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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태 / 내가 쓰는 것이 내 법 (我用我法 )

김종근

내가 쓰는 것이 내 법 (我用我法 )


그의 공식적인 이력은 이렇다. 1932년 대전 출생, 서울대 미대 조소과 졸업, 공주교육대, 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1970년부터 대학교 들어와서 작업 한 50년 정도, 서울대 미대 교수 역임.정년 퇴직 이후 작업에만 전념. 조각 외에도 소묘, 파스텔 그림, 매직마커 그림, 목판화, 먹그림 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꾸준히 해 옴.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서울대 명예교수, 김종영미술관 관장,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활동. 저서로는 <예술가와 역사의식>, <형태를 찾아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다>, <나의 미술, 아름다움을 향한 사색>, <이순의 사색>, <고향 가는 길> 등이 있고, 작품집으로는 <최종태>, <최종태 교회조각>, <최종태: 소묘―1970년대>, <최종태: 파스텔 그림> 등. 이것이 조각가 최종태의 간단한 약력이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중학교 때 까지 붓글씨를 쓰다 그림으로 전향 했다. 서울미대 시절 그는 대학교 다닐 때 우연히 길가에 ‘불교사상 대 강좌’ 라는 붓글씨로 쓴 포스터를 보고 처음에는 불경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하루 세 시간 씩 무려 100일 이나 불경 공부를 했다고 한다. 참 지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탓인지 그에게는 움직이지 않는 깊은 종교적 상념이 보인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너무 종교적인 면이 부각되어 그의 작품을 순수하게 보려 하지 않는 세간의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최종태라는 조각가를 존경한다. 먼저 존경하는 이유를 대라고 하면 주저 없이 그는 작품을 제작하는 것 외에 다른 일체의 명예와 감투에 연연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돈과 명예를 추구하지도 않았고 오로지 작품제작에 전념했다. 작가로서 외도를 안 한 사람도 드물다. 그가 한 외도라고 하는 건 그림 그리고 판화하고 조각하고 글 쓰는 것이었다. 그는 돈이나 명예에 같은 것은 없었다. 그것을 선생은 장욱진이나 김종영 선생한데 배웠다고 했다. 그들은 예술이외에 대하여는 아주 엄격한 분들이었고 그런 돈과 명예 감투 같은 것은 빨리 잘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다른 것을 마다하고 단지 김종영과 장욱진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이유는 순전히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최근 정년퇴직 후 종이 위에 대략 1년에 3-4천장의 드로잉을 그려냈다. 천문학적인 숫자이다. 그 연세에 , 매일 같이 아침 다섯 시쯤 일어나 여섯시 반쯤 신문이 오기 전까지 그린것이라고 했다. 그 중 쓸 만한 것을 골라 200장으로 작품집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이야기 하듯이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다. 오로지 작품만을 위한 진정한 예술가의 삶. 어쩌면 이런 모습이 진정한 최종태의 초상이다. 얼마 전 뉴욕을 갔다 온 후 깊은 생각에 빠져 들은 것 같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던 마티스 전람회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마티스가 갖고 있는 그 무한한 예술의 폭을 마음에 둔 듯 했다. 많은 현대작품들을 보았지만 그들은 마티스에 미치지 못한 듯 했다. 20세기 전반기의 대 예술가들은 역사에 한 덩어리를 하나 만들었다고 했다. 20세기 예술로서의 모뉴망이 피카소와 마티스에 의해 이루어진 듯하다.또한 미술사에 있어서 그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열반이라고 했다. 내 형태가 자유롭게 세계미술사로부터 해방되고 싶다고 했다. 이제 그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그 인간과 예술의 근본이 무엇인가에 대한 절대적인 확실성의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 그의 조각이자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최종태는 회화와 조각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에게 조각은 생명의 형태를 탄생시키는 일로 여기고, 그 생명의 탄생을 위해 구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왔고 그림은 그런 구도를 위한 최선의 도구였다. 그러나 옛날부터 종교는 종교고 예술은 예술이라고 생각 했다.

절대적인 것의 표현 혹은 종교적 감성의 조형적 구현으로 집약할 수 있는 것이 최종태의 예술 세계이다. 그는 마티스, 피카소, 루오, 모딜리아니를 좋아한다고 했다, 조각가로는 알베르트 자코메티도 말이다. 그는 지금 나무 작품을 계속 변형하면서 몬드리안이 가졌던 가로 세로의 추상 조형으로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지금 세계미술사로부터 내가 얼마만큼 자유로워지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모델을 쓰지 않는 드문 작가 중에 하나이다. 모델을 쓰지 않고 조각도 그림도 그려왔고 한번도 모델에 의해서 작업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풍경이나 정물도 그의 작업소재에서는 멀어졌다. 다만 비전만이 자신을 움직이고 있고, 자연과 인생에 대한, 그 근본이 무엇인가에 대한 절대적인 확실성의 세계를 찾아 가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고 작가의 진정한 그림이라고 그것을 신앙처럼 믿고 있다.

그의 인생에는 형태에 대한 탐구와 믿음에 가까운 존경, 조각하는 일 자체가 구도하는 일이라는 그의 작가정신과 창작에 대한 신념으로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만남, 이성과 감성의 만남,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만남이 곧 그의 조형적 이상이자 목표이다. 이렇듯 최종태가 형태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구도하는 마음으로 인간을 표현하는 일, 그것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태의 조형세계이다. 그의 예술 중 가장 본질적인 것은 절대적인 것의 한 부분으로서 종교성이다.

나는 궁금했다, 세속적인 것에 유혹 당하지 않고 , 교수가 그의 발목을 잡지 않은 이유를 그는 한 발은 항상 내놓고 있었다고 했다. “사표를 써놓고 있었어요. 어떨 때는 두 개를 써놓고 있었어요. 하나는 교직사표, 또 하나는 교수직 사퇴. 그래서 큰 미련은 없어요.” 훌륭한 작가로 태어나기 위한 ,한 작가가 만들어지기 위한 고행의 흔적을 나는 그에게서 발견한다. 그렇다 그는 지금 현대 젊은 작가들의 조각을 걱정한다. 지금은 조각이 없어졌다고 했다. 종래 회화나 조각이 개념이 없이 조각은 조각으로서 인류역사 속에서 역할을 해왔는데 별난 세계로 간다고 보았다. 미술이 세상과 소통하면서 유익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요즘 예술은 소통이 없다고 했다.

형태라는 건 가치 있는 것이며 그 가치가 삶 속에서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 마티스 그림에서 용기가 나고 기쁨이 있다는 그는 예술의 최고 목표는 아름다움이라고 믿고 있다. 그건 기쁨이라고 했다. 그는 고백한다. “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 내 마음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을 나는 나의 얼굴에 담으려한다. 그것은 나의 삶 자체일 수 밖에 없다. 삶과 죽음 사이의 그 이름 할 수 없는 빈 공간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한 잎의 풀이파리처럼 나의 그림은 그렇게 존재한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서 아름답고 숭고한 눈빛과 순결한 삶을 보았다면 그것은 온전히 그가 한 잎의 풀이파리처럼 그림이 존재하길 그가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인물조각만 해온 작가 이제 그는 한국인의 얼굴을 찾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중국이나 인도의 불상보다 한국 불상을 보면서 한국인의 얼굴을 본다고 했다. 반가사유상이 갖고 있는 모습에서 석굴암의 불상에서 그는 예술의 영원한 이상향을 발견 한 듯하다 . 그것은 거기서 엄마 같은 큰 품을 느낀다는 것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고민하는 형태인데 반가사유상은 고민에서부터의 해방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미륵상에서는 완성된 인간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고 지상에 있어서 모든 시간적인 것의 속박을 넘어 가장 청정하고 원만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예술의 종착지이다. 조각은 ‘생명의 형태’을 찾는 작업이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단순성·정면성·고요함 등의 예술의 조형 원리가 내재해 있다. 그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면서도 신라·백제의 불상, 특히 반가사유상 속에 들어 있는 불심을 내 예술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외이고 화제가 될 만하다. 그는 열려있는 신앙인이다. 내 종교가 소중하듯이 타인의 종교 또한 소중함을 믿고 인정한다. 길상사에 법정 스님이 하고많은 불교신자의 예술가나 조각가를 마다하고 그에게 불상 조각을 부탁한 것은 최종태가 가진 큰 종교 간의 화합이자 화해이자 포옹이다.

그는 80을 앞둔 작가는 아직도 계속 반성하고 있다고 했다. 조각이 형태로는 얼굴이지만, 내용적으론 인간의 문제를 다루면서 추구하는 것은 정신성을 담고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체를 형태의 문제로만 이해하고 보았다면 추상 조각 쪽으로 빠져 나갔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마티스전을 보고난 후 그는 손이라는 형상만 해도, 나는 손동작 하나하나가 생명·정신을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직품할 때 손 처리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불상에서 손은 분명한 의미가 있지만 인간이 취하는 자연스런 자세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옷을 벗은 사람, 누워있는 사람의 형상을 작품으로 만들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조각가로서는 참 드문 일이다. 인간이라면 옷을 벗는다는 게 부담스럽다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릴 때 고향에서 본 추수밭·계룡산·황혼 등 지금도 내 머리 속에 살아 있는 풍경들이 아닌가 싶다는 작가.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그려지는 한줄기 수평선을 바라볼 때 무한과 영원에 대한 일깨움이 있다는 나이가 들수록 그것에 대한 그리움이 많다는 작가. 최근 그는 부쩍 추사 김정희의 작품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 이렇게 썼다.

入於有法 出於無法 我用我法 들어갈 때는 법이 있으나 나갈 때는 법이 없고 결국에는 내 자신의 생각이 바로 자신의 법이 된다는 말, 작가는 이제 예술에 관한 진리를 터득했음이 분명했다.
문밖을 나서며 사모님의 정성 어린 접대가 그의 작업실에서 본 여인의 인물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소박하고 단아한 여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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