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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적 삶과 문화적 퍼포먼스

윤진섭

유목적 삶과 문화적 퍼포먼스

 윤진섭 | 미술평론가
                                       
김주영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작품 활동에만 진력(盡力)해 온 작가이다. 70년대에는 검정 단색화로 일관된 추상의 세계에 몰입하였으며, 90년대 말부터는 노마드 프로젝트를 통해 특유의 퍼포먼스를 실천에 옮겨왔다. 그가 국내에서의 교수 생활을 접고 프랑스에 유학을 간 것은 1986년이었다. 김주영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오랜 유학 생활은 예술에 관한 사유와 실천이라는 양대 축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2005년에 귀국하기 전까지 파리 8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프랑스 문화성이 제공하는 예술가촌에 입주, 전업작가 생활을 꾸려나갔다.

김주영은 화가로 출발하여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드로잉, 글쓰기 등 다양한 매체를 섭렵, 전방위적 활동을 벌이는 작가이다. 특히 글쓰기는 그의 사유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그는 현재까지 <한 줌의 재 이야기-예술가의 책>, <목마른 달팽이 이야기>, <아르비방이 가는 길>, <김주영의 노마드, 노마드 서사, 길 따라 마을 따라> 등 방대한 양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그가 마치 유목민처럼 펼쳐나간 사유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놀라운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때로는 동서양을 관통하는 해박한 지식에 압도되기도 하고, 때로는 독창적인 사유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한 인간의 지적, 예술적 편력이란 것이 이처럼 광대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로서 김주영의 생애를 뚜렷이 구분시켜 주는 분기점이 바로 프랑스 유학인데, 구체적인 계기가 된 것이 노마드 프로젝트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부적의 불꽃(인도-네팔, 1998), 이름없는 깃발들(몽고 투치크, 1999), 떠도는 무명의 영혼들이여(비무장지대, 2000), 시베리아 열차를 따라 고려사람의 유랑길(카자흐스탄, 2001), 역사는 시민이 만든다-어느 노동자 조센징 이야기(일본 아키타, 2003), 옌징가는 길(프랑스 마르세이유-스위스 시옹, 티벳 옌징, 2004-2006), 미호천 물길따라(충청북도), 바람마을의 아이들(몽고 고비사막, 2008), Nomadic Village(불가리아 파브리케니, 2009), 오솔길에서 만난 사람들(프랑스 Aubagne, 2011), Nomadic Village(영국, Durham, 2012) 등등인데, 거의 매년 노마딕 프로젝트를 성실히 수행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올해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의 노마딕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삶과 예술이 딱히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삶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라는, 어찌 보면 간단한 이 명제가 프랑스 유학이후 그의 삶을 관통해 온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주영은 국내 화단에서 저평가돼 온 작가이다.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미술관급 대형작가임에 분명한데, 아직 그 어느 미술관도 올해 일흔을 넘긴 이 작가의 예술세계를 조명한 적이 없다. 이 문제를 놓고 볼 때, 나는 국내 큐레이터들의 직무유기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나는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산적한 작품들과 실로 방대한 양의 아카이브를 살펴보면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는데, 작가로서 꼼꼼한 정리벽과 충실한 보관의지는 자신이 곧 프로작가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일정한 곳에 거주하는 정주민이 아닌 떠돌이 유목민으로서의 김주영의 삶의 도정은 그가 아방가르드의 전사임을 말해준다. 사유의 유목민, 예술적 삶의 실천으로서의 유목민, 인간의 근원을 추적하는 문화인류학자로서의 유목민인 김주영은 늘 새로움을 추구하고 방황하는 아방가르디스트이다. 그 예술적, 지적 편력의 내용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방황하고 있었다. 생각, 예술, 사는 것 모두가 그러했다. 생각이 원점을 떠나고 생활이 정착지를 떠나고 예술이 관념을 떠나고, 그리고 그 모두는 회귀하거나 아니면 사라지거나...... 방황은 지구의 땅 끝 어디에나 있었다. 인도의 힌두사원에서, 몽고의 대초원에서, 영국의 작은 마을, 아프리카, 프랑스 곳곳에서 그리고 시베리아의 긴 열차, 티베트행의 칭짱열차 안에서도, 떠돌며 예술이라는 것을 그 길바닥에서 줍곤 하였다. 그토록 원하는 아틀리에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방황(nomad)은 예술의 모티브였다. 그것은 회의적인 나에게 대단히 희열을 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한다면 그것은 삶의 당위성이었다.” 

떠도는 삶은 정지된 삶의 정 반대편에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김주영의 예술은 곧 떠도는 예술이자 빗나간 예술이며, 방황하는 예술이다. 방랑자로서 김주영의 삶과 예술은 기존의 정지되고 정착된 삶과 예술에 대한 부정이며, 거역이다. 그는 멈춰버린 삶과 연못에 고여서 부패한 예술의 개념에 대해 정면에서 도전한다. 늘 길을 가면서 사유하는 김주영의 삶은 니체의 말을 빌리면 ‘위험한 삶’이다. 내가 예술가로서 김주영의 위대함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요즘처럼 자본에 휘둘리는 상업주의치하의 미술계를 둘러볼 때, 김주영처럼 전위적인 도발을 감행하는 작가는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다. 그는 이런 구차한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발언을 한 적은 없지만, 유목민으로서 침묵의 수행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삶을 통해 실천함으로써 온몸을 통해 투쟁한다는 것이야말로 그 어느 것보다 값진 발언이 아니겠는가?

‘위험한 삶’의 실천자인 김주영은 자신의 예술적 자양분이자 토대인 길을 따라 가면서 인류의 다양한 삶의 양태와 그것의 총화인 문화를 접한다. 말하자면 예술가로서 김주영의 캔버스는 지구인 셈이다. 그는 한국적 제의(祭儀)의 기본 도구인 쌀과 등잔, 그리고 무명천을 가지고 서로 다른 문명과 통교하고자 하며, 그러한 통혼(通魂)을 통해 인류가 한 뿌리임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주영의 노마드 서사는 따라서 딱히 예술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화적 퍼포먼스에 가깝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무려 7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가며 고려인의 슬픈 디아스포라(이산)의 역사를 추적한 바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능한 선조(3대)가 일찍 월경(越境)하여 정착한 세대의 가족과 만난다. 그들과 잠깐이나마 같이 머물며 선조의 이민 경위를 들으면서 의식주 생활을 같이 나눈다. 왜 모국을 떠났나. 그 후 어떻게 생활하였나.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은 어떠한가. 그리고 현재의 신한촌 생활은? : 소수민족의 유랑 길, 시베리아 열차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보시비르스크까지 그리고 알마아타까지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고려 사람들의 추방 과정을 따라간다. 중앙아시아에 내던져진 (알마아타와 타슈켄트) 현지의 고려사람들을 만난다. 모든 기록, 데생, 사진 비디오는 도큐멘터 형식의 설치 작업으로 발표하고 자료집을 만든다. 광목 위에 족적을 남기며 기록한다.” 
-김주영, 작업노트 중에서-


위의 내용은 그의 노마드 작업이 인류학적 탐사를 방불케 하는 면모가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문화적 퍼포먼스이기도 한 김주영의 노마드 퍼포먼스는 한 판의 제의(祭儀)를 통해 지구촌 위에서 스러져 간 가엾은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로서 예술적 승화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기존의 인류학적 탐사와 구분된다. 그는 광목천을 길게 펼쳐놓고 그 위를 걸어가는 유목적 퍼포먼스를 행하길 즐기는데, 이는 그의 작업이 노마드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김주영은 사유의 길과 실제의 길을 따라 정처없이 방랑하는 유목민이다. 그 사유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그가 생존하는 한, 그리고 힘이 남아 있는 한, 방랑은 계속되겠지만, 50년 예술적 실천의 도정을 총체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다면 어디 눈 밝은 큐레이터 한 명쯤 없겠는가? 
 

<퍼블릭아트 201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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