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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연적, 무의자 권옥연 선생님!!

김종근

나는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선생님에게 지난 한달 사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꿈만 같다. 2011년 12월 16일 오후 88세의 나이로 '멋쟁이 화가' 서양화가 권옥연화백 별세. 나는 조간신문의 부음소식을 접하고 당신이 계신 병원 장례식장으로 들어서면서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어이 김관장 왔어”(선생님은 저를 늘 그렇게 불렀다)하시며 엄청나게 큰 손으로 장충동 우리네 화실에서 몇 개월 전까지도 제 손을 잡아주시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이제 다시 없다는 사실과 빈소 입구에 가장 처연한 모습으로 쓰러진 이병복 여사의 모습 때문이었다.

사실 선생님은 다 모르시겠지만 유독 별명이 참 많았다. 누구나 다 아는 마지막 로맨티스트, 아주 작은 만남에도 행거 칩을 꼽고 옷 색깔을 맞춰 입는다 하여 멋쟁이 화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여인들이 다 당신 것이라 하여 바람둥이, 그림보다 성악 등 노래가 더 좋다고 하여 화가가수. 매너가 좋다하여 권 매너 등등
그러나 내게 선생님은 언제나 아버지였고, 형님이었고, 친구였고, 때로는 한 여자를 두고 서로 친하다고 싸움을 벌인 적이 있는 내게 연적이었다. 그래서 내가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송별회를 해 주며 비행기 값하라고 용돈을 듬뿍 주신 분도 선생님이었다. “‘이제 김관장이 가고 나면 남은 여자들이 다 자기것”이라고 좋아 하시면서 말이다

1986년 내가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미술관에서 관장으로 있을 때 나는 선생님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다리 하나만 넘으면 광희동 화실과 압구정동을 오가며 일주일에 서너 번씩 만나 밥도 먹고 커피를 마시며, 그림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의 화실에는 언제나 골동품과 민화, 토기가 뒹굴었고 , 벽면에는 몇 개의 이젤에 그리다만 그림, 그림을 위한 소품, 빈 액자와 캔버스들로 꽉 차 있었다. 그 때 화실은 사실 거의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는 통로가 없어 어떤 때는 발로 이리저리 밀쳐가며 길을 만들어 들어가 차를 마시며 왜정시대 때의 노래를 일본어로 부르거나 가곡을 정말 멋들어지게 불러 주었다.

그 때마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어린 5살 되던 해 조부로부터 서예를 배웠고, 바이올린에 심취한 부친을 통해 음악적 영감과 악음(樂音)을 익혔고 아마도 첼리스트인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도 그런 영향 일 것이라고. 그리고 화가가 아니었으면 지휘자나 가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만큼 그의 노랫소리는 거의 성악가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림은 곧 노래라고 했고 화가는 가수가 되어야한다고 했다. 자기의 음색과 독창적인 색채로 누구의 냄새가 나지 않는 자기만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청년시절과 일본, 파리의 유학시절은 나름 치열했지만 아름다웠다. 알다시피 함흥의 명문가인 권진사댁의 5대 독자로 태어나 유배되었던 추사 김정희가 함흥에 들르면 꼭 찾는 집안이 권진사 댁이었다고 하니 그의 예술적인 환경과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유년시절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잃은 것은 그에게 큰 불행이었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미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미술학교에 진학하도록 한다면 학교에 불을 지르겠다고 교장을 찾아가 으름장을 놓았다. 타고난 끼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미 경복고 시절 “선만(鮮滿)전람회”에 가작과 입선을 졸업반 시절엔 당시의 권위 있는 선전에 입선을 함으로서 이미 재능 있는 예비화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두고두고 그것이 후회스러웠다고 했다.

언제나 선생님과의 무용담은 그림에서 시작해서 여자 이야기로 끝났는데 어떤 날은 그림 주제로 왜 여인을 그리는지 이야기로 한나절을 보내고, 연애하는 법과 연애 기술 이야기로 저녁을 맞기도 했다. 선생님은 점심으로 종종 설렁탕과 도가니탕을 좋아 하셨다. 언젠가는 인사동 식당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장모 나왔어” 하시면서 덥석 할머니를 부둥켜 끌어 안으셨다. 처음 나는 어떻게 장모님이 사위 보다 더 젊나 하곤 의아해 했지만, 알고 보니 압구정동 청담동 일식집에도, 우동집에도 장모님은 물론 부인도 여럿 계셨다.
'어때 나보고 싶었지 그동안 그래 어떻게 지냈어?' 하시면서 선생님은 말을 건네며 능청을 떠셨다. 선생님이 자주 가는 단골집은 물론 가끔 가는 커피숍에 처음 보는 아가씨도 모두 애인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천하의 바람둥이라고 했다. 그러나 함께 만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선생님을 알거나 만난 여자 분들은 프랑스식 비쥬와 포옹을 피한 예외적인 분이 없다. 언젠가는 내가 기획한 전시 오프닝 날 많은 손님 내외분들이 오셨는데 그 가운데 백화점 대표 사모님도 참석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은 채 소개도 시켜드리기 전에 덥석 포옹을 하시면서 “그래 그동안 자기 어디 있었느냐고 보고 싶었지?”하며 사모님을 끌어안아 사장님께서 난감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어떤 때는 이대 나온 시어머니와 선생님의 제자인 며느리를 동시에 차례로 껴안으신 적도 있었다. 그리고는 곧 돌아서서 “김 관장 근데 저 분이 누구시지?” 하시며 물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워낙 인기작가 이었던 선생님이 이었기에 그의 그림을 찾는 컬렉터도 많았다. 심지어는 어느 유명한 기업의 회장 사모님과 컬렉터가 그림 한 점을 놓고 서로 달라고 청탁과 압력을 하는 곤혹스러운 일도 흔했다. 하루는 선생님의 학교 여제자가 큰 그림을 가져와 감정을 해달라고 하는데 비싸게 주고 산 큰 그림인데 알고 보니 그림이 가짜였다. 너무나 충격을 받고 당황스러운 여제자 모습에 선생님은 이리저리 고민하다 그 위에 다시 그림을 그려 싸인을 해 주어 수없이 인사를 하며 간일도 있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한없이 따뜻한 휴머니스트 이었다.

1991년 나는 파리로 유학을 갔고 선생님과는 전화나 편지로 소식을 전했고 가끔 파리에 있는 재불 작가인 권이나인 딸을 보러 왔었다. 그 때마다 선생님은 일부러 저를 불러내 공부하는데 보태 쓰라며 밥을 사주며 두둑한 촌지를 주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어느 해 선생님께서 파리로 와 약 30킬로 쯤 떨어진 오베르 쉬르 와즈를 가자고 했다. 그곳에는 고흐와 동생 테오의 무덤이 있고 고흐의 마지막 아틀리에가 있는 곳이다. 차를 몰고 고흐의 무덤에 도착 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다시 내려가자고 했다. 인간이, 화가가 고흐의 무덤에 오는데 빈손으로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 꽃을 사서 다시 무덤에 가 꽃을 내려놓았다.

선생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아직 인생을 더 살아야 한다고, 평생예술을 향해 몸 바친 불행했던 화가의 무덤에 빈손으로 온 자신의 무례와 불찰을 나무라고 있었다.
꽃 한 송이 사 가지고 오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이렇게 자책하는 모습을 나는 수없이 그 곳을 다녀왔지만 꽃을 사 온 화가도 없었다. 많은 화가들의 경조사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의리 있는 화가 그것이 권옥연의 참다운 모습이다. 이러한 철학은 그의 아호에서 잘 드러난다. 벌거벗은 사람으로 모두 버린다는 아호 무의자(無衣子). 선생님은 인간은 원래 벌거벗고 왔다가 벌거벗고 가는 것이라 했다, 인간 삶이 그러하니 세속적인 것 무엇인가에 얽매이지 않고 살겠다는 뜻이다. 그는 사실 몇 십 년 동안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인기화가로 있으면서도 늘 '나는 아직 멀었다'며 스스로를 낮추며 살아왔다. 그가 덕을 베풀고 사람들이 그의 빈소에 찾아와 그렇게 함께 슬퍼하는 이유가 다 그런 베품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예술적인 가풍 속에서 숙명처럼 예술가의 길을 걸어온 선생님은 예술계 전 분야에서 특히 명성이 높았다. 최불암 선생님, 유인촌 ,고두심 이런 분들이 다 선생님과 깊은 인연을 지니신 분들이다. 늘 주머니에 붓을 넣고 다니며 붓글씨를 쓰는 걸 좋아했던 선생님, 단 한 번도 손톱 밑에 물감이 묻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그는 부지런하고, 인간적인 한없이 여린 예술가였다.
그는 해가 바뀔 때 마다 손수 연하장에 붓글씨로 프랑스에 있는 어린 막내동생 뻘에게 안부를 물어오고 아들을 먼저 보낸 비통한 심경을 적어 보내왔다. 내가 이십여 년이 넘어도 선생님의 연하장과 편지, 봉투조차 못 버리는 이유이다.

그는 예술에서 특별히 추사 김정희를 모법으로 삼았다. '추사가 말년에 쓴 어린애 같은 글을 보면 난 어림도 없어. 그쯤 되어야 예술가라고 하지. 치졸하게 그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날 보고 화가라는 말 하지 말아. 그림은 아직도 너무 힘들고 어렵다'고 누차 되뇌였다. 한 번도 스스로 그림을 자랑하지 않고 겸손으로 살아왔지만 내면에는 그만큼 인기와 사랑을 받으면서 겪어야 할 예술가의 고뇌와 갈등을 가졌던 완벽주의를 꿈꾸는 운명적인 화가.
과거의 자기 그림을 가져와 감정을 해달라거나 할 때마다 내가 이렇게 그림을 못 그렸는지 좌절하며 괴롭고 실망스럽다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던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대중들과 미술 전문가들은 그의 한국적 미감이 돋보이는 예술세계에 공감했다. 부유했던 환경에서 작가로는 드물게 일본에서 공부하고 해방직후 미술활동까지 일본의 미술과 서양 현대미술의 배경 속에서 성장했던 그는 특히 고갱과 루소를 특별히 좋아했다. 루소의 그 천진난만함과 소박함 , 고갱의 그 열정적인 색채와 원시성을. 곧잘 그의 향토성과 화풍에 있어서도 고갱의 인물을 통해 조형적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털어놓았다.
그의 그림에는 여인이 많다. 그러나 수없이 많이 그려온 인물이 가장 어렵다고도 했다. 종종 정말 내 그림의 특징이 무엇인지 그런 그림을 단 한 점이라도 남기고 싶다고 늘 고백하며 독창적 화풍으로 국내 미술시장에서 블루칩 작가로 인기가 높아진 이유이다.

물론 그 뒤에는 1951년 결혼한 무대미술가 이병복여사(극단 자유 대표)의 내조가 무엇보다 컸다. 국내 유일의 '예술원 회원 부부'로도 더 알려진 선생님은 농담처럼 그림 팔아서 부인 극단 운영에 보태었다고 자랑하면서도 한쪽으로는 입버릇처럼 사모님한테는 늘 미안하다고 했다. 언젠가는 집사람이 화실에 왔는데 화실 열쇠를 자기가 떨어뜨렸는데 그것을 집사람이 못 집게 하려고 발로 밞은 적이 있다고 그 이야기를 몇 번이고 후회스럽다고 했다.
장충동 한 건물 아래 위층에 작업실을 갖고 있지만 서로 일터를 찾는 일이 몇 년에 한 번 될까 할 만큼 서로의 세계를 지켜왔던 무의자 '나는 다섯 살 아이하고 살아왔다'는 사모님, '화가는 정신연령이 다섯 살 넘으면 그림 못 그린다.' 는 권옥연.

박수근을 대단히 존경하면서 그가 훌륭한 화가가 된 것은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가방끈이 짧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프랑스 유학 가서 하도 좋은 것 하도 많이 보는 바람에 거기 물들어버렸다'고 후회했던 그이지만 그는 프랑스에서 한국미를 생각하며 한국적인 색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세기 기자가 “깜깜한 어둠속에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정일靜逸 이며 그의 그림은 회색 속에서 발하는 눈부신 진주빛 화염이 일품이다. '라는 것이다.

선생님 운구를 따라 벽제 화장장에서 정릉 보국사에 안치 될 때까지 함께 선생님과 마지막을 함께한 난 26년이나 차이 나는 저를 언제나 예뻐하고 챙겨준 은덕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많은 선배 화가 그리고 동료화가들에게 그는 사랑과 선을 베풀었다. 김흥수 선생님이 예술원 회원이 되신 후 나는 이제 홀가분하다고 했다 훌륭한 선배 화가를 예술원 회원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많은 은덕을 베풀고 선생님은 이 세상과 이별을 했다.
빈소에서 김흥수 화백이 뭐가 그리 급해서 이렇게 빨리 갔느냐고 소리치는 것도 이병복 여사가 마지막 가는 길까지 매일 나에게 ‘미안하다“고 만 수없이 말하고 갔다고 억울해하고 비통해 하는 이유이다.
화가로서 이만큼 우리 대중들의 감성을 붙들어 놓은 화가가 일찍이 없다는 점에서 이제 그의 예술세계에 매력을 남은 우리가 새롭게 살펴보고 평가해야 할 때가 아닌가?
무의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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