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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서 / 야성과 감정의 언어 드러내기

김종근

한 때 예술가들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비합리적 감정이나 의식, 환상을 새로운 표현 기법을 통해 현실을 초월하려 애썼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경험의 한계와 경계를 넘어서려 노력하였으며 현실을 본능적이고 잠재적인 꿈의 경험과 결합시켜서 논리적이며 실재하는 현실,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대시켜 초월적인 세계에 도달하려 했다. 바로 '색다른 낯설음' 에 대한 미술형식이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미술 흐름을 묶어 초현실주의라고 불렀다.

이재서의 작품은 명백하게 표현과 의식적인 면에서 그러한 초월적인 현실에 도달하려는 미술 양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의 익숙한 사물들을 붙이기 보다는 낯선 오브제들을 결합시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는 접근방식과 의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소 거리감을 가진 방향에도 불구하고 이재서의 작품세계를 그러한 측면에서 이해하는 배경에는 그의 작품 속에 다양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오브제와 재료, 그리고 기법들을 간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용하는 오브제들은 화면의 특정 공간을 거칠게 파내 오브제를 넣거나 조합함으로 화면에 존재감을 제시한다. 때로는 헌 고책들을 꿰어 강렬하게 장치시키는가 하면 또 한편 그들은 많은 한지와 닥껍질로 콜라주와 몽타주 기법들로 특별한 관련이 없는 사물들과 엉켜있는 한지의 모습들로 난해함과 당혹스러운 이미지를 도출해 낸다. 그의 작품에 배경은 그래서 많은 스토리가 내재된 양상으로 관심 있게 볼 것을 요구한다. 부분적으로 고구려 시대의 고분벽화를 연상 시키듯이 낡고 오래된 분위기의 동굴 벽화처럼 벽면이 연출 된다. 바탕의 그 재료들은 한지로 혹은 닥 껍질로 톱밥으로 천연염색에 물들여져 마침내는 반복적으로 무수한 시간성을 억누른 감정으로 덧칠해져 있다. 그래서 화면은 전시장에 동굴벽화를 옮겨 놓고 싶어하는 과거의 흔적과 상처들을 여과없아 화폭에 표출시키려는 감정의 야성을 그대로 엿보게 한다. 그 벽면에 다양한 형상 속에 무형의 이미지와 사람의 이미지는 거의 감추어지거나 축소되어 거의 형체를 해독할 수가 없다. 최근 3-4년 전부터 그는 이전의 전통적인 구상 스타일의 작업에 뛰어난 감각과 형식을 서서히 버리고 추상성이 강한 메시지 작업으로 옮겨왔다. 그러면서 동시에 화면을 구성하는 형식에도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브제의 인용과 잡다한 사물들을 화면 속에 결부시키는 것이다. 못 쓰게 버려둔 물건들, 티벳 같은데서 가져온 고책들의 인용은 그러한 대표적인 역할들이다. 지나치게 내밀한 언어의 과정으로 인해 작가가 찾고자 했던 시간성과 우연성의 사물들은 우리가 자연에 놓인 그대로처럼 무의식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물론 그 작은 폐품 같은 오브제들은 단순히 사물에 그치기보다는 자연적인 의미를 지닌 혹은 버려진 것들에 대한 작가의 의도가 가미된 카타르시스를 표현해 낸 것이겠지만 일상화되고 관념화 되어 있어 보인다. 즉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이나 결합 보다는 한지로 재구성 된 순수한 조형 요소를 사용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거칠게 표현한 느낌이다. 그러기에 지금 그의 작품속에 추상 언어는 특정한 부분을 재현하는 대상이 없는 이재서 자신의 독백적인 감정의 언어로 이해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어디서 어떤 경향의 작품을 깊은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작가자신의 내밀한 경험에서 추출된 우울한 기억이나 감성에 가깝다고 해석된다.

그가 반짝이는 많은 재료를 거부하고 천연적인 혹은 복고적이며 침잠된 색채를 화면가득 반복적으로 거친 감성으로 만들어내는 곳에서 우리는 그가 다듬어진 이미지 보다는 야생적인 그대로의 본성을 강렬한 어투로 사용하는 것에서 본연의 목적을 보게 된다. 작가는 그러한 결정적인 계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희말라야의 안나푸르나 등정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이러한 형식으로 유추해 볼 때 작가는 아름답고 탐미적인 형식에 젖어들기 보다는 진실한 감정의 언어 전달과 표현에 충실한 형식을 선택한 것으로 인지된다.

어쩌면 작가의 순수한 감정의 전달이나 표현이 더 미술의 본질을 드러내는 적합한 언어가 되고 있는것이다. 즉 작가는 자연적인 감성의 목소리를 그대로 화면에 노출시키고자 원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순수한 작가의 느낌과 에스프리를 그대로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작가만의 고유한 형식으로 존중 될 수 있다. 아직 나는 그의 작품들에서 해독 되지 않는 아니 해독의 필요성이 난해한 것을 보게 된다. 작가는 그것들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회화작품은 단지 작가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감정을 담은 하나의 기호와 표식들로 대체 된 언어들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에서는 미적 감성보다 관념들이 화면을 감싸고 그것들이 작가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하고 있다. 나는 그러한 메시지 우선 보다는 보편 가능한 개인의 주관적 정서와 개성을 공통의 언어로 드러내는 것을 조심스럽게 제안 해 본다. 자칫 그것이 그의 본질적인 야성을 해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쩌면 모든 그림의 패턴들이 지나치게 감각적이고 장식적인 경향에 그의 그림이 인간의 감추어진 야성과 본질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충실한 미술의 언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의 그림 앞에서 매우 이성적이며 힘들기보다 그의 진실한 마음에 다가가 공명하며 근본적인 인간의 언어에 공감하는 넓이와 폭을 지닌 매개체가 된다면 이 또한 진정한 회화의 아름다운 형식이며 존재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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