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천경자 / 찬란한 그러나 슬픈 화가

김종근

“화가 천경자는 /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 할 수도 없다.
..............
어딘지 나른해 보지만 / 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 /
그의 언어를 / 시적이라 한다면 /속된 표현 /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 / 들쑥날쑥 /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세월의 찬바람은 / 더욱 매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 / 시름은 담배에 있고 /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 그러나 /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일찍이 그의 오랜 친구였던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의 <천경자> 라는 시 일부이다. 그렇다. 시처럼 그는 원색처럼 화려하게 그러나 쓸쓸하게 인생과 예술을 짊어진 숙명적인 예술가의 모습이다. 그러나 “좀 고약한 예술가”라는 그의 시구는 수정 되어야 한다. “그는 가장 예술가다운 예술가라고” 말이다.

천경자의 예술을 기억하고 회상한다는 것은 내게 비장한 아픔과 추억을 같이한다. 80년대 중반 나는 직장이 선생님 댁과 지척에 있어 가까웠다. 종종 커피를 마시기도 했고 식사를 하기도 했다. 뵐 때 마다 선생님은 언제나 너무나 당당하고 단호했던 예술가 이었다. 그림 그리는 시간을 빼면 백화점 커피숍에서 놀러 오거나 캔 맥주를 홀짝이면서 책도 읽고 비디오도 보시는 것을 즐겨한 선생님은 미스터리한 책이나 비디오를 좋아했다. 선생님의 말로는 미스터리를 보면서 혼자 사는 법을 배우고 위기를 피해는 법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사실 언제나 외로웠다. 그래서 종종 외로움도 기막힌 경지에 이를 때가 있다고 했다. 많은 에세이집을 내면서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애틋하고 고독과 슬픔이 묻어나는 것을 더 좋아한 천경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그 날 저녁. 압구정동 아파트에서 나는 보았다. 어쩌면 영원히 있지 못 할 안타까운 순간들이 있었다. 가짜그림이라고 지목한 “미인도”란 포스터를 앞에 두고 분노하며 억울해 하던 그의 눈빛이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그런 슬픔과 비극의 씨앗을 그토록 오랫동안 안겨다 줄줄은 아무도 몰랐다.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없어요.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절대 머리 결을 새카맣게 개 칠하듯 그리지 않아요. 머리 위의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는 달라요. 작품 사인과 표시 연도도 내 것이 아니에요.”당시 68세의 그녀는 세상과 화단을 향해 애타게 토로하고 호소했다.

자기가 낳지도 않은 자식을 남들이 당신 자식이라고 윽박지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며 그는 그림을 덮어둔 채 꽤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술만 마시면서 괴로워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1991년 4월 7일, 결국 절필을 선언했다. “붓을 들기 두렵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그녀는 그렇게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고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예술원에는 회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고 따라 거주하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는 지난 1998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림 〈생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꽃무리 속의 여인> 등 자신의 대표작 57점과 드로잉 36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을 결심했다. 저작권 및 화구(畵具) 들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지 않고 서울 시립에 기증한 이유도 그 문제의 그림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큰딸이 살고 있는 뉴욕으로 훌쩍 떠났다. 그녀는 내가 만난 예술가중 가장 자존심이 센 성깔 있는 예술가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는 화가였다. 무엇보다 그는 그림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생각했고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그림을 팔 때마다 꼭 자식을 팔아먹는 부모의 심정이라며 그림을 쉽게 넘겨주지 않으려 해 화상들과 실갱이를 하기도 했고 그런 모습을 볼 때 마다 보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런 이유로 나에게는 꼭 그림을 한 점주겠다고 한 약속도 그래서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에 내가 프랑스로 가고 선생님이 힘들어 할 때 그의 편에 있어준 문화부 기자에게 엽서로 감사함을 전할 정도로 선생님은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 대한 애착은 심했다. 어떤 경우는 그림을 팔았다가 그 그림 때문에 밤새 한잠도 못 잤다며 돌려주기를 부탁 할 정도로 그는 자신의 그림을 목숨처럼 아꼈다. 인기 작가였던 그가 돈 모으길 원했다면 그 누구보다 많은 물질과 사치를 부리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결코 돈으로 바꾸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게 사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을 만큼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켜왔다. 그럴만한 작업복이나 홈드레스 없이 후들후들한 셔츠 차림으로 그는 십 수 년을 그렇게 작업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웃묵에 짜놓은 걸레가 얼어붙는 좁고 추운 셋방에서조차 결코 화필을 놓은 적이 없다는 딸 김정희의 이야기는 천경자가 얼마나 지독하게 타고난 숙명적인 화가인가를 말해준다. 그와 가끔 교류가 있었던 화상 이모씨는 우리나라 원로 화가 중에 자가용 없이 택시 타고 볼 일 보러 다니는 사람은 천선생님 한 분밖에 보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가 가장 친했던 사람들은 만화가 고바우 김성환 그리고 동료화가 권옥연 , 소설가 박경리 ,한말숙선생님들을 가까이 했다. 그 외에 그는 평생을 고독과 고통으로 그림이란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운명적으로 환쟁이로 타고났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목숨도 없었을 것이라 했고 , 화가가 되었기에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물론 천경자도 처음부터 화가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동경했던 것은 연극배우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키가 너무 커서 학예회의 <리어왕>에 주연은커녕 극중 문지기로 뽑혀 대사도 없이 몽둥이만 들고 연습했던 것을 그는 한동안 서러워했다. 그토록 아꼈던 주옥같은 그림들을 시림미술관에 막상 기증하고 나니 내 인생을 모두 떼어준 것 같아 가슴이 텅비고 서운하고 눈물이 많이 났다고 안스러워하던 천경자 화백.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내 그림에 나오는 모델들과 대화도 하고 사랑도 나누니까 하루가 지루하지 않아요.”
모두가 그렇게 그린 그림들이었다.

천경자(千鏡子) , 아니 원래 그의 본명은 천옥자이다. 그는 1924년 전남 고흥 아름다운 시골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주로 외할아버지 아래에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그림에 특별한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읽어주는 소설에 슬픈 대목이 나오면 무릎을 베고 있다가도 엉엉 소리 내어 울 정도로 감수성 또한 유난히 남달랐다고 한다. 일곱 살 때 그녀는 집이 가난하여 소록도 나병원 간호부가 되어 동생들 공부를 돌봐주던 “순결한 눈망울, 뾰로통한 처녀 특유의 표정이 매혹적”인 “길례언니” 를 만났다.

이 후 그녀는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여인처럼 불리지만 사실 길례언니는 어린 시절 어느 여름의 축제날 노란 원피스에 하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여인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아 그녀가 붙여본 이름이다. 길례는 그녀의 회상 속에서 아름답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영원한 처녀일 뿐이다. 이후 그는 광주로 유학하여 광주공립여자 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의대에 진학하라는 부친의 권고를 뿌리치고 16살, 1940년 일본의 동경여자 미술대학에 유학했다. 이미 거기에는 나중에 운보 김기창의 부인인 우향 박래현이 먼저 유학 와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鏡子”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당시 인상주의 이후 입체파와 야수파가 화단을 풍미하던 일본화단에서 섬세하고 고운 채색화의 여성적인 일본화와 화풍에 더 매료당했다.

스무 살 되던 해 그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첫 남편을 만났다. 귀국선 표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도와주었던 친절한 남자. 그러나 그의 결혼 생활은 그 다음의 결혼도 길지도 순탄하지도 못했다. 이렇듯 그의 인생은 험난했고 곡절 있는 인생이었다. 20대의 힘겨운 언제나 손해 보는 사랑 , 그리고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과 아끼던 동생의 죽음. 그러한 삶의 시련들은 사실 모두 그림으로 나타났다. 1951년에 그린“생태”는 35마리의 독사가 한데 엉켜 우글거리는 뱀 그림은 그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에 그린 그림으로 인생과 예술의 한 껍질을 깨뜨렸다고 했다. 그는 “나는 무섭고 징그러워 뱀을 참 싫어한다. 그러나 가난, 동생의 죽음, 불안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뱀을 그렸다. 징그러워 몸서리치며 뱀집 앞에서 스케치를 했고, 그러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자신의 천형 같은 화가의 운명을 고백했다. 이러한 그의 자전적인 고백이 말 해주듯이 이 그림은 한때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으나‘도저히 견딜 수 없어’1년 만에 다시 찾아올 정도로 그는 자신의 그림에는 지나칠 정도로 애착이 있었다.‘생태’의 뱀 35마리는 그의 나이 35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려하고 원색적인 색채로 피기 시작한 꽃과 여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화폭에 여인들은 젊은 시절의 자화상도 있고, 딸을 모델로 한 작품, 혹은 남태평양의 타히티를 비롯한 여행에서 만난 여인들이 모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우수에 젖은 모습으로 화면에 나타난다. 1969년 미국ㆍ유럽ㆍ남태평양의 타이티 여행은 그에게 강렬한 원시의 숨결과 세계 풍물의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다. 칠순을 갓 넘긴 천경자는 타히티로 10여일간의 스케치여행을 다녀와서는 여인 10명에 풍경 하나-. 그는 거실바닥에 이들 「여인」스케치들을 쭉 세워놓고, 새벽 5시쯤 일어나 『오늘은 너』라고 한 점을 골라잡으면 오전 내내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일과 이었다.

이런 여행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박물관의 중세 그림들에서 그는 거대한 규모의 크기, 그림의 소재, 정확한 데생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선생님은 1974년 18년 재직하던 홍대 교수직을 미련 없이 버리고 6개월동안 세계 일주와 스케치 여행을 떠난다. 인도네시아의 발리, 케냐, 우간다, 이집트 등 오지를 여행하면서 만나는 때 묻지 않은 원시적인 풍물과 미개척지의 천국의 모습들이 화려하게 발표되었다. 그의 작품을 논할 때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 있는데 1977 년 화가가 자신의 생을 뒤돌아보며 그렸다는‘내 기억의 슬픈 22페이지’가 그것이다.

뱀 네 마리를 머리에 얹은 여인의 초상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야말로 텅 빈 듯 우수에 찬 눈망울. 삶의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듯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는 “내 고독을 스스로 위안해 주려는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평온하지 못했던 삶의 자락들이 환기되는 그림” 이라고 진술했다. 그의 그림에는 한결같이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꿈과 추억과 회한을 가득 머금은 그윽한 눈빛들로 그득하다. 그리고 그 눈망울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의 그림자가 드려져 있다. 그녀의 여인들 속엔 젊은 시절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 딸을 모델로 한 작품, 타이티의 여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모든 여자가 다 저로서는 영원한 여인으로 생각하고 작품 할 때 그렸다고 했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이 나도 모르게 다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그림이 스스로 인생역정의 산 기록이라고 말하길 즐겨하는 그는 1995년 호암 갤러리에서 가진 자신의 회고전을 “꿈과 정한의 세계”라고 불렀을 만큼 그의 거칠고 험난했던 삶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럴수록 그는 꽃과 여인에 열정과 애착을 보였다. 화려한 치장의 여인, 원색의 강렬한 꽃다발. 스스로 그림 속의 여자가 꽃을 머리에 얹은 것은 한(恨)이 많아서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 그의 그림 속에 여인들은 아름답고 현란한 색채로 뒤덮여 있지만 애틋하다 못해 애처롭기 까지 하다. 눈 화장과 분칠에 담백하거나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것은 슬픔을 넘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다. 강인함 뒤에 숨은 고뇌와 번민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그의 한(恨)은 척박한 한 시대에 상처를 안고 일생을 살아온 천경자의 그림 그 자체라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이미자의 <황혼의 블루스>와 <첫눈 내리는 거리> 그리고 김소희의 판소리를 이어서 듣고 있다. 왜냐고? 묻는다면. “이런 노래를 들으면서 흠뻑 울고 나면 어떤 아픔도 다 풀리고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투지가 솟아나는데.....”. 이제는 멀리 타국땅 뉴욕에서 병상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의 슬픔을 아무래도 함께 할 수 없어 애틋하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