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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다

윤진섭


 법관의 단색화 작업이 나날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청색과 검정 사이에서 벌어지는 색의 담백한 향연. 기존의 어떤 형태도 거부하는 그는 오로지 선을 긋고 점을 찍는 필획(筆劃)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정신 수행의 올곧은 길을 가고자 한다. 그것은 속세의 번뇌와 잡사(雜事)를 털어버리고 해맑은 정신의 세계로 잠입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곧 수행의 방편이지만, 불가(佛家)의 울타리를 벗어나 그림이 화랑 벽에 걸리면 세속적인 의미에서 미적 감상의 대상으로 변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것은 곧 비평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법관의 작품 세계는 미술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법관의 단색화는 색을 통해 지고한 정신의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의 매체다. 그것은 내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논평했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물상들을 단순한 도형으로 상징화하는 작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것이 지난 15년간에 걸쳐 이룩한 법관의 회화 작업의 대강이다. 처음에는 산, 물, 풀, 바위와 같은 사물들을 단순화하여 마치 탱화를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장엄한 색채로 형상화했으나, 점차 이를 분절하고 파편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수년에 걸친 해체의 시기를 거친 후 마침내 단색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의 단색화는 어느날 갑자기 비롯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그러니까 청과 적, 황(黃)이 주를 이루던 다색 반추상화의 시기에 그 징후가 이미 내장돼 있었다고 하는 편이 옳다. 


 법관은 마치 불가의 탱화를 연상시키는 이 다색 반추상의 그림에서 색에 주목, 순수 추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곧 법관이 회화예술의 조형적 근간인 색, 빛, 선, 면, 점에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형(形)의 표현에서 벗어나 사의(寫意)의 표출에 작품 제작의 큰 뜻을 세우고 여기에 정신의 힘을 싣는 것, 이것이 바로 법관이 지향하는 화가로서의 자세일 터이다. 따라서 법관의 작업은 청색이나 적색, 회색 등 단색을 통해 순수한 추상의 세계에 육박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완상하는 가운데 잡다한 세속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예술의지는 오로지 투명한 세계를 관철시킴으로써, 유명(有名)에서 무명(無名)을 얻으려함일 것이다. 그의 작품에 드러난 형(形)들이 그러하니, 과연 가로와 세로로 무수히 겹쳐 포개진 선들의 수많은 다발은 그것을 그을 때 기울인 공력도 공력이려니와, 그 시각적 결과 또한 장엄하다 할 것이다. 


 인과론적 독재의 논리에서 벗어나 상대론적 관계성에 입각해 정신의 여유를 찾고자 하는 것이 법관이 지향하는 태도가 아닐까 한다. 그의 그림에는 무수한 빗금들이 존재한다. 가로와 세로로 겹쳐진(+) 무수한 선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화면 위에 공존한다. 그렇게 해서 기왕에 그려진 선들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선들이 자리 잡는다. 시간이 갈수록 그것들은 다시 화면 바닥으로 가라앉고 다시 새로운 선들이 나타난다. 이 선들의 공존은 융화(融和)의 세계를 이루며, 세계는 다시 반복되기를 그치지 않는다. 법관의 그림은 따라서 완성이 아니라 오로지 완성을 지향할 뿐이다. 


 청색의 무수한 기미를 띤 법관의 그림은 마치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를 닮았다. 파도는 현상이지만 보통 명사로서의 바다는 본질이다. 이 때, 법관이 눈길을 주는 것은 파도가 아니라 바다다. 비가 오고 날이 궂으면 파도가 포효하듯이, 해가 좋고 바람이 잦으면 파도 또한 잔잔하듯이, 물상의 변신은 믿을 게 없다. 법관이 청색의 세계로 육박해 들어가서 진청과 진회색의 사이를 오가는 뜻은 바다의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찾기 위함이다. 그것이 어디 색의 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이랴!
 법관은 색을 통해 만물의 운행과 세상의 묘리를 보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서 색은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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