, 예술작품에 무수히 출현하는 채집된 허상 혹은 환영들을 바라보는 감상자들에게 일루젼 이라는 주제의 허상을 튜닝 해 준다. 그래서 그는 작가라기보다 존재하는 현실을 비틀려 칼질을 통하여 보여주는 성형외과 의사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이미 개념 지워진 오브제들을 사진의 절단과 조립으로 굴절 된 시각적 원형을 복구시키려 하는 노력과 동일시된다. 나는 그래서 그의 작품에 주목한다. 그가 만들어 내는 진실을 보라는 그 진실의 본질조차도 사실이 아닌 한 파이프를 그린 그림을 향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라는 본질이 아닌 것을 본질로 복구시키려는 그의 노력 또한 하나의 일루젼이자 이미지 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 시켜주는 예술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작품들을 일컬어 눈속임 혹은 눈의 실수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강영민은 반이정이 지적한 것처럼 멀쩡한 이미지 원본을 잘게 조각내거나, 잡아 늘여 변형시키는, 아나모르피즘 anamorphism을 제작의 근간으로 삼는 부정 할 수 없는 형식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것이 그림 혹은 예술인 한 모든 것은 눈속임의 회화 trompe loeil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로 궤변 되는 초현실주의 미술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그림처럼 강영민의 작품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푸코가 말한 파이프는 현실 속에서 파이프지만, 파이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처럼 강영민이 제작하는 모든 오브제의 재현은 시각적 트릭을 지닌 또 다른 진실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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