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강형구의 트랜스 하이퍼 리얼리즘

김종근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화가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화풍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뒤쳐진 듯 한 느낌을 가졌지만 그는 스스로 매사 어눌했다고 했다. 그가 미술대학에 입학한 1973년 우리나라의 미술계는 그야말로 서구에 미술영향을 받은 현대미술이 화단을 휩쓰는 시절이었다. 그는 그 예술의 “정형화 한 화풍”이 싦었다. 그는 스스로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싶어 했고, 그리하여 그의 그림은 남과 달랐고 교수들은 그를 눈 밖에 놓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묘사할 때 괴짜 같은 행동을 많이 한 작가로 말한다. 예를 들면 “통조림 깡통에 사람 눈동자를 만들어 넣었는가 하면, 밀레의 ‘이삭줍기’는 세 아낙이 이삭이 아닌 돈을 줍는 형상으로 바꿔 그리기도 했고. ‘삐딱함’이 본인의 체질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다. 그는 일찍 결혼하면서 먹고 살기 위해 9년 이란 긴 시간을 직장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화가의 꿈을 버리지는 못했다. 퇴직금으로 갤러리를 차렸고 그는 실패했다. 갤러리를 말아먹은 후 그림을 위해 지하 작업실에서 그는 미친 듯 작업했다. 그 시절은 길었다. 꼬박 10여년을 작업실에서 두문불출 하면서 그림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가 얻은 것이 하이퍼 리얼리즘 풍의 회화였다. 특히 극 사실작가의 그룹전을 보고 자신의 작업에 큰 용기와 자신감을 가졌고, 이윽고 스탈린과 호찌민의 초대형 초상을 내 놓았지만 평가는 냉혹했다. 여전히 그는 무명이었고 현대미술의 흐름은 일부작가들에게 어필 했다. 그는 자장면 배달원 등 주변의 지인들을 사람의 키보다 더 큰 캔버스에 얼굴을 그렸고 사람들은 그의 놀랄만한 묘사력과 리럴리티에 감탄했다. 그는 잘 그린다는 용기를 얻었지만 여전히 그의 그림은 잘 그린 초상화가로 치부되었다. 그는 2001년 예술의 전당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화단에 등장 하였다. 데뷔가 늦어서 그렇지 그는 1992년부터 10여 년 동안 공개하지 않은 무수한 미발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 작품들은 200여 점이 넘는 200호의 그림으로 온통 인물을 극사실로 섬세하게 그린 작품들이었다. 여기서 그의 탁월한 사실력은 인정 받았다. 그러나 그의 미술계의 예술적 평가는 여전히 그의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냉담 했다. 그의 회화가 너무 리얼리스틱하였고 너무 초상화다운 면들이 강렬하여 미술이란 회화의 형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인색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다른 시도를 선보였다. 그것은 실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정말 그림 잘 그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캐리커처 작업이었다.  세계와 한국의 근현대사를 움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등 각 분야 400여명의 얼굴을 다양한 테크닉과 형식으로 인물의 특징을 찾아내어 <강형구의 캐리커처로 본 얼굴>(세종문화회관)이라는 전시였다. 그의 캐리커처들은 흥미로웠고 훌륭했다. 그는 캐리커처가 본격적인 예술장르로 진입하기를 희망했다. 그림들은 저마다 색다른 형태와 방식으로 정교하게 완성된 입체감이 살아난 그림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빛을 발한 것은 아라리오 갤러리에 픽업 되면서 였다. 그의 작품은 명확한 하이퍼리얼리즘이었다.

흔히 하이퍼 리얼리즘은 극사실주의로 번역 통용 된다. 그들의 특징은 일상의 흔한 정경을 사진과 같이 극히 세밀하고 리얼하게 묘사하는 스타일로서 1960년대 미국에서 먼저 일어난 새로운 회화 및 조각의 경향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하이퍼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았다. 슈퍼리얼리즘(Super realism), 포토리얼리즘(Photo realism)등으로도 불리는 이 화풍은 일체의 주관을 배제한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놓는 일종의 사진적 표현이다.눈앞에 있는 이미지의 세계를 형상 그대로 다룰 뿐만 아니라 냉정하게 기계적으로 대상으로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한 대상들을 크게 확대시켜 화면에 어떤 충격적인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이런 컨셉과 강형구의 작품 사이에는 분명 일치 하는데가 있다. 머리카락 하나 하나까지 정교하게 그려내는 그의 그림은 한국적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점점 자리잡아 갔다. 그러나 그는 “‘차가운 외면성’을 강조하는 하이퍼 리얼리즘과는 상반되게, 철저하게 내면성을 드러내기 위해 극 사실기법을 차용할 뿐이라고 본인의 작품과 하이퍼를 구별했다. 사진 한 장 없는 다빈치며 미켈란젤로, 나의 미래의 모습을 극사실로 표현해냄으로써 ‘사진이 담을 수 없는 허구’를 그려내고 싶은 것이다.” 라고 했다.
그 자신의 발언처럼 이제 그의 작업은 하이퍼의 옷을 갈아입은 채 자신의 감성을 이입하는 변형된 트랜스 하이퍼 리얼리스트이다. 즉 트랜스 하이퍼 리얼리스트인 것이다. 그 자신 또한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스트인 척 클로스에게 입은 영향을 부인하지 않는다. 분명 그의 작품은 사진 혹은 사진처럼 캔버스에 옮겨놓는 포토리얼리즘과는 다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강형구의 작업에는 작품을 베끼려는 전사의 대상이 되는 사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피사체가 존재하지 않는 회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의 작품과의 차이는 과거에 실존했던 인물을 현대적 이미지로 바꾼 다음, 새로운 이미지로 인물을 재해석하여 탄생 시키는 화법을 따른다.

강형구 그는 드디어 성공했다. 아라리오는 그의 이런 집념의 표현과 날카로우리 만치 집요한 인물묘사로 관객을 압도하는 인물에 주목하면서 그를 해외의 시장에 내 놓았다. 그의 작품은 스페인의 아르코, 아트 쾰른, 아트 시카고, 시드니 아트페어 등 세계적인 아트페어에서 인기를 얻었고 또한 깊고 징그러울 만큼 철저한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또한 크리스티나 소더비와 같은 해외의 경매장에서 그의 작품들이 100프로의 낙찰률을 보이면서 한국작가들의 위상을 높이면서 강형구는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들어섰다. 해외 유수 미술관에 작품이 컬렉션이 그러한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말한다. ‘내가 그리고 싶은 사람’을 그린다는 게 내 원칙이다. 게다가 사진처럼 인물을 똑같이 그리는 것도 싫다. 특히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그림 속에 끌어들여 ‘진실 같은 허구’를 보여주는 작업에 나는 흥미를 느낀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심지어 죽어가는 ‘미래 내 모습’을 그리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그가 고흐처럼 자화상에 집착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그림이다. 관객과 ‘대면의 상황’을 가져오니 말이다. 그림 속 내 눈은 관객과 수시로 마주치며 말없이 대화하는데, 그 순간이 나는 정말 짜릿하고 좋다. 이처럼 매력적인 작업이 또 있겠는가.라고 술회한다. 그가 스스로의 자화상을 그리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는 또한 마릴린 먼로, 앤디 워홀, 오드리 헵번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 얼굴을 확대하여 대형 캔버스에 극사실적으로 묘사해 자신만의 트렌드와 브랜드를 가지면서 주목을 끌었다. 그의 작품에 표현은 알루미늄 패널 시리즈로 에어브러시, 못, 드릴, 면봉, 이쑤시개, 지우개 등 온갖 수단들을 통해 그려지는 인물의 주름과 솜털,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의 반짝임 등을 알루미늄이라는 새로운 소재로 리얼하게 표현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역시 그의 인물 표현은 주어진 인물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바라다본 시선으로 강조와 왜곡을 통해서 초상화의 한계를 넘어서는 미술사적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보고 작가가 의도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얼굴 처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초월한 이미지들이다.

강형구 작업에 진정성이란 이런것이다. 그는 이러한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입체작품으로 처음 선보이는 책 모형의 대형조각 작품으로 아브라함 링컨, 존 F. 케네디,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의 얼굴을 담은 높이 2.1m, 넓이 3.1m, 두께 1.1m의 조형물에 그가 가장 존경한다는 세 인물의 초상화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도 이러한 예에 불과하다. 눈이 빛나도록 번득이는 고흐의 자화상, 즉 담배 연기를 내뿜는 고흐의 이미지로 전환하는 창조성이야말로 강형구의 기술과 역량이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실재로 사진을 본래의 이미지와 또 다른 이미지를 합성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완결된 작업이 된다. 그가 이렇게 번거로운 이미지의 합성으로 인물을 만들어 놓는 것은 본래의 대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대상을 창조하고자 하는 이유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작업을 하이퍼 리얼리즘과 구별하려는 가장 큰 증거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모티브가 되는 스타의 얼굴 또는 모델의 얼굴에 살아온 환경, 품성, 성격을 포착하고 자 한다. 우리가 그의 작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2009년 1억 9천이나 1억 원에 거래 되고 있는 ‘고흐’나 ‘달리’의 작품만은 아니다. 그가 진실로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언어로 만들고 져 하는 피나는 노력이 그림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