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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근 / 상처의 상징으로서 자작나무

김종근

현재 교수로서 또 의사로서 활동하고 있는 오기근 작가의 자작나무 시리즈는 우리들을 매우 가슴 아픈 비장미를 지닌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누구든 그녀가 촘촘히 화폭에 옮겨 놓은 그 자작나무의 형상과 온화하면서 화면 가득 넘치는 나무들의 숨소리를 마주할 때면 거부 할 수 없는 애틋한 슬픔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수년간 다듬으며 만들어 놓은 자작나무 풍경 속에는 나무가 갖는 한없는 감정 이입과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대한 인연을 생각하게 한다.

오기근 교수의 작품들은 유감스럽게도 아름다운 상처에 대한 그녀 자신의 기억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 모티브는 남을 위해 평생을 몸바쳐온 의사였던 남편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 시작의 중심은 그리움이다. 의사로서 암환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쳐 왔던 남편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의사인 아내, 그가 수없이 반문하며 도달한 물음은 “나는 왜 사는가? ”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다다랐다. 그것은 삶의 존재에 대한 모든 인간들의 물음과 다르지 않다. 이 세상에 모든 존재하는 동물들은 사라지고 우리를 둘러싼 것들도 변화한다. 그녀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속에 사라지는 찰나들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오기근 교수의 그림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본질적인 고뇌에 대한 하나의 답이자 그 물음에 대한 진실의 답을 찾아가는 순례 같은 것이다.

그녀는 오랜 고민과 방황 끝에 그 그림에 대한 답을 찾았다. 그것이 꽃이고 자작나무였다. 물론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준 것들은 아름답게 핀 꽃들 이었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을 그리면서 그는 첫 번째 위로를 받았고 거기서 자연이 가져다주는 절대적 미의 꽃에서 마음을 다독였다. 실제 수세기 동안 예술가들은 그들의 상처나 슬픔, 그리고 비극적 감정들을 어떤 대상에 이입시키거나 위로 받으면서 숙명적인 인간의 감정들을 극복했다. 이러한 현상들은 무수한 예술가들이 지나온 관례였고 화가들의 속성이었다. 세잔느가 그러했고 비엔나의 예술가이자 꽃이었던 쿠스타프 클림트가 그러했다. 인상파 파가들로부터 이어진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까지 이러한 회화에 감정이입과 회화의 위대한 표현방식은 사실 클림트의 자작나무 풍경에서 정점을 이룬 듯하다.

오기근 교수의 작품들은 우연이든 혹은 우연이 아니든 몇몇의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자작나무와의 스토리를 떠올리는 것은 분명하며 피할 수 없다. 왜 그녀는 그렇게 자작나무에 빠지게 되었는가? 왜 그녀는 하필이면 자작나무인가? 도대체 자작나무는 그녀에게 무엇인가? 의외로 자작나무는 신비의 나무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자작나무는 우리에게나 외국인에게도 신목이나 영목으로 꼽힌다. 러시아 사람들의 자작나무에 대한 경배는 샤머니즘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닥터지바고의 끝없는 설원에 펼쳐진 러시아의 3대 문호 가운데 한 사람인 도스토옙스키는 자작나무 타는 소리에 감동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로 러시아 국민들의 심성에 담긴 자작나무와 문학과의 관계를 경탄한다. 따라서 자작나무 숲을 경배하지 않는 자는 러시아 문학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어쩌면 그의 자작나무에서 풍요로운 눈부신 은회색의 평온함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북방 겨울벌판의 눈보라와 고독함을 함께 떠올리게 만드는 하나의 마력적인 대상이다.신라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가 자작나무에 그려졌다고 한다. 이렇듯 하늘을 향해 쭉 곧게 뻗은 직선의 미와 눈부시게 빛나는 흰 줄기의 단아한 자태만으로도 자작나무는 충분히 감동적인 회화의 모티브임에 틀림없다. 그는 그 감동적인 자체에서 그녀는 마치 설원에 펼쳐져 있는 아득하고 애틋한 그리움에 상처들을 불러 세운다. 그의 섬세하고 정감 있는 붓 터치에 의해 그의 캔버스의 표면은 거대한 광야의 미끄러지도록 가슴을 애타게 하는 자연과 인간, 그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남편과 만나는 곳이 바로 자작나무이다.

의학적으로도 자작나무는 추운 나라에서만 살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피부를 치유하는 능력을 가진 특유한 나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그 은회색의 피부로 그가 지켜 내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새삼 그의 그림에서 읽어 낼 수 있다.

그런 그의 사부를 향한 마음은 작품 속에 검은 상처를 가진 나무들로 가지런하게 그려지면서 상징적인 의미와 뜻을 가진 곱고 단아하면서 매혹적인 형태로 되살아난다. 만약 우리가 단순히 자작나무라는 흔하디흔한 그 풍경 속에 그런 깊은 속성과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잘 그려진 나무가 있는 풍경에 결코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는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무수히 많은 자작나무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자작나무 보다 더 많은 나무를 작가는 그릴지도 모른다.

지금 그는 다양한 자작나무들의 모습을 새겨가면서 자연과 하늘이 내려준 식물이 주는 무한한 신비와 경험을 배우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풍경 속 나무들은 나무 이상으로 우리들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자연의 존귀함 모두를 가져다준다. 때로는 그림이 탁월한 치료의 효능을 알고 있지만 그의 작품이야 말로 사랑이 남긴 상처와 함께 하지 못하는 그리움의 상처와 흔적을 뜨겁게 전해준다. 그래서 나무 이상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이 그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무가치하며 무의미 하다. 단순한 자작나무의 정경에서부터 상처가 아물어가고 스스로 치유하는 그 모든 삶의 생채기가 그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우리에게 내미는 따뜻한 자작나무 선물이자 거울이다. 그 선물은 눈과 마음이 함께 해야 그 깊은 내면의 울림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화가의 절절한 사부를 향한 영혼의 메시지이다. 가장 뜨겁고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잃어버린 사람을 향한 한 여인의 그리움과 꿈. 오기근 교수의 그림을 보면서 이제 우리들은 클림트의 자작나무의 풍경을 비로소 잊게 될 것이다. 클림트의 풍경은 그가 느낀 아름다운 경험적 순간의 포착일 뿐이지만, 오기근 교수의 크고 작은 저마다 다른 색조와 형태를 지닌 나무들은 우리 자신과 이 세계가 창조되었던 순간들의 기억을 오랫동안 가지게 할 것이 틀림없다.

오기근의 작품들을 보면서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고귀하고 순결한 한 폭의 연애시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그림은 그래서 우리에게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우리들의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를 송두리째 치유 해 줄 것만 같다. 이것이야 말로 그의 그림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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