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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헤링 / 빛나는 실루엣의 황제

김종근

빛나는 실루엣의 황제 - 키스 헤링


미술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처음에는 어떻게 왜 그런 형태로 존재했을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 낙서화다. 고대 동굴의 벽화나 이집트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낙서 그래피티(graffiti)가 미술사의 예술작품으로서 등장한 것은 제2차 대전 이후이다. 그 가운데 뛰어난 그러나 불행한 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스키아고 그가 키스 헤링이다. 그래서 팝아트 슈퍼스타, 키스 헤링전의 헤링 사후 20주년 전시는 볼만하다. 실크스크린, 석판화, 에칭, 조각 작품 등 이번 전시에 이름을 올린 150여점의 리스트 중에는 헤링을 대표하는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들 <아이콘> 시리즈와 <무제>이 전시된다.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딩 에서 태어난 헤링은 어린 시절 워싱턴의 미술관에서 앤디워홀의 마릴린 몬로 작품에 빠졌고, 피츠버그 상업미술학교에 들어가 그래픽 미술 보다는 만화 쪽에 흥미를 더 느꼈다. 그러나 키스 헤링은 어린 시절 월트디즈니의 독특한 캐릭터와 TV 만화 영화 등의 대중문화에 빠져든다. 이어 그는 만화캐릭터 등을 테마로 한 드로잉에 관심을 보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피츠버그 아이비상업 예술학교에 입학을 하지만 상업적인 그래픽아티스트를 양성하는 학교 교육에 반기를 들면서 중퇴한다. 마치 피카소처럼. 그는 이후 홀로 작업을 하면서 스무 살 때는 피츠버그 공예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그해 뉴욕 시각예술학교 (School of Visual Arts)에 들어간 헤링은 뉴욕 거리풍경과 지하철 벽면을 캔버스 삼아 사랑과 평화, 공존을 표현했다. 19세 때 첫 전시를 가졌던 그는 꿈을 위해 뉴욕으로 왔고 거기에서 클럽의 음악가와 퍼포먼스 바스키아와 앤디워홀 등을 만나게 된다.

특히 전광판의 글자 예술가 제니홀처의 영향을 받은 그는 예술가의 근본적인 자립정신을 주장했고, 선만으로 이루어진 그래픽 표현의 검은 종이에 흰 분필 낙서그림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탄생과 죽음, 사랑과 성, 전쟁과 평화 등 추상적 개념들을 단순한 메시지로 그렸으며, 특히 회화와 조각을 아우르는 단순화시킨 이미지는 대중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또한 싸이 톰블리, 잭슨 폴록, 장 뒤뷔페가 낙서의 표현법에 흥미를 보였다. 60년대 말 랩 음악과 브레이크댄스를 즐겼던 반항적인 시절 그는 젊은 흑인들과 함께 스프레이 페인트로 뉴욕 브롱크스 벽면과 지하철 벽면에 스피드 한 이미지와 문자로 내질렀고 드디어 기회의 여신은 다가왔다. 도시미관의 골칫거리였던 낙서가 돈이 되어 현대미술로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주목 받은 이가 바로 두말할 것도 없이 바스키아와 키에스 헤링이었다. 그는 미술은 철저하게 대중과의 소통을 원했고 그리하여 지하철 벽면을 화폭 삼아 그림을 그리던 헤링은 경찰에게 잡혀가는 모습마저 사진으로 남길 정도로 유머가 가득한 치기어린 청년 예술가였다. 그림 그리는 과정을 ‘마법’이라 믿으며, 드로잉이야말로 인간과 세계를 포용하는 도구라 믿었던 치기어린 객기로 벽면에 정신없이 휘갈긴 낙서파들의 이 욕설은 뉴욕의 출·퇴근 시민들을 향한 자유로운 통신이었고 메시지이었다. 이들은 인종차별, 핵전쟁에 대한 공포 등의 사회적인 발언들을 거침없이 담아냈고 ‘개인감정의 공공에 대한 적나라한 표출’이었다. 헤링의 <아이콘>은 헤링이 지하철 낙서화로 자주 즐겨 그렸던, 기어 다니는 사람의 실루엣을 담은 작품이다. 당대의 시인 르네 리카르드가 ‘빛나는 아기’라 불렀던 대표적인 그림이다.

후에 이 그림은 헤링의 가장 대표적인 그림으로 알려졌고 로고로 사용되면서 젊음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역시 하나의 아이콘이 된 어깨동무를 한 두 사람 뒤로 하트가 두둥실 떠 있는 이 <무제>의 그림들은 인간 사이의 유대와 우정을 염원한 그의 대표적 스타일로 손꼽혔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가 간결한 윤곽선으로 기어가는 아기 모습을 단순화 했다. 그리고 움직임을 통해 빛을 발산하는 듯한 아기 모습들은 젊은이들의 순수와 자유 등을 이야기한다.
그렇듯 모던한 분위기의 색상도 인상적이다. 헤링에 대한 예술적 가치도 높아졌다. 특히 속도감 있는 간결한 선과 검은 필치, 원색적인 한두 가지 컬러로 강렬한 메시지와 이미지를 형상화한 그의 낙서는 일약 그래픽 디자인을 미술로 끌어 올린 성과를 얻었다. 그는 아이콘 화된 모습의 대명사로 스타가 되었고, 뉴욕의 전설적인 화상 레오 카스텔리 같은 화랑들은 앞 다퉈 그를 초대했다.미국·이탈리아·브라질·독일·프랑스·벨기에 등 전 세계의 벽들이 그를 필요로 했고, 그는 수십 점의 공공조각을 남겼다. 그는 진정으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라 말하고, 사랑을 나눌 경우 반드시 콘돔을 쓸 것을 갖가지 그림 속에서 수없이 강조했다. 사랑과 섹스로 에이즈 퇴치를 위한 안전한 섹스를 강조 했던 헤링, 글씨 그림의 대표적 작품이기도 한 움직임을 표현하는 간결한 선과 남자끼리의 섹스는 절대 안 된다는 자전적인 충격의 메시지가 급격하게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1985년 그는 에이즈에 걸렸다. 꿈을 위해 뉴욕으로와 바스키아와 앤디워홀 등을 만나 낙서를 미술로 그림을 디자인으로 승화시킨 헤링은 그 스타로 떠오른 영광을 누리지도 못하고 비극적 순간을 맞이했다

물론 죽는 그 순간까지도 모든 열정을 에이즈의 위험과 퇴치를 알리는 데 힘썼고, 죽기 전에는 헤링재단을 만들어 에이즈 퇴치와 전위 예술가들을 힘을 보탰다. 키스 헤링은 항상 대중과 소통하며 미술을 통한 행복한 세상을 꿈꿨다. 또한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 애니메이션, 스와치 시계 디자인, 앱 솔루트 보드카 광고 등 그의 작품은 상업미술가로도 대성공이었다. 1986년 헤링은 뉴욕 소호에 팝 숍을 열고 헤링 이미지의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 등을 판매하면서 대중의 변함없는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1990년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인생을 예술, 예술을 인생이라 하며 섹스의 죗값이라고 하는 혹독한 시간을 보내며 예술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아기`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든 이유는 어린 시절에 대한 동경이라고 아기를 기억한 헤링. 영원한 피터 팬을 꿈꾼 스타작가로 어린이를 주제로 한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헤링은 작품에 남기는 서명 대신 아기 이미지를 남겼다. 작품 한쪽 구석에 `키스 헤링`이라는 작가 이름 대신 자신이 동경하는 아기 이미지를 서명한 것이다. '아기가 내 로고나 서명이 된 이유는 인간 존재의 경험이 바로 아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키스 헤링) 그를 우리가 잘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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