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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한국 단색화의 등장과 전개

윤진섭

 1970년대 한국 단색화의 등장과 전개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1990년대 후반부터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여 1970년대 초반에 개화(開花)하기 시작한 한국의 단색화는 최근 국제 미술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가장 최근의 전시로는 미국 로스엔젤리스에 있는 블럼 앤 포 갤러리가 주최한 [Dansaekhwa and Minimalism]전과 프랑스의 브루타뉴 지역에 위치한 케르게넥 미술관 주최의 [Dansaekhwa]전1), L.A Art Show의 [Dansaekhwa] 특별전, 그리고 프랑스 파리 소재 페로탱갤러리가 주최한 [Origin]전을 들 수 있다.2) 
 또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한 단색화는 단순한 보도의 차원을 넘어 점차 특집의 형태로 소개되고 있다.3) 
  197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 일어난 단색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하나의 ‘운동(movement)’이었는가? 
 그렇게 말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전위예술 운동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전위예술론’의 저자인 레나토 포기올리(Renato Poggioli(1907-1963))는 전위예술 운동에 필요한 기본 요건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 바 있는데, 곧 이념과 사상을 같이 하는 동반자적 결속체로서의 그룹과 선언문(manifesto), 그리고 예술적 주장을 펼치기 위한 잡지 등이 그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단색화를 이 범주에 넣기는 어렵다. 70년대의 단색화는 그룹도 아니었을 뿐더러 단색의 이념을 펼치기 위한 기관지나 그 어떤 선언문도 없었기 때문이다.
 운동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박서보를 비롯한 단색화 작가들보다 좀 더 일찍 전위운동을 시작한<A.G(Avant-garde)>나 <S.T(Space & Time)>의 활동이 전위예술 본래의 개념에 가깝다. 여기서 우리는 70년대 단색화의 주역인 박서보, 윤형근, 정상화, 정창섭, 등이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걸친 비정형회화(앵포르멜:Informel)의 주역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4) 한국전쟁이 끝난 어수선한 시기에 이들은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은 체험을 실존적 입장에서 물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현대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활동은 60년대 중반에 이르자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지리멸렬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 혼란기를 헤집고 새로운 전위적 이념의 결속체를 이룬 것이 바로 <A.G>와 <S.T>였다. 70년대 중반, <A.G>와 <S.T>의 멤버들이 대거 <에꼴 드 서울(Ecole de Seoul)>에 가담하게 된 것과 1975년 <A.G> 그룹의 해체와는 밀접한 정치적 관계가 있다. 이 무렵, 이우환의 빈번한 한국과 일본의 왕래는 모노파(物派:Monoha)의 한국 내 전파와 관련이 있고, 당시 한국에서 차지하는 이우환의 위상이나 인기로 미루어볼 때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우환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당시 박서보와 이우환의 관계를 미루어볼 수 있다. 
 “나의 입장에서 단색파를 서술하자면, 72년 [앙데팡당]전을 본 야마모토와 그를 내세우는 나카하라, 그들의 통로인 나를 데리고 서울의 대장격인 박서보 선생이 앞장을 섰고, 서울 명동화랑이 거점이 되어 단색화의 바람을 일으키는데 한 몫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자기 발견의 충동질이었고 그 계기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말이지 다른 뜻은 없다. 간절한 잠재성의 꼬투리에 외부의 충동질로 불이 붙자 폭발적, 집단적 양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국내 쪽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박서보 선생의 존재와 역할 없이 단색파는 거론 될 수 없고 이루어질 수도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현실과 소외된 비제도의 상황을 무릅쓰고 가냘픈 내외 동풍을 중계삼아 단색계통의 작가들을 부추기며 쏟은 그의 열정과 행적은 실로 눈부시다.”

Ⅱ.
 한국의 단색화는 1960년대 후반에 징후가 나타나서 70년대 초반에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1972년 당시 제1회 [앙데팡당]전(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 출품한 이동엽, 허황 등의 작품에서 단색화적 경향이 느껴지는데, 그 이전에도 가령 <A.G>라는 잡지의 표지에 실린 서승원의 <동시성>(1969)에서 단색화의 뚜렷한 징후를 찾아볼 수 있다. 단색화는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전 등을 통해 70년대 중반 무렵이면 이미 화단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이때는 이미 획일화의 폐단이 나타나고 있었다. 
 내가 201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Korean Monochrome Painting)]전을 기획할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다. 70년대의 단색화는 이른바 ‘촉각성(Tactility), ‘정신성(Spirit)’, ‘수행성(Performance)’ 등의 특징을 지닌 작가들(국제갤러리의 [단색화의 예술(The Art of Dansaekhwa)]전의 초대작가들인 김기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등으로 대표되는) 외에도 기하학적 패턴의 반복을 기반으로 하는 진옥선과 파이프의 이미지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이승조, 촛농을 캔버스에 떨어뜨려 점의 반복을 보여준 홍민표 등등이
있으며, 천의 물성을 강조하여 회화의 일루젼을 실험한 김용익, 캔버스의 아사 천에 단색을 사용, 천의 주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박장년, 추사체 등 한문 서체를 바탕으로 동양정신을 단색으로 표현한 이정지, 한자의 실의 풍성한 물성을 조형적으로 실험한 김홍석 등등 그 유형과 재료는 실로 다양하다. 
 단색화 작가 중에서 가장 요체에 접근한 작가는 정상화이다. 매우 금욕적인 그의 작업은 캔버스의 주름을 잡아 사각의 모듈 패턴을 만들고 그 안에 반복적으로 물감을 집어넣고 떼는 작업이 주축을 이룬다. 나는 그의 작업에서 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축을 이루었던 몸(body), 즉, 신체성을 발견한다. 그에게는 그런 선구자적 요소가 있었다. 즉, 그의 캔버스 표면은 반복적인 행위에서 오는 일종의 피부인 것이며 그것은 곧 대지에 다름 아니다. 정상화에서 보이는 이러한 특징은 캔버스에 검정색 물감을 수십 차례 바르고 그 위에 수차례에 걸쳐 물감을 스프레이로 분사하는 기법을 구사하는 김기린, 신문지에 볼펜으로 칠하고 그 위에 다시 연필로 까맣게 칠하는 최병소, 흰색 캔버스 위에 회색 물감으로 희미한 흔적을 남기는 이동엽 등이 모두 피부와 관련, 회화에서의 신체성에 관심을 갖는 작가들이다. 또한 캔버스에 밑칠을 하고 연필로 선을 리드미컬하게 반복적으로 긋는 박서보와 마대로 짠 캔버스의 뒤에서 걸쭉하게 갠 유성물감을 밀어 넣는 하종현의 배압법, 생 아사천에 짙은 갈색과 청색을 겹쳐 칠해서 묽게 갠 물감이 부드럽게 번지는, 마치 동양화의 선염법을 연상시키는 윤형근, 걸쭉하게 푼 한지를 캔버스에 붓고 손으로 매만져 조형적 형태를 만드는 정창섭 등등이 대표적인 단색화 작가들이다. 이우환은 어렸을 때 배운 서예의 기본, 즉 점과 선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우주의 시작과 끝이 점에서 비롯된다는 주역의 깊은 사상이 그의 작품의 기본적인 컨셉을 이룬다. 바둑을 둘 때 위에서 바둑돌을 내리꽂으면 바둑 판면이 팽팽하게 긴장한다는 느낌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 시골의 전통 가옥에 있는 오지 굴뚝에 켜켜이 앉은 검댕을 연상시키는 김기린의 검정회화와 한국의 토담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공법을 연상시키는 하종현의 배압법 등은 모두 한국의 전통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원근법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시각중심적 사고의 소산인 서양의 미니멀리즘과 다른 한국의 촉각중심적 사유방식을 이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물론 형태면에서 보면 애드 라인하르트의 검정회화와 김기린의 그림이 매우 비슷한 데가 있지만 말이다. 
 
Ⅲ.
 한국의 단색화는 타자적 시선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는 내가 나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잘 맡지 못한 상태에서 남이 먼저 나의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1970년대에 한국의 단색화에 대해 가장 먼저 주목한 측은 일본인들이었다. 1975년, 일본의 정상급 화랑인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 사장과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가 기획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이 동경화랑에서 열렸는데, 초대작가는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 등 5인이었다. 전시서문에서 나카하라 유스케는 “색채에 대한 관심의 한 표명으로서 반(反) 색채주의가 아니라 그들의 회화에의 관심을 색채 이외의 것에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미술평론가 이일 역시 서문에서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단순한 빛깔 이상의 것이다......백색이기 이전에 백이라고 하는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라고 썼다.6) 
 나카하라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한국 단색화 작가들은 색채 그 이상의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무엇’을 가리켜 정신이라고 해도 좋고, 이일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우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비록 한국의 단색화가 1970년대 초반에 서구의 모더니즘, 보다 정확히 말해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스트 페인팅이나 미니멀 아트와 같은 해외 사조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그것을 발효시켜 독자적인 양식을 창출한 주체는 백색파 작가들이란 사실이다. 야마모토 다카시와 나카하라 유스케와 같은 일본의 미술관계자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이 한국의 ‘백색’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나카하라는 “한국의 현대회화가 모두 구미와 똑같은 맥락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화가의 작품에는 다른 나라의 현대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질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73년 봄, 서울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어떤 화가의 작품을 접했을 때 나는 중간색을 사용함과 동시에 화면이 매우 델리키트하게 처리되어 있는 회화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7) 
고 쓴 바 있다. 이처럼 일본인들의 백색에 대한 주목은 구한말에 한국 땅을 밟은 벽안의 서양인들이 인상 깊게 본 백색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19세기 말, 근대화의 여명기에 이 땅을 밟은 서양인의 눈에 조선은 조용한 ‘은자(隱者)의 나라’로 비쳐졌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흰옷을 입고 있었다.”고 구한말에 조선을 찾은 한 서양인 기자는 쓰고 있다.”8) 이 서양인 기자의 눈에 비친 흰색 또한 타자적 시선이란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9) 자의 눈에 비친 흰색 또한 타자적 시선이란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 ‘흰옷’과 함께 또 하나의 한국적 특질이랄 수 있는 ‘고요’는 모두 외국인이 바라본 한국의 인상이란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말하자면 타자적 시선인 것이다. 타자적 시선이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 이른바 ‘백의민족’의 표상으로서 한국의 백색이 지닌 문화적 상징성은 장구한 역사를 배경으로 배태된 것이다. 그러한 문화적 상징성은 다양한 문화적 자료체를 통해 수렴된다. 가령, 우리의 조상들이 입었던 흰옷을 비롯하여 “달 항아리를 비롯한 각종 백자, 백일이나 돌 등 인생의 중요한 통과의례 때 상에 놓이는 백설기, 문방사우에 속하는 화선지와 각종 빛깔의 한지”10)
 등등이다. 그러나 한국의 단색화에 반드시 백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김기린의 경우에 보듯이 검정색이나 청색, 노랑색, 빨강색, 녹색 등 오방색이 있으며 다갈색의 흙벽을 연상시키는 하종현의 배압법에 의한 단색화도 있다. 

Ⅳ.
 서양의 관점에서 보면 뒤늦게 나타난 한국의 단색화가 신기할 수도 있고 또 엉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2세대의 단색화 작가들이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 후기산업사회에 어울리는 재료를 사용하여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 시점에서 왜 서양에서는 끝난 미니멀리즘이 한국에서는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지며 각기 다른 회화적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을 단지 호기심의 차원, 혹은 진부한 용어이긴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에 이어 국제갤러리의 노력에 의해 최근 단색화가 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이 점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으로 열린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의 카탈로그 서문에 단색화를 ‘Korean Monochrome Painting’이 아닌 ‘Dansaekhwa’로 표기하기로 결심한 이유도 우리의 것은 우리의 그릇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것을 중성적인 의미를 지닌 'Monochrome'이라는 말로 표기하면 차별성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글로벌한 차원에서 이름을 얻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상호 접촉을 통해 의견을 나누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욱 풍성한 인류 문화 자원을 공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시켜 볼 때, 단색화에 대한 논의가 일회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면 우리는 생산적인 논의를 통해 단색화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을 만들어 나가게 될 것이다. 많은 서구의 미술관계자들이 한국의 단색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다양한 SNS 매체가 존재하는 현재의 문명적 상황에서 편협한 민족적 내셔널리즘이나 국수주의적 사고는 필요치 않다. 세계는 다양한 꽃이 어우러진 화단처럼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고 또 그럴 때 고유의 가치를 지닌 문화가 빛을 발한다. 지금 여기서 모더니즘이 종언을 고했느냐 혹은 대안적 모더니즘이 존재하느냐 하는 논의는 적당치 않다고 본다. IT산업이 발달한 한국사회에도 전근대(Pre-modern), 근대(Modern), 후기근대(Post-modern) 양상이 혼재한다. 단색화를 둘러싸고 보다 열린 시각에서의 논의가 필요하다. 



1)원제는 ‘Dansaekhwa : The Traces of Four Artists’, L.A 컨벤션센터, 2016. 1. 26-31, 초대작가 : 김형대, 안영일, 유병훈, 이승조, 큐레이터 : 윤진섭 
2)[Dansaekhwa and Minimalism]전, Blum & Poe gallery, 2016. 1. 16-3. 12. 초대작가: 권영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하종현,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칼 안드레(Carl Andre),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 로버트 어윈(Robert Erwin), 로버트 만골드(Robert Mangold), 로버트 라이만(Robert Ryman), 솔 르윗(Sol Lewitt). 
   [Dansaekhwa]전. 케르게넥미술관(Domaine de Kerguéhennec), 프랑스, 2016. 3. 6-6. 5, 초대작가: 최병소, 정창섭, 정상화, 하종현, 이동엽, 이강소, 박서보, 윤형근(도록 기재 順) 
  [Origin]전, 페로탱갤러리, 프랑스 파리, 2016. 1. 9-2. 27. 초대작가 : 서승원, 이승조, 최명영, 큐레이터 : 박서보. 
  [When Process becomes Form : Dansaekhwa and Korean Abstraction in the 1970's and 1980's, Boghossian Foundation, Brussels, Feb 20-April 24, 2016. 
   [Forming Nature : Dansaekhwa Korean Abstract Art]전, 홍콩 크리스티, 2015. 11. 6-12. 17
3)그 중 대표적인 신문 및 잡지 기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Frieze, feature-20 Feb 2015, Skin & Surface.
   Art Ladars, What is Dansaekhwa, 2015. 2. 1 
   Huffingtonpost, Dansaekhwa, The Korean Minimalist Painting Movement Sweeping the Globe, 2016. 1. 22
   Wall Street International, Chung Chang Sup, Meditation, 2015. 8. 1
   La Gazette Drouot, Le mouvement Dansaekhwa, 2016. 4월호. 

4)70년대 단색화 운동의 중심인물인 박서보는 70년대 초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미협(한국미술협회의 약칭)의 국제담당 부이사장(1970-77)과 이사장(1977-80)의 직함을 이용, 국제전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미협의 막강한 조직력을 등에 업은 그는 1972년에 무심사 전시회인 [앙데팡당]전을, 1975년에는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 드 서울]등 실험미술 계열의 대규모 전시회를 연이어 창설했다. 단색화의 주 무대가 된 이 전시회들은 당시 전위내지는 실험미술 계열의 작가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던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상파울루비엔날레, 인도트리엔날레, 카뉴현대미술제 등 세계 유수의 국제전 참가 작가들을 선정하는 중요한 장(場)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작가가 되기 위한 주 등용문인 국전의 위세가 사그라들기 전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초반에 박서보가 미협을 장악하면서부터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급증, 언론도 힘이 쇠약해진 국전보다는 해외 국제전 쪽으로 점차 보도의 방향을 바꿔가고 있었다.

윤진섭, <정신성, 촉각성, 행위성>, 한국의 단색화, 국제갤러리 도록 서문, 2014. 

5)윤진섭, <이우환과의 대화>,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단색화]전 도록 34

6)오광수, <단색화와 한국 현대미술>,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의 단색화]전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21쪽. 

7)나카하라 유스케,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 서문. 

8)윤진섭, <마음의 풍경>, [한국의 단색화]전 도록 서문, 2012, 국립현대미술관 

9)이 ‘흰옷’과 함께 또 하나의 한국적 특질이랄 수 있는 ‘고요’는 모두 외국인이 바라본 한국의 인상이란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말하자면 타자적 시선인 것이다. 타자적 시선이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윤진섭, <마음의 풍경>, 앞의 책

10)윤진섭, <마음의 풍경>, 9쪽. 



참고문헌
윤진섭, <마음의 풍경>, [한국의 단색화]전 도록, 국립현대미술관, 2012
윤진섭, <정신성, 촉각성, 행위성>, [단색화의 예술]전 도록, 국제갤러리, 2014
윤진섭, <1970년대 한국 단색화의 태종과 전개>, 서진수 편저,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 마로니에북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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