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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Now 권영호, 아직은 서울에 낯선 작가

김종근

artist Now


바닷가 나무로 만든 물고기를 그리다.

권영호, 아직은 서울에 낯선 작가 .
1936년 그는 포항어귀의 산자락을 끼고 앉은 경상북도 월성군 강동면에서 전형적인 시골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뜰이나 토담집을 보면서 성장했고 포항의 수산고등학교를 졸업 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어린 고등학교 시절의 꿈은 마도로스 , 환경정리를 해 놓은 교실에 들어오신 지리선생이 '넌 화가가 될 수 있는 소질이 있다'고 칭찬했으나 그는 선생님께 항의를 했다. 마도로스가 되고 싶어 하는 그에게 가만히 앉아서 그림 그리는 환쟁이가 되라고 하느냐고 말이다.
포항의 영일만 앞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를 주름잡는 제왕이 되겠다는 어린 소년의 원대한 바다소년의 꿈을 몰라주었던 선생님이 야속해 했다.

그러나 지리선생의 말은 옳았다. 그는 결국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연극반에서 유치진 원작「처녀별」공연준비를 위해 3막 2장으로 된 연극세트를 혼자서 죄다 만들었는데 트럭에 한차 가득했다. 또 이 연극에서 간신 배인 글방선생 역을 맡아 관객들로부터 '때려 죽여라'는 빗발 같은 항의까지 받았다. 이때 그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연기력이 좋았냐고 입이 저절로 벌어져 문득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대성공으로 기록된 「처녀별」은 경북 구룡포 영덕 강구 일대를 휩쓸고 다녔던 것이다. 당연히 대학은 연극영화과. 보리죽도 겨우 끓여먹던 집안 형편에 꿈도 못 꿀 대학이었지만 그의 의지로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 연출전공 갑류장학생으로 당당히 입학했다.
물론 그의 재주는 그 자신이 술회 하듯이 생각해보니까 아무런 후회는 없지만 소질은 연극 쪽이 월등했다고 한다 . 그는 1주일간의 학과수업을 끝낸 후 제2의 예술을 미술로 택해 전과해 버렸다. '. 연극은 마음만 먹으면 신들린 사람처럼 해낼 수 있지만 그림은 완전한 노력의 결실입니다.' 언제나 작품 속에 드러나는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배가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고 그는 회고 한다.

물론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데에는 참으로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교실 뒷벽에 미술시간이 끝나면 항상 그림을 붙였는데 그의 그림은 언제나 4번째 정도 걸리게 되어 사실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림 그리는 시간이 너무 좋아 항상 무엇이든지 열심히 그렸으니 미술 교과서에 나와 있던 카네이션은 항상 그의 흥미를 유발시켰다. 그냥 좋아했지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오히려 거친 뱃사람이나 정치에 뛰어들고 싶어 했던 야심에 찬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림의 문턱에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이 말은 그가 가슴에 늘 품고 다니는 말이다. 그런 작가의 작품세계는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볼수 있다. 초기는 습작기를 지나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성격을 보여주는 시기로 1960년에서 1982년 까지이다.( 엄밀하게는1958년부터) 1960년의 작품 '좌상'으로 붙여진 그림은 젊은 화가가 붓통을 앞에다 두고 그림을 그리다 벤치에 앉아 휴식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기법상으로 보면 전형적인 당시에 흔하게 보이는 인상파 화풍으로 다소 거칠게 묘사 되어 있다.

특히 우리가 여기서 주목 할 만한 것은 그가 가장 존경하고 따르던 서라벌 예대 시절의 張利錫 선생님이 그린 노인 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는 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 자신의 예술세계가 단단해지도록 정신적 후원자가 되어 준 스승을 주저하지 않고 장리석 선생을 꼽는 것에서 그의 영향이 어떠 했는가를 볼 수 있다.
그 때 그의 작품들은 '정물'이라든가 ' 꽃병등에서 보여 지듯이 <마부의 휴식>(1964)이나 <광어를 든 어부 >(1966) <내와 외> (1968)등 그가 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주제는 바닷가에서 쉽게 만나는 것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는 이처럼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바닷가 풍경으로 일관 되고 있다. 물론 소년시절의 그의 꿈에 대한 짙은 향수의 예술적 발현일 것이다. 1972년 그의 화첩에는 갓을 쓰고 검은 안경을 쓴, 의외의 초상화 한점을 발견 할 수 있다.

다름 아닌 부친의 초상화 이다. 그는 전람회에서 입상한 그림들을 그의 부친에게 보여주려 했지만 그의 부친이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가슴 아파했고 질감이나 마티에르라도 그의 그림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려 했다. 해서 그는 언제나 다른 아이들 보다 더 바르게 그리고 성실하게 살으려고 노력했다.
뿐만아니라 그림보다는 눈으로 보지 않고 아버지가 들을 수 있는 소리꾼이 되기를 희망 했던 떄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1970년에 제작한 <기원> 같은 작품에서 다소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표현법을 넘어서는 드문 작품이 있기는 하지만 바닷가 사람들의 생활상 즉 어시장 , 어부, 어촌, 어촌풍경 등이 일관되게 그의 작품의 모티브로 사용되었다. 그러고 보면 초기 그의 세계는 그의 유년시절의 세계가 작품속에 온전히 들어있는 시기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이 시기를 예술의 도입기라고 부른다.

그에게 있어 옛날에 대한 그리움의 흔적은 언제나 작품속에서 한결같이 이어진다. 길게 늘어진 언덕은 엄마를 기다리는 한 소년의 외로움, 두려움이 배어있는 듯하다.
어부의 애환, 흙담, 장독대, 토속적인 집, 방안에서 바라본 門 작업에 이어 최근 작품에는 불교적인 내세관에 흠뻑 젖어있다. '젊은 날의 방황에서 벗어나 이제는 안정된 분위기입니다. 보다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죠. 표현재료로서는 유화물감, 나이프 등을 사용하지만 서양화가로 불리기 싫다.'는 그는 '한국인만의 정신이 깃들여 있으면 한국화라고 해야한다.'
'흙담과 토담만이 우리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이다. 근본적으로는 한국인의 정신속에 불교적 샤머니즘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이와같은 진술로 보아 그의 작품은 향토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미의식을 크게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큰 연꽃의 연잎 하나가 화면 전체를 지배하기도 하며 낮달을 공중에 띄우면서 한국화의 특성인 여백미를 유감없이 드런낸다. 「농가」「뜰」「양지들」 그리고 방의 창문에서 연꽃 그리고 목어까지 초기의 작품에서 부터 그는 우리가 몸으로 겪어왔던 6-70년대의 향토적인 시골의 마당 모습, 초가지붕, 창문의 고풍스러운 맛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회화적 모티브는 거의 10여년간 외형적으로는 변화를 주지만 기본적인 세계관에는 일관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이면에는 아마도 다음 두가지가 결정적으로 기인했을 것이다. 하나는 '언제나 나는 촌놈이다. 내가 태어나고, 보고 내곁에 잇는 것이 이것들인데 내가 어떻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느냐'는 고백처럼 이 모든 풍경들이 자신의 체험적인 모습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작가의 시골 오후의 넉넉한 풍경은 사실 가장 그분다운 여유와 표정이다. 잔치가 끝난 시골 초가집의 한가로운 정경. 모든 들일을 나가고 비어있는 오후의 고즈넉한 마당의 풍경. 그것은 곧 작가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자 우리들의 고향이다.


바닷가 그 정신적 고향의 황색기

그 이후 그는 늦은 중기라고 볼 수 있는 소위 황색기에 접어든다. 황색기는 그의 작품에 황색이 가장 풍부하면서 풍요롭게 등장하는 시기이다. 즉 마당이라든가 토담의 배경을 이루는 요소가 이러한 것은 대부분 뜨거운 뙤약볕에 놓여 있는 물고기,감자 , 고추가 널려 있는 풍경들이다. 비록 이러한 풍경이나 정취는 단순한 시골 마당의 토벽이 있는 풍경을 넘어선 어린 시절 그의 한없는 소년기의 기다림을 반영한다.

<양지> < 건어 >등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인상파 화가들이 주장 했던 것처럼 강렬한 빛과 그림자의 대조가 토벽에 적절하게 묘사 되어 있다. 그려진 구도 또한 위에서 내려다 본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 즈음에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특징적인 오브제에 주목 해 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서 흔하게 발견되는 마른 고기의 모습과 목탁이다. 1980년도에 제작된 <뜰>에서 보여지는 입 벌린 두마리의 말린 물고기의 모습 이다. 여기서 이 고기들이 상징하거나 명백하게 어떤 메세지로 읽혀지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호소력의 의미를 보여준다. 특히 고기와 목탁이 함께 놓여 있는 것들은 예사스러운 풍경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고기는 木魚와 연결 된다는 것이며 , 목탁은 그의 작품속에 보여지는 불교적인 세계에의 탐닉을 예고 한다는 것이다.

1980년 그는 창호지 문에 비친 손가락 장난의 동물 <그림자> 를 그리고, 1983년에 담백한 <문> 시리즈로 접어 든다. 사실상 문은 안과 밖을 구분 짓는 하나의 경계이다. 그는 이런 실내의 풍경을 고집스럽게 그려냈다. 그의 이런 창문은 자연스럽게 절의 창문으로 옮아간다. 아마도 그것은 유아기로의 회귀본능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1986년 연이어 그는 불교적 색채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四不相>의 절에서 보이는 해태상이 모아지면서 그는 그가지켜왔던 구상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표현은 사실적인 방법을 보이되 구성은 초현실적인 기법을 가미한 구상세계를 변화를 보여준다. 또 같은해 <목어의 분노>라는 1980년에 그렸던 동일한 유형의 형식을 빌린 초현실적인 기법으로 일단의 분노의 감정을 드러 낸다.

그 구체적인 분노의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작가가 전혀 감정을 지닐 수 없는 木魚를 통해 작가의 감정이입을 시도 한것으로 보인다. 목어 ! 중생을 구제한다는 木魚가 아닌가이제는그것이 그의 화면에 거침없이 등장한다.

초현실적인 세계와함께 이 쉬르레알리즘의 세계는 <여명> 이라는 작품에서 꿩과 창문을 일체화 시킨다든가 붓꽃을 전면에 배치하는 일련의 방법에서 변화를 시도하낟. 그는 목어를 직접적으로 그리게 된 데에는 옥천사의 절에서 본 목어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그는 한번 심하게 아프고 난후 그의 색채는 더욱 흰색이 화면에 으뜸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90년도를 전후하여 바다의 풍어제를 테마로 한 그림에서 그는 목어와 연꽃이 함께 하는 형태를 발표한다. 이 때부터 그의 화면에는 연꽃과 목어등이 하나가 되고 이 작품들은 그 주제의 선택이나 표현 그리고 구성에 있어서나 조선시대 민화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구성에 있어서 1994년을 전후해서는 연꽃과 절의 탑을 조합시킨 작품들을 그 스스로 불교신자를 자처하지 않고 있으며 불교적인 세계를 담아낸다. 그러나 병원에 있을 때나, 작업을 할 때 본능적으로 회심곡이나 천수경을 들으면서 그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다. 그래서인지 이 때를 전후해서 그의 작품들에서 조용하고 감정이 절제된 그림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회색기로 접어들 즈음 솟대 그리고 목어들이 이제는 절의 풍경에서만 나타나다 연꽃과 같이 화면의 하단에 가까운 하나의 이미지 즉 외곽선으로 고기의 형상만 나타나는 기법도 이 때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의 화면은 여전히 사실적인 기법과 연꽃의 벽에 새겨진 불상의 형상들이 인용되지만 그 원형은 조선 민화에서 의 영향을 보이고 있다.
( 그는 1995년 <동반> 이라는 작품을 발표 하는데 이 작품은 까치와 까마귀가 같이 비상하는 모습을 형상화 하고 있는데 서로의 화해와 상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가 매우 목가적이면서 불교적인 모티브들을 작품속에 끌어들이는 것을 단정적으로 보게 된다. 연잎과 연꽃을 화면 전체에 지배적으로 배치하고 거기에 80년대 즐겨 그리던 시골의 창호지 문을 중첩시킨다.

그러는가 하면 낮달을 공중에 띄우기도 하고 꽃의 그림자(실루엣)을 은근하게 넣기도 한다. 그것들은 거의 정적으로 아주 정갈하게 놓여 있어 숭고한 감정을 일으키고 있다.
한편 풍경화에서는 멀리 집이 있는 솟대가 하늘로 치올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적인 의미를 끌어들이며 작품상의 소재로 주로 등장하는 목어, 문짝, 조롱박이 소박하게 놓여져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은 언제나 그의 화면에서 더욱 안정감 있는 색채로 원숙미와 세련미를 더하고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동을 모으고 있다.


보다 깊은 상생의 회유 세계 - 회색기

1990년중반 들어 그는 그의 작품세계를 더 이상 확대하기보다는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물고기 들의 표현에 천착한다. 그 물고기들은 주로 연잎과 함께 단순화 되어 있거나 마치 탁본처럼 외형의 선들로 간략하게 묘사 된다. 그 물고기의 자태는 점점 서로 입 맟추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묘사 되거나 상징적 형태나 기호처럼 드러나기도 한다. 여전히 그와 함께 나타나는 연꽃과 흰 창문은 그의 예술적 세계를 집약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9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그가 오랜동안 탐색하고 추구해 왔던 회화세계에 가장 큰 전환점을 보여주는 시기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의 대작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물고기들의 다양한 세계를 <回遊> 라는 연작 시리즈로 수십점의 대작을 완성 하는 그의 작업시기로 보아 분수령을 이루는 때가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가 여기서 흥미있는 부분은 바닷속 물고기들이 어떻게 묘사되고 물고기들이 때에 따라서는 하나의 살아 있는 물고기로 , 때에 따라서는 살아 있는 목어로 다양하게 표출 된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그 물고기들은 집단으로 또는 남북으로 이리저리 쏠리며 마침내 하나가 되는 물고기 들의 거대한 이동과 만남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그가 진정 꿈 꿔 왔던 바로 그 세계로 여전히 그는 인간이 갖는 회귀본능의 세계속에서 그의 예술혼을 불 태우고 있다 .

'새벽부터 화필을 들고 작업에 임하죠. 하루종일 캔버스와 대화하는 시간이 내 생활 중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캔버스 속의 조물주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즐거움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그의 예술세계에 너무 무심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앙화단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

그의 작업은 89년 11월 일본 北海島에서 열린 木友會교류 전에 성난 木魚가 병든 바다를 포효하는 작품을 출품,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잘 나타냈다는 일본 매스컴의 격찬이 이를 증명하듯이 그는 독창적인 세계를 열어보이고 있다.
그 점에서 어떻게 보면 평생 자신의 이웃에 한번도 눈을 떼지 않고 독자적인 자신의 세계를 일궈냈던 박수근의 예술세계를 상기시킨다. '이것이 이웃의 사람들의 모습인데 왜 사람들은 자꾸 나에게 다른 것을 그리라고 하는가'하고 나지막히 이야기 하던 말들을.

무엇보다 그의 작품에서 감동적인 부분은 수십마리의 나무로 만든 木魚를 우리는 빠트릴 수 가 없다. 佛家에서는 목어를 사악한 것을 막아주는 수호적인 상징이라고 하였다.
그 모든 木魚를 정년을 앞 둔 작가의 작업으로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나무로 깎아 만든 목어와 대작들을 우리는 볼 것이다. 그 엄청난 물고기들이 전시장에서 만날 것을 상상하면 한 예술가의 초상이 어떻게 자리 매겨져야 할 것인가를 겸허하게 그의 작품 앞에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는 그가 그토록 도달 하고 싶었던 세계에 이미 도달하였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모자를 쓰고 마도로스가 되어 파도를 가로 지르며 누비고 싶었던 그 푸른 바다의 세계에 비로소 이제야 돌아와 그 곳 바닷속 물고기가 되어 .回遊! 이제 그는 돌아와 즐기고 있다.

마산 진동의 작은 바닷가 , 경치 좋고 뱃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옥계의 바닷가 바로 그가 그리워했던, 일생을 내던지고 싶었던 바다를 눈앞에 두고 대작들과 싸우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의 작품세계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그분이 살아온 발걸음과 빗나감 없이 잘 짜여진 연극무대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 그가 태어나 꿈을 키웠던 바닷가, 거기서 만난 물고기, 그리고 나무로 만든 목어와 연꽃의 만남 . 그 목어를 통한 상생의 세계. 하나의 많은 작품들은 연꽃의 순수하면서 숭고한 의미와 목어, 솟대의 수호적 믿음들이 고향의 풍경에서 출발하여 서로가 용서하고 화해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相生의 거침없는 불교의 세계로 나아온 바다 속의 물고기들.

비록 외관상 작품의 작은 변화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고향의 애정에서 부터 시작하여 그곳으로 돌아가는 회유에의 긴 여정이자 이행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색채에의 원숙한 안정감. 화면을 감싸는 품격과 ,구성과 불교적 세계를 풍기는 관조에의 천착, 이것은 그의 세계가 점점 확산된 세계를 획득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 되어야 할 것이다.
깊은 바닷속을 무리지어 다니는 물고기 모습 .진정 작가는 한 시대를 예술가로 살아온 진지한 환쟁이였다.
원숙한 필치로 점점 흰 색깔로 자연을 아우르는 초현실적인 구성, 무엇보다 고루하거나 천박하지 않고 ,단순하면서 격조 있는 화폭 속에 담고 있는 순결한 의미의 대상들이 세속적이지 않아 우리 화단에서 진정한 예술가의 초상으로 오래 기록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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