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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 앙리 마티스

김종근


1869년 프랑스 동북쪽에 있는 카토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뒤늦게 예술가로서 출발한다. 법률가를 지망했던 마티스는 21살 되던 해에 구피의 회화론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1895년 국립미술학교의 구스타브 모로의 아틀리에에서 루오, 마르케 등과 야수파 그룹전에 참여하게 된다.





구스타프 모로의 도움으로 화가로서의 꿈을 이루게 된 그는 인상주의가 버렸던 구성을 복귀시키려는 폴 세잔느의 견고한 구성의 영향과 폴 고갱의 장식적인 색면 반 고호의 색채의 열정과 변형의 영향에서 야수파 화가로 성장했다.
일찍이 스승인 모로가 마티스에게 [너는 회화를 단순화 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던 것처럼 그는 강렬하고 원색적인 색채로 평면을 단순화 했다.
그래서 포비즘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비평가 루이 복셀이 지칭한 야수파 라고 한것은 다름 아닌 화면을 단순한 2차원의 평면으로 환원함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색치의 표현력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작업노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예술은 모든 두뇌 노동자의 피로를 풀어주는 편안한 안락의자 같은 것” 이라고. 그는 예술세계가 깊어지고 원숙해질수록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술을 추구했다.
1908년경에는 강한 색채효과를 억제하는 한편, 새로이 전개된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입체주의(큐비즘)의 방향으로 눈을 돌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10년의 뮌헨 ‘근동미술전’의 인상, 1911∼1913년 두 번에 걸친 모로코 여행으로 왕년의 포브 시대와 다른 장식적인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여 특히 아라베스크나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이나 순수색의 병치로 독특한 작풍을 창조하였다.

마티스가 여기 <모자를 쓴 여인>을 그리기 전까지 열정적인 화풍과 신인상파의 쇠라의 점묘법적인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야수파로서의 시작이 되는 작품이 바로 모자를 쓴 여인이다. 드랭의 야성적인 채색, 의도적인 부 조화의 구성으로 화려한 인물을 표현한 것이다. 이 모자를 쓴 여인의 모델은 바로 자신의 아내인데 이 그림의 특징은 그림자 없이 과감하고 거칠게 검은색, 붉은 색, 보라색 등 강렬한 색채의 사용이다. 그는 이 작품을 발표 후 대중과 화가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부조화스러운 색채 때문이다. 화가 모리스 드니는 고통스러울 만큼 현란한 그림, 레오 슈타인은 어떤 그림보다도 거칠고 추하지만 강하고 밝은 그림이라고 평가했다.

인상파와는 다른 의도적인 빛과 색채만을 강조한 그림으로 강렬한 색채의 병치로 , 마티스 부인의 표정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부인마저 불쾌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이 마티스에게 “부인을 왜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나?”라고 묻자 “나는 작품을 통해 아름다운 부인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을 그렸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주관적인 느낌으로 색을 표현하고 경쾌한 터치로 생생함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는 신체를 이루는 본질적인 선을 찾아내 그 의미를 그의 화폭 속에 응축시키고자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림 안에서의 색채간의 관계'를 중시했다. 한 때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입체주의(큐비즘)에 경도되기도 했지만 , 보색과 경쾌하고 단순한 색면 효과를 평면 속에 담아내 마티스만의 예술세계를 구축 , 세기의 천재 파블로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 위대한 화가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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