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쟝 피에르 레이노 ‘위험, 금지의 오브제 단어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김종근

쟝 피에르 레이노의 작품 앞에 서면 긴장감을 느낀다. 그 긴장감은 매우 강렬하며 정열적이고 동시에 일종의 불안감마저 수반한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경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그가 일상적인 공통의 언어들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1999년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파리의 쥐드폼 미술관에서 두 차례 그와 만나면서 나는 각기 다른 이질적인 종류의 세 가지 질문을 던졌었다.

당신에게 있어 벽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의미는? 빨강색은? 그리고 화분은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기 위해 내가 필요했던 이 몇 가지 물음 앞에 그의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벽이다.

이빨이 잘 맞아 정리된 하얀 벽, 타일로 깨끗하게 붙여진 그런 벽이다 . 그는 이 벽에 관한 작업을 1967년부터 시작했고 그러나 그 벽에는 언제나 빨간 색의 오브제들이 빠짐없이 붙어있다. 이미 그의 오브제의 장치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감’을 그는 스스로 화가나 조각가로 불리길 단연코 거부한다. 그는 자신을 ‘ 20세기를 살고 있는 한 예술가’ 로 불러주길 주문했다. 그는 집을 스스로 짓고 부수고 그는 벽과 함께 작업한다. 1993년 그는 자신이 살았던 셀 쎙 클로드의 집을 부수고 이것을 다시 천개의 양동이에 담아 보르도의 미술관에서 전시했다.

그의 오브제는 늘 벽과 함께 다시 그의 일정한 공간속에서 재현된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벽은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표현의 장이고 캔버스이고 화폭이고 무대이다 . 그의 작품 속에 색채는 매우 강렬하고 순수하고 그는 색깔을 좋아한다. 빨강은 매우 역동적이고 정열적이다 .순수하다 그는 보여주는 것 이외에 다른 일체의 이미지를 그에게는 금지를 나타내는 공통의 언어가 있다 .일방통행을 가리키는 표지판의 무수한 반복과 나열 , 금지 혹은 위험을 상징하는 붉은 색상의 일관된 차용으로 완결 된다. 그는 특별히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가 3살 때 그의 아버지는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회사의 책임자였고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누보레알리즘의 세례를 받았던 그는 누보레알리스트를 통하여 미술에의 확신을 얻었고 또 확신을 주었다. 그들이 오브제를 사용한 것처럼 그는 오브제를 과감하게 그의 화면에 끌어들이고 있다. 1960년 일찍 그는 화분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화분을 만들었고 또 그것을 무수히 나열했고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다루듯이 화분 작품을 선호했고 지속적으로 해왔다. 레이노는 1998년부터 국기 시리즈 작업을 했다. 2005년 평양에서 인공기를 들고 사진을 찍은 개념 미술 작업은 2006년 국내 전시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다. 이 대형의 황금색, 빨강, 노랑, 하양 화분 등은 베이징 자금성, 파리 퐁피두센터, 도쿄 하라미술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등에 세운 빅 팟(대형 화분) 설치되어 있다.

'화분은 생명을 심고 키우는 하나의 작은 공간이고 우주였다'는 그는 '어린이들이 꿈을 꾸듯이 자유롭게 생각해 크게 만들었다'고 했다. 빅 팟은 2차 세계대전으로 아버지를 여읜 후 개인적인 우울감과 시대의 절망감을 표현해 만든 작품이다. 그는 언제나 생명을 염두에 두고 있다.

생명이 자라야 하는 공간이지만 화분 안을 시멘트로 가득 채우거나 막아놓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지난 한국전시를 위해 백의민족이라는 한국인을 상징해 흰색으로 특별 제작한 빅 팟을 설치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가 그런 오브제를 선택한 것이 그가 전공했던 원예학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아마도 칼더는 몬드리안의 작품을 가지고 그것을 움직이고 싶어 했을 꺼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작품을 가지고 만약 몬드리안이 살아 있다면 그가 아마도 나와 같은 작품을 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어쩌면 이것은 몬드리안의 지적 순수함과 회화에 대한 질서를 그는 자유성의 극대화라고 지적한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그릇을 사람들의 꿈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어린왕자가 꿈을 꾸도록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꿈을 꾸도록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근래에 그림이라는 Peinture와 단어시리즈. 특히. 단어시리즈를 한국 전시에서 처음 공개 했다. 그 단어들은 ART, MONET, PICASSO, GAUGUIN, VAN GOGH 등이다. 마치 대형 글씨 광고판을 보는 것 같은 단어시리즈는 그가 즐겨 사용하던 색으로 배색했다.

그는 '회화를 생각하다가 위대한 화가가 떠올랐다‘고 했다. 피카소, 모네…. 유명한 화가의 이름만으로도 그들의 작품까지 생각하게 되는 현상 같은 것 말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품이 상표와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소비되는 것처럼 이제는 예술품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를 인식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작가 이름을 쓸 때는 이름뿐 아니라 그들의 삶과 역사를 함께 쓴다고 생각한다. 피카소나 고갱과 같은 유명한 화가 이름은 유명한 상표와 같아 관객들이 사전에 이미지를 품고 전시장을 찾는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회화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고 개념과 관련이 있다. 즉 손이 아닌 머리로 하는 작업하는 것이다.

이제 레이노의 작업실은 미술관으로 탈바꿈한다. 프랑스 정부가 그의 예술성을 인정해 작업실을 사들여 미술관으로 만든 것이다. 사르코지 현 대통령이 내무부 장관이었을 때 작업실을 시에서 구입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 예술세계를 볼 수 있도록 공공미술관으로 바꾼 것이다. 70을 앞두고 있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업만큼 창작에 불태우는 그는 65세에 얻은 첫 아기를 젊음의 원천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 아들 `마티스`와 노는 재미에 푹 빠진 레이노는 40여 년 전 첫 결혼 이후 수많은 여성을 만난 후 60세에 26세 어린 지금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예술가는 아이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아이를 안 가지려고 했어요. 하지만 지금 아내를 만나면서 나도 모르게 아이를 가지고 됐죠. 아이가 태어난 후 또 다른 나 자신을 발견한 느낌이에요.' 레이노는 아들 이름을 `마티스`라고 지었다. 마티스는 피카소, 르누아르 등과 어깨를 겨루는 화가가 되라는 뜻이 아닐까 ?

'제 삶 자체가 예술이에요. 제 아들 이름까지 예술가 이름을 지었잖아요. 예술가는 예술과 삶이 동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만난 예술가 중 예술과 사랑에서 잊을 수 없는 작가이다. 피카소 , 오키프 ,김흥수, 그리고 레이노 ,3-40여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사랑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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