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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폐 / 예술가의 성공과 자살

김종근

1999년 10월 5일 프랑스 파리의 르몽드, 리베라시옹 등 신문들은 한 천재화가의 죽음을 알렸다. ‘베르나르 뷔페 자살 ‘.

한 세기를 빛냈던 유명했던 화가이기에 그의 자살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에 가까웠다. 우리에게는 이미 40 여 년 전 중학교 미술교과서에 작품이 소개될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과 독특한 표현법으로 전 세계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가장 대표적인 화가였다. 그의 나이 71살,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화가, 프랑스 현대 예술의 교주로 불렸던 뷔페. 그는 왜 자살을 선택 했을까? 아니 누가 그를 죽였는가?

그는 파리의 야간 고등학교에서 데생 수업을 받고 파리의 에꼴드 보자르에 입학했다. 18살. 그는 파리의 보자르 화랑에서 열린 ‘30세 미만의 살롱전‘에 자화상을 출품하고 이듬해 피에르 데카르그의 발굴과 추천으로 파리의 대학가이자 라틴식당들이 모여 있는 캬티에 라탱의 작은 서점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삐쩍 마르고 거치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의 작품에 신문기자들은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쓴 당대의 뛰어난 시인 랭보에 비유 하였고, 난 잔인함이 주는 쾌락을 묘사하는데 내 재주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 ‘말도르로의 노래’ 의 주인공 시인 로트레아몽에 비견하기도 했다.

잔인한 선을 가진 화가라고 일컫는 그의 선묘법, 후벼내는 듯 한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선으로 그의 명성은 순식간에 유럽에 알려졌다. 이태리의 로마와 밀라노, 스위스의 바젤, 영국의 런던, 암스테르담 등에서 그의 명성은 자자했다. 그의 나이 고작 27세 이었다. 1955년 프랑스의 미술잡지‘ 꼬네상스 데쟈르’가 기획한 전후의 화가 10인중 1위에 오를 정도로 그의 인기는 절정에 올랐다.

28살에는 프랑스의 최고작가로서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해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작가로 지명도를 떨쳤다. 놀랄 만큼 간결하고 날카로운 선, 힘 있는 선들을 바탕으로 한 구성 등으로 그는 인간의 불안과 격분, 공포에 대한 거부의 세계를 강렬하게 묘사 해냈다.

그러나 19세기의 프랑스의 사실주의의 후계자가 되기를 희망한 그는 프랑스 투르 자택에서 비닐봉지를 얼굴에 덮어쓴 채 삶에 지쳤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1971년 43살 그는 퐁피두 대통령이 주는 슈발리에 들라 레지옹 드뇌르 훈장까지 받은 그러나 정작 프랑스 현대미술의 보고이자 산실인 퐁피두센터는 단 한 점도 그의 그림을 사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고, 중요한 전시 때도 그는 그런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공식적으로는 대접 받지 못했다.

이유는 70년대 이후 그의 예술성을 상업성에 맞춰 그림을 그렸던 예술가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 일부에서는 화랑이 단순히 뷔페의 명성을 이용하여 그림만 팔아먹었고 그의 작품에 있어 예술적인 평가를 위한 노력에는 무관심 했다고 화랑을 비판했다.

왜 프랑스 평론가들은 그들이 이미 약관 20세의 나이에 비평가상을 주면서 천재라고 했던 작가에게 등을 돌렸을까? 리오넬 죠스펠 총리가 ‘전후의 빈곤과 고통을 예리하게 그려낸 작가’로 쟈크 시락 대통령이 ‘그의 붓놀림과 채색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하다’며 거장의 죽음을 애도 했지만 한 예술가의 벽에 부딪힌 자살은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예술이야말로 최고의 비즈니스라고 한 워홀, 스스로 목숨을 꿇은 뛰어난 조각가 권진규, 마크 로드코 등, 예술보다 오히려 상업성이 더 평가 받는 현실 속에 외롭고 쓸쓸한 예술가의 길과 냉혹함을 가져야만 할 비평가의 도덕도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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