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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왈종」의 삶과 예술

김종근

화가 「이왈종」의 삶과 예술 서귀포에서 부르는 中道의 노래


제주에 가서

제주에 닿고 싶었던 것이
육신뿐이랴
後生얹어 사는 그대처럼
제주에 이르면
발길이 묶인다.

바다만으로도
모든 생이 보이고
뱃길만으로도
가야 할 길이 보인다.

한라에서 굽어보면
어떤 인연도 다 흐르는구나.
잡으려고 안간힘 하는 어떤 인연도
제주 바람 한 점에 미치지 못하느니.
허허롭게 비우고 돌아가도 될 것,
네가 있어 내가 산다는
그 노래의 헛됨도 정겨운 것은
제주의 너른 품에 안겨서일까.

그는 이렇게 제주에서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애송한다. 고독한 예술가의 삶을 가슴 아린 시적 상상력으로 마치 이왈종을 위한 이 자전적 시는 우리들에게 한 시대를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인내를 가져야만 하는 것인가를 가슴 깊게 보여준다.

그는 서울을 떠나 제주에 닿을 내리면서 예술가가 걸어야 첫 번째 고행의 길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서울을 떠나 그는 결코 육신만을 한라에 내리고자 하지 않았다. 세상의 인연이란 것이 제주 바람 한 점에 미치지 못할 것을 그는 일찍이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3년 <생활 속에서> 라는 연작을 시작하면서 한국 산수화의 전통적 형식과 문맥을 벗어나기 시작한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마치 예술가란 끊임없이 무엇인가 좀 더 새로운 것을 찾아 변신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또한 삶에 있어서도 욕망의 부질없음을 터득한 것처럼.

그가 그의 그림에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은 중도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는 생활 속에서 좀 더 나아간 생활 속에서 - 중도의 세계로 정착했다. 이 중도의 세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왈종의 예술철학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정신적인 배경이자 뿌리이기도 하다.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그는 중도를 이렇게 풀이했다. “중도란? 평등을 추구하는 내 자신의 평상심에서 시작된다. 환경에 따라서 작용하는 인간의 쾌락과 고통, 사랑과 증오, 탐욕과 이기주의, 좋고 나쁜 분별심 등 마음의 작용에 따라 끊임없이 일고 있는 양면성을 융합시켜 화합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주체나 객체가 없고 크고 작은 분별도 없는 절대 자유의 세계를 추구” 하는 것이다. 그는 수없이 되뇌였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자. 욕심을 버리고 집착을 끊자. 선과 악, 쾌락과 고통, 집착과 무관심의 갈등에서 벗어나 중도의 길을 걷자. 좋은 작품은 평상심에서 나온다.”
마음과 육체가 둘이 아닌 세계,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세계. 그것은 바로 아무런 집착이 없는 무심(無心)의 경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도의 세계가 바로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관이다. 실제 그러한 철학적 사고는 1990년 제주로 낙향하면서 서울이란 도시의 천박하고 번잡함을 버리면서 그에게 찾아왔다. 그러나 제주는 사람을 아니 이왈종을 외롭게 했다. 1990년대 이후 낙향은 그에게 엄청난 작품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먼저 그는 막대한 양의 대형 장지작업을 해낼 수 있었고 , 도조와 도판작업 등 표현과 재료, 주제에 있어서 도시의 전형적인 생활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공간을 그림 속에서 아우르는 무한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었다. 90년대 중반 요철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작업들이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한 열매는 1997년 개인전에서 화려하게 꽃피웠다. 두터운 장지 그림의 화강암의 마티에르는 박수근의 회화를 연상시키면서도 독특한 화면을 구축했고, 실험성이 돋보이는 도조 작품, 모시천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양식으로 천만으로 컴포지션을 해 직접 아크릴로 색을 입힌 콜라주 형태의 대형 보자기 작품들에서 그 진가가 드러났다. 동시에 그동안 일관해 온 ‘생활 속의 중도’에서 ‘제주 생활의 중도’로 그의 주제는 확장되었고 비로소 그의 작품에 하늘을 나는 물고기·사람보다 아니 집보다 더 큰 꽃등·돌하르방·배·말·자동차 등은 물론 하늘을 날아 다니는 사람이 같은 크기로 등장한다. 아니 어느 것은 오히려 사람보다 더 크게 그려지기도 한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과 만물은 물고기나 새처럼 하나의 똑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그림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는 화면 속에 보여지는 풍경들을 통해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여 준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찔레꽃으로 표현하고, 쾌락을 즐기는 사람을 동백꽃으로, 증오하는 사람을 새로, 고통받는 사람을 텔레비전으로, 희망과 평등,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을 물고기로 승화시켜 의인화하는 동안 나의 마음은 평상심에 가까이 다가가서 중도의 세계를 꿈꾼다”고 했다.

그의 작업중에서 근래에 돋보이는 것 중 하나는 도조와 보자기 작업이다. 그의 작업이 동양화였다 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부분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가 새롭게 시도하는 작품형식 들이었고 또한 지금 작업하고 있는 감탄할만한 작품들이 거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몇 년전 절친한 벗이 갑자기 유명을 달리한 이후 그 친구를 위해 매일 향을 피우기로 하고 향대(香臺)를 하나 만들어 보았는데 흙의 질감이 너무 좋아 집에 전기가마까지 들여놓게 되었다”고 그 작품의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시 때에 그는 높이 30∼50㎝의 향대 17개와 소형 제기(祭器),도판 등 모두 31점의 도자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향대가 기본적으로 남근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욕망을 불태우는 마지막 단계가 죽음”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런지도 모른다. 작가에게 있어 새로운 작품이란 언제나 불안하고 기대를 모은다. 이왈종은 최근 두 가지 새로운 작품의 스타일에 열정을 쏟고 있다. 하나는 이전처럼 나무판에 양각으로 이미지들을 파내어 색을 입히는 채색판각이며 그 대상들은 대부분 그가 즐겨 그리던 꽃의 형상을 판각에 새기는 것으로 전통적인 창살의 형태를 기본으로 그 위에 남녀가 정사를 나누는 에로틱한 춘화적 테마가 꽃 중에 묘사되어 있다.

그는 근래 제주도 작업실에 가마를 설치한 후 부쩍 채색의 도조작업을 늘리고 있다. 그 이미지들은 이전의 채색판각 작업들과 유사하게 만들어지고 있는데 둥글거나 사각의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구워 내어 채색을 입힌 것들이다. 이전에 갈색톤으로 마무리 되던 사각형의 외형을 좀더 크게 한 것들이다. 이것들도 그가 평면에서 보여왔던 제주 생활 중도의 풍경들을 입체화시키고 있는데 색채와 조형성 그리고 테마에 있어 거의 최고의 장식성을 곁들이고 있다. 그의 이 그림들은 평면작업과 마찬가지로 기법과 모든 표현형식에서 자유스럽고 원근법은 물론 유유자적한 시점으로 제주 생활의 풍경을 아우르고 있다. 더러는 민화에 볼 수 있는 모습이나 사찰의 창 문양을 떠오르게 하는 이 작품들은 그러면서도 동양적인 자연관이나 사물을 보는 관점을 드러낸다.

그는 오래전 반야심경에 그리고 요즈음은 좥부다budda - 바bar좦라는 경쾌한 동양음악을 변주한 음악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특히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눈에 보이는 물질인 색(色)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空)의 세계와 같다는 것으로 그는 이해한다. “오랫동안 노장 사상에 푹 빠져 있었다”고 고백했다. 좥생활 속에서 - 중도좦 시리즈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좥노래하는 역사좦 삽화 중 노자·장자 해석에 어울리는 그림들이 그러한 그의 사상의 궤적을 말해준다.

공통적으로 지적하듯이 ‘그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내면 세계가 보여지는 창조적 조형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그의 회화 세계 속에는 현대인의 진솔한 모습, 영원한 인간의 명제와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대한 구도적(求道的) 질문과 해답’ 이 담겨져 있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일상의 삶에 뿌리를 내리면서 평범한 제주 풍경을 전통적인 관념의 산수에서 훌쩍 벗어나 새롭게 시각화하고 조형화 시킨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어디에도 필법이나 형식에 묶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화가가 아니다. 이왈종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그림을 만들고 조각한다. 그러나 아마도 조선일보의 노래하는 역사 삽화 때문인지 아주 자주 나타나는 정사를 때로는 부적절한 한 쌍의 성교(性交)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섹스라는 것도 부처의 말씀을 인용한 “하나는 전부요, 전부는 하나다” 라는 그의 철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곧 그가 추구하는 중도의 세계이다. “중도는 평등을 추구하는 나의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비롯한다” 고 했다. 그러나 이 평등은 분명히 안정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평형을 함축하는 것도 아니다. 중도란 과거와 현재의 상호 의존성을 인식하면서 전통과 현재를 균형있게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언젠가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사랑과 증오는 결합하여 연꽃이 되고, 후회와 이기주의는 결합되어 사슴이 된다. 충돌과 분노는 결합하여 날으는 물고기가 된다. 행복과 소란은 결합하여 아름다운 새가 되고, 오만함과 욕심은 결합하여 춤이 된다. 나의 작품에서 완전한 자유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는 어쩌면 제주에서 인생이 가져다주는 모든 만다라의 세계를 외로움과 기쁨, 고통과 환희 속에서 자신을 던져 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아주 겸손한 몸짓으로 얼마전 그는 한 신문의 설문조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로 추천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겸손해 한다. 자기는 생활인에 불과하다고 .
그러나 분명 그는 아주 평범한 생활인이 아니고 훌륭한 화가이다. 이미 손수호(국민일보 문화부장)는 그의 예술과 삶에 관하여 “추사 김정희가 고독과 설움을 삭였던 그 곳에서 작가가 건져 올린 투명한 회화 언어는 눈부시다”고 극찬했다. 그렇다. 지금 그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최고의 예술가라는 칭호는 “작가는 외로워야 한다. 내게 있어서 외로움은 작업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지닌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 어찌 외롭지 않고서 가능한 일인가”라고 그가 자신에게 되물었던 그가 애타게 물어왔던 것에 대한 아주 작은 해답일 뿐이다.

<일본 KHAN STYLE 잡지 게재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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