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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은백색의 마술사

김종근

김형근,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은백색의 마술사라 부른다. 어쩌면 이 말 만큼 그를 특징적으로 잘 묘사해주는 이름도 없다. 1930년 예향이라 불리는 경남 충무시 남쪽의 미륵섬 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통영군 산양면 감평리이다. 아버지는 한의사로서 통영 일대에서는 명의이자 마을의 유지였다. 부친의 나이 50에 그는 늦둥이로 태어났고.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훌륭한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고 외아들로서 귀염과 엄격함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는 것에 관한 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 일본인 교장 선생이 아버지를 만나 그림 솜씨가 뛰어나니 그림공부를 시켰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외아들을 환쟁이 만드는 것은 집안을 망하게 하는 노릇 이라고 부친은 의술을 공부해 주길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때로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종아리를 맞으면서 한학 수업을 할 때도 그는 글자의 뜻보다 생김새에 더 큰 호기심을 가질 정도로 그림에 빠졌다. 심지어는 글씨 연습하던 붓으로 꽃과 강아지를 그리다가 혼이 난 일도 있다고 했다. 특히 연을 만들면서 연 머리에 그림 그려 넣는 것에서 탁월한 소질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수산학교에 입학하여 6.25동란이 터지면서 학병으로 입대 육군 소위가 되는 바람에 잠시 그림과 멀어지는 듯 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성어가 있다. 원래 주머니 속에 넣은 뾰족한 송곳은 가만히 있어도 그 끝이 주머니를 뚫고 삐져나온다는 뜻이다. 김형근의 화가로서의 출발은 그랬다. 그만큼 전란의 상황에서도 그의 그림에의 충동은 멈추지 않았고 그 의지는 국전에 첫 입선을 가져왔다. 그 작품은 폭격을 맞아 부서진 노을 진 전흔의 풍경을 반추상적으로 그린 <바다의 인상>이란 그림이었다. 비록 초기의 작품이 반추상적인 세계에서 시작 되었지만 사실적인 묘사의 세계에 흥미를 갖기 시작 했다. 당시 우리나라 화단의 화풍을 휩쓸던 전후 추상예술과 전위적인 모더니즘의 열풍에 빠지지 않고 그는 “사물을 자세히 보라. 나무를 볼 때에도 뿌리까지 보는 투시력을 길러라.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지 말라.'는 좌우명에 뜻을 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고집은 사실주의 화가로의 방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아홉 번째 국전에서 입선한 후, 오랫동안 낙선의 고배만 마시다가 결국에는 특선과 장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1968년 제17회 국전에서 <고완>으로 특선, 제18회 국전에서는 <봉연>으로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한 것이 그것이다. 장관상 수상 다음해인 19회에는 「과녁」이란 작품으로 화가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물론 그가 알려지긴 했지만 이로써 그는 시골 무명화가에서 일약 중앙 화단의 최고의 화제작가로 정상에 떠올랐다.

<과녁>은 궁터에서 볼 수 있는 과녁에 명중한 화살과 흘러내린 화살을 리얼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이 작품은 중고교 미술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내는 화살과 과녁의 관계설정, 아래로 흘러내린 화살은 당시의 “불안정한 삶의 정체성과 시대상을 함축적으로 암시해낸 명작”으로 불려졌다. 그때 “화단에서는 이 작품을 두고 한국미술의 물줄기를 바꾸는 혁명적인 사건”이라 했으니 당시 이 작품이 주는 충격을 잘 말해준다. 그것은 사실적인 회화의 매너리즘을 넘어서서 뉴 리얼리즘의 세계와 미의식을 실현한 것으로 평가 되었다. 이렇게 김형근의 작품세계는 대략 초기의 자연묘사를 위주로 인상파 풍, 60년대 중반 추상성의 시대로 정립을 위한 모색기, 1960년대 후기부터는 이른바 ‘은백색시대’로 독창적인 색감과 터치가 돋보이는 시기로 분류된다.

그의 작품이 전반적으로 표현에 있어서 다소 극사실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전반적인 처리에서는 단순하면서도 모던한 감각이 축을 이루고 있다. 그의 단순미와 여백과 공간의 절묘한 배치는 미국 유학시절인 1974년에 제작된 작품 <박스 시티>가 대표적이다. 쓰다가 버린 세 개의 종이박스를 나열한 이 작품은 객관적인 리얼리티를 구현한 경쾌한 작품으로 눈길을 끈다.

이 작품은 그의 회화에 있어 공간구성과 이미지가 어떻게 화폭에 등장하는지 분석을 해볼 수 있는 여지를 지닌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미 그의 작품들이 보여 주듯이 그의 표현 장르는 풍부하고 다양하다. 천성이 부지런한 그는 70년대 후반 공예학교 원장 출신답게 도예가로 변신하여 다시 한 번 화단에 이목을 한눈에 받았다. 1979년에 가진 선화랑의 ‘도예-도화전’이 그것이다. 이 작품들은 백자 위에 청화로 비상하는 학의 형태를 다양하게 묘사한 ‘학 시리즈’로 그의 작가적 역량과 표현력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준 전시이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 방향은 80년대에 들어 벽화제작으로 ‘한국 최대의 벽화’로 화제를 모았고 이 작품들에서도 그는 리얼리즘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줌으로서 그의 회화 세계의 지평을 확장 시켰다.
이후 그는 개인전 보다 수천 호에 이르는 대작들을 제작하게 되는데 청와대를 비롯한 검찰청, 은행, 박물관 등 이십 여개의 대작들을 장식했다. 1980년대 중반 그는 후에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꽃과 여인’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은 꽃바구니를 머리에 인 여인이 이미 꽃과 서로 한 몸이 되어 마치 사진의 스냅처럼 절묘하게 배치된다. 이 작품에서처럼 그는 언제나 철저한 형태묘사에서 시작하여 아카데믹하고 진지한 표현으로 대상의 진실성에 도달, 그 만의 독특한 조형언어로 승화 시켰다. 화풍은 사실적 묘사의 기법을 따르지만 그가 선택하는 주제들은 오래된 토기나, 부채, 가마, 백자, 청자 같은 기물들과 꽃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 그릇들은 대부분 그 누구도 시도 하지 않은 은백색의 바탕에 정갈하게 놓여 있다. 그의 화폭에서 은백색의 배경은 60년대 중반 사실화를 그리기 시작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은백색 배경에 독특한 정물 배치법으로 기존 화가들의 화풍에 차별성을 가져오면서 주목받기 시작 했는데 바로 그 차별성이 화폭에 꽃이나 화병까지도 맑고 실제의 사물 보다 투명하면서 선명하게 묘사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독자적인 배경처리 기법은 여느 다른 그림이나 화가에게서 볼 수 없는 은백색의 김형근 스타일이 되었다.

그 은백색의 출현배경이 미스터리 한데 김형근 회화에 있어 이 부분의 출발은 특이하고 전설적이기까지 하다. 대위로 군 복무 하던 시절 그는 감기 치료를 받다가 주사쇼크로 스무 시간이 넘도록 죽음의 상태로 떨어졌다고 한다. 죽었던 순간, 그는 자신의 몸이 불태워진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것을 그는 육체에서의 영혼 이탈 현상이라고 믿었다. 어느 순간 늘어졌던 손가락이 다시 원 상태로 회복되면서 전신이 따라서 회복되고, 처음 느껴보는 세계가 펼쳐졌는데 그 때 본 풍경이 바로 온 천지가 바로 그림 속에 나타나는 은백색의 분위기 그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동안 그가 바라본 바다도 선명한 은백색이 되어 황홀한 신비의 세계를 가지게 되었고 죽음의 세계에서 그가 본 은백색은 뇌리에 각인 되어 평생 그의 화폭의 바탕이 된 것이다. 그것은 곧 김형근의 미의식이 되었으며 화면구성의 기본이자 원칙이 되었다. 그의 회화에 특징은 이외에도 흔히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불리는 꽃과 미인의 묘사에 최고작가로 손꼽힌다는 점이다.
꽃과 미인이 만나 최고의 절대적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꽃과 여인 연작들은 언제나 순수하고 정갈한 이미지로 순수 미의 극적인 상태를 만들어냈다. 물론 그는 한 번도 꽃과 여인이라고 화제를 명명한 적은 없지만 그의 작품은 그 뛰어난 감각과 선명도로 미술 애호가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한 인물화에 보이는 기본적인 회화의 구성과 기법은 정물에서 절정에 이른 듯 했지만 인물화에서도 그 빛을 발하였다. 그의 인물화의 특징은 측면을 향한 옆 자세의 여인들로 도시적인 인상에 깔끔한 여인의 미모 이미지가 주류를 이룬다. 그 여인들은 한결같이 꽃을 안고 있거나 혹은 꽃바구니를 이고 있다. 그의 표현 중에는 꽃과 여인에 대한 그의 철학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꽃과 여인’“나는 여인이 세상을 떠나면 꽃으로 환생되고, 꽃이 세상에 향기를 풍기며 나와 지고 나면 한 여인으로 화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 꽃은 곧 여인이고, 여인은 곧 꽃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내 작품 속에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라고 정의 한바 있다.

여인과 함께 그려진 예쁜 새와 꽃. 이 오브제들의 정밀한 묘사를 통하여 그는 테마와 색채에 극적인 조화를 보이는데 스카프를 맨 여인의 어깨 뒤에 배경, 여인의 손과 그 위에 새와의 절대적인 풍경들은 결정적으로 붓글씨의 삐침 같은 배경들의 터치와 조화를 이룬다.

김형근 회화의 또 다른 특징은 여백이다. 그의 화면에 비워놓은 공간에 대한 여백이 단순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리, 공간, 좌우구성, 화면의 균형과 리듬 등을 암시해주는 여백으로서의 그만의 회화에 ‘숨 쉴 수 있는 공간’임을 의미한다. 그러한 여백에 전통적이며 정겹고 정감어린 사물의 한국적 모티브가 김형근 회화에 나타나는 엄숙함과 진실성이다.

한국적 모티브에서 우리가 지나칠 수 없는 것 외에도 백자의 맑고 투명한 시심을 닮은 여백과 거대한 벽화에서 보이는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꿈꾸는 평등의 세계 이상향, 천사들이 빨간색 말을 타고, 학들이 날아다니는 초현실의 세계와 환상적인 이미지도 김형근의 대작과 벽화에 나타나는 중요한 테마이다.

무엇보다 김형근의 회화성과 가치는 전통적인 소재 선택과 그것을 모던한 감각으로 처리하는 탁월함에 있다. 그의 이런 일관성은 미술평론가 이일이 <과녁> 작품에 대해 “작가의 조형언어로 과녁을 새롭게 구성했을 뿐 아니라 계산된 섬세한 터치가 그림에 힘을 만들어 냈다”고 전문가들도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평가가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주제의 작가에서 <고도의 조형성이 뒷받침 되는 소재>, <마티엘의 투명한 심도>, <조형세계의 끊임없는 심화작업>(오광수)으로 평가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평가는 평생을 한결같이 추구해온 장인의 길을 그가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오브제에 모든 작가의 상상력과 노력이 감정이입 되었기 때문이다. 고요한 화폭에 아름다운 여인들의 움직임, 꽃들의 떨림, 과일들의 빛남 그의 그림들은 이렇게 우리들 마음을 송두리째 은회색의 절대적인 풍경 속에 빠트리고 있다. 사람들이 그에게 은백색의 마술사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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