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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의 전통적 관례에 대한 저항들

윤진섭

동양화의 전통적 관례에 대한 저항들
         
윤진섭 | 미술평론가

한국의 단색화가 국제 미술계에서 부상된 이후, 근래 비평을 비롯하여 미술사, 미술시장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반응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대략 요약하자면, 단색화의 용어와 개념, 정체성의 정립을 둘러싼 문제 제기와 함께 단색화 유행이 미술시장에 미치는 파장(주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의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비판, 포스트 단색화에 대한 논의, 한국미술의 국제화에 대한 시각 등으로 압축된다. 

70년대 이후 한국의 미술계에서 주류로 부상한 단색화는 서양화 위주의 화풍이었다. 김기린, 박서보, 서승원, 윤형근, 이동엽, 이우환, 정상화, 최명영, 최병소, 하종현, 허황 등 단색화 1세대 작가들은 거의 다 서양화 전공의 작가들이었다. 반면에 동양화 전공의 작가는 권영우와 정창섭 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소수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한지가 지닌 풍부한 물성과 여백 등 동양화의 전통적 재료와 특유의 기법을 통해 단색화의 요체를 창작의 주요 모티브로 삼았다. 오늘날 한국의 단색화가 독창적인 세계의 구축을 통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 이유의 이면에는 권영우나 정창섭과 같은 동양화 출신의 작가들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권영우전]은 권영우(1926-201)라는 작가가 한국 단색화의 형성과 전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출품작들은 60-80년대의 초, 중기의 것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여기에 도록, 팸플릿, 편지, 메모를 비롯하여 작가가 직접 사용한 도구들 등등 작가와 관련된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들을 진열, 관객의 이해를 돕는 아카이브전을 병행하여 눈길을 끌었다. 여담이지만, 최근 몇 년간 국내미술계에 나타난 새로운 관행은 이른바 아카이브전의 등장이랄 수 있는데, 이는 서구에 비해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전시의 전문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국공립, 사립미술관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아카이브전의 병행 전시를 통해 관객들에게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권장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국제갤러리의 이번 아카이브전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의미가 큰 새로운 시도로 읽혀진다. 

권영우는 이번 출품작을 통해 입증되었듯이 단색화의 출범 시기를 60년대 초반으로 이끈 작가이다. 단지 시기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수화 김환기의 점화보다 이르다. 이는 그가 한지의 물성적 가치를 인식하고 단순히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바탕으로서의 화선지와 결별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1962년, 제11회 국전에 출품한 작품 <무제>는 한지 자체를 매제로 삼아 물리적 반응을 실험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화선지를 화포에 두껍게 찢어 바른 후 손톱으로 긁은 것으로 종전의 대상에 대한 묘사에서 벗어나 물질 자체를 문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권영우의 이러한 선구자적인 실험의식은 60년대 초반 당시 국전 위주의 고루한 동양화단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국전 동양화부의 일반적인 추세가 수묵 산수나 정물 혹은 인물 위주의 채색화였던 점을 감안하면 <무제>라는 제목의, 종이의 물성을 강조한 이 추상화가 얼마나 이질적이었는지 짐작할만 하다. 권영우는 1966년 신세계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이후 화선지를 화포에 몇 겹씩 겹쳐 바른 후 손가락이나 나무 꼬챙이, 칼 등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여 이를 뚫거나 찢고, 긁거나 미는 등 다양한 행위를 가하는 작업을 펼쳐나갔다. 이번에 열린 국제갤러리의 권영우 초대전은 60-80년대의 작업에 초점을 맞춰 권영우의 종이를 매재로 한 실험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구체적인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보여준 전시였다는 점에서 보다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파라다이스 집(Paradise Zip)에서 열린 [김호득. ZIP, 차고, 비고]전은 어느덧 중진작가의 반열에 오른 한국화가 김호득(1950- )의 근작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였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갤러리 건물의 특징에 대해 철저히 연구한 후, 건물의 구조에 맞게 전시를 구상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장소 특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2층의 벽돌 건물인 갤러리는 실내외 전체가 흰색이며,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방으로 구성된 오밀 조밀한 구조를 띠고 있다. 김호득은 각 전시실의 구조에 맞춰 여러 점의 회화, 오브제, 설치, 비디오 작업을 각각 배치하였다.

김호득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명제 혹은 주제어다. “채움-비움”, “비울, 채울”, “차고, 비고”, “흔들림, 문득-사이”, “겹, 사이”, “문득”, “한 줌의 공간을 굴리다”, “한 줌의 공간을 놓다”, “흔들림, 문득-공간을 느끼다”와 같은 명제들은 마치 선(禪)의 화두를 연상시킨다. 부사, 명사, 동사, 동명사가 홀로 쓰이거나 혹은 더불어 쓰이면서 명제는 작품 이해에 일종의 참조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전혀 상관없는 어사(語辭)일 수도 있다.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객 사이에 오가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교감이 중요한 것이지, 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불경에는 강을 건넌 사람이 고마운 나머지 배를 지고 가는 어리석음을 빗댄 비유가 나오는데, 김호득의 작업에서 언어의 역할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충분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김호득이 검정색(음)과 흰색(양), 도(圖 :figure)와 지(地:ground), 그리고 그 ‘사이(between)’를 주목하는 것은 음양으로 대변되는 동양적 세계관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사이’란 나의 견해로는 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물리적으로는 문자 그대로 공간과 공간의 사이, 시간과 시간의 사이, 물질과 물질의 사이로 해석할 수도 있다. 

검은 종이죽을 공처럼 둥글게 뭉쳐 바닥에 놓인 한지 위로 굴리는 행위(이 반복적인 행위의 과정은 녹화돼 벽에 설치된 TV 모니터를 통해 방영된다)와 그 결과로서의 오브제 설치 작업, 흰색의 종이죽을 한 손에 꽉 움켜 쥔 후(이 장면 또한 녹화돼 TV모니터를 통해 방영된다.),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남겨진 덩어리들을 전시장 바닥에 펼쳐진 종이 위에 가득 늘어놓은 설치작업 등은 행위의 과정에 주목한 퍼포먼스의 결과물이다. 

테라스에 설치된 두 개의 거대한 박스 설치 작품(<차고, 비고-허상>)은 실내의 검정색 수조 작품(<흔들림, 문득-공간을 느끼다>)과 대비된다. 작가에 의하면 창문을 사이에 두고 전개되는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유형의 설치작품들은 각각 양과 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즉 테라스의 거울이 설치된 두 개의 박스에는 주변의 풍경이 담겨지지만(양), 일기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며, 거울에 비친 주변의 풍경 또한 그 위를 흐르는 물에 의해 상이 왜곡된다. 

2009년, 영천의 시안미술관에서 발표한 적이 있는 먹물이 가득 담긴 실내의 수조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약간 변형된 형태로 전시되었다. 시안미술관의 작업이 수조 위에 검거나 흰 한지들을 일렬로 늘어뜨린 것인 반면, 이번 전시에는 창밖의 풍경이 수조의 검정색 물에 비치도록 고안하고, 곁들여 천장으로부터 일렬로 늘어선 실들이 수조 속에 잠기도록 설치하였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밖의 풍경과 실들이 수조를 가득 채운 먹물의 수면 위에 비칠 때, 모터에 의해 순환되는 물의 미세한 흐름은 실과 풍경에 영향을 미쳐 미묘한 상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김호득은 또한 검게 칠해진 100장의 한지와 그 옆에 놓인 아무 것도 칠하지 않은 흰색의 한지 100장을 겹쳐 쌓아 놓았다. 갤러리가 제공한 설명문에 의하면 그는 흰색의 한지에 먹물로 ‘아무 생각없이’ 200번을 칠했다고 한다. “흰 종이일 때 아무 것도 아닌 상태와 (검게 칠해진 종이의) 또 다른 아무 것도 아닌 상태와 맞닥뜨린다. 그 묘한 희열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런 상태는 과연 무엇을 이름인가.

결론적으로 말해, 김호득의 이번 전시는 지필묵으로 대변되는 기존 동양화의 관례에 저항하는 동시에 동시대가 요구하는 한국화의 새로운 언어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라 할 수 있다. 전혀 손대지 않은(사인조차 없는) 오브제로서의 두루마리와 한지로 된 평면 오브제 작업은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하지만 지면 관계상 다음의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아트인컬처 201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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