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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투사(投射)로서의 그림

윤진섭

  삶의 투사(投射)로서의 그림 

                                                       윤진섭(미술평론가)

 김령의 작업실 책상 위에는 색깔별로 각양각색의 작은 구슬(bead)이 담긴 종이컵들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어림짐작으로 봐도 수백 개는 될 듯 싶은 그것들은 색깔별로 잘 분류돼 있어서, 가령 청색조면 코발트 블루에서 군청색까지 다양한 색상을 구사할 수가 있어 물감의 대용으로 쓰인다. 이 비드가 바로 그림을 그릴 때 김령이 사용하는 주재료이다. 그는 물감이 아닌 이 산업재(産業材)를 사용하여 독특한 질감의 효과를 낸다. 그러니까 그의 작업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수공(手工)에 의존하여 이루어지는 셈이다. 속도가 생명인 이 디지털의 시대에 일일이 손으로 캔버스를 메우는 이 ‘느림의 미학’이라니. 그러나 0과 1의 숫자배열에 의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는 디지털 시간관과는 달리, 마음대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 시간관은 인간의 상념을 주체적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노동에서 오는 인간 소외로부터 벗어나 있다. 
 꽃을 소재로 한 김령의 작품들이 십대에서 시작해 60대 후반에 달한 현재에 이르기까지 십년 단위의 각 단계마다 짙은 감정이입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작가적 상념과 관계가 있다. 김령은 자신이 제작한 작품들을 가리키며 “이 그림은 십대 때의 나, 저 그림은 이십대 때의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1백호에 달하는 커다란 캔버스 속에는 오로지 꽃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꽃들이 바로 자신이라고? 그러나 작품이 작가적 삶의 분비물이자 응축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십분 인정한다면, 작가의 그러한 진술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한국 여인의 평균적인 삶을 훨씬 웃도는, 남 다른 삶의 이력을 지닌 김령으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작품을 바라본다. 그의 그림들은 60년대부터 시작해 2010년대의 허리를 지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의 굴곡진 인생을 회상하며 그리는 일종의 회고록과도 같다. 그는 비드를 캔버스에 부착할 때 마치 한 땀 한 땀 십자수를 놓듯이, 거기에 맞는 색을 고른다. 그러한 행위는 신인상주의 화가 폴 시냑이 순색을 얻기 위해 파렛트에서 물감을 혼합하지 않고 점묘를 한 행위와도 닮았다. 시냑이 행한 이 감색혼합(減色混合)의 원리는 물감의 혼합에 의존하지 않고 관객의 순수한 시각적 혼합에 의존하는 새로운 기법이었다. 
 김령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호흡과 노동의 의미이다. 비드를 미디엄이 칠해진 캔버스 위에 부착할 때, 거기에 투여되는 엄청난 양의 노동은 곧 삶의 성실한 자세와도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석공이 축성(築城)을 할 때 하나의 돌을 정성을 다해 다듬는 것처럼, 개개의 비드는 인생이라는 성의 원자(原子)인 것이다. 김령이 작업에 기울이는 그러한 공력은 마치 조선의 여인들이 바느질을 할 때 느끼는 심정을 연상시킨다. 그처럼 장시간에 걸친 노동을 통해 화면에는 시간이 갈수록 꽃의 형태가 드러나게 되고 점차 색의 계조(gradation)를 갖추면서 입체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꽃을 소재로 한 김령의 그림에서 입체감이 주된 요소는 아니다. 입체감은 단지 사물의 형태를 부각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 오히려 평면적인 느낌이 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평면적인 느낌은 붓의 예리한 선묘에 의한 사물의 테두리가 존재하지 않는데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비드라고 하는 사물이 갖는 ‘사물성’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디엄과 뒤섞이는 바람에 약간 채도가 떨어져 보이는 비드들은 마치 따뜻한 열에 녹은 설탕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사물과 사물과의 경계가 느슨한 상태는 그만큼 부드러운 효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김령의 작품은 꽃 자체의 이미지 보다는 가령 커다란 꽃잎이라든가 줄기, 잎사귀와 같은, 꽃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구획이 느슨함으로써 특정한 부분을 확대해서 볼 때 마치 축축한 대지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대부분의 작품이 꽃의 구체적인 형태와 색깔을 드러냄으로써 구체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나, 화사한 꽃이라기보다는 축축한 대지, 곧 모성성이 더 부각되고 있다. 삶의 무수한 주름에서 오는 어떤 슬픔과도 같은 느낌, 그 애조를 띤 정조(情調)의 내음이 맡아질 때가 있다. 꽃의 표현에서 음영으로 나타나는 이 색의 구슬픈 느낌은 그러나 어떤 작품에서는 화사함으로 반전되기도 한다. 이때 그 이율배반은 곧 삶의 이율배반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인 김지하의 표현을 빌면 회로애락을 통해 얻어진 삶의 어떤 그늘과도 상통하는 것일진대, 그 그늘을 보편적인 지평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표현술이 필요한 듯도 싶다. 가령 꽃의 구체성을 줄이는 반면 추상성을 강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령은 오랜 세월 인체 크로키에 몰입해 왔다. 빠른 순간에 대상의 특징을 포착하여 화면에 옮기는 크로키는 그 만큼 뛰어난 순발력과 관찰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김령은 대상의 묘사라든지. 화면 구성, 색채의 구사에서 노련미를 보여준다. 
 <환타지아-오늘을 여는 소리>(4m x1.2m, 2008)는 대작이다. 격자 형태의 장방형 캔버스에 가지각색의 장미꽃을 가득 채운 이 작품은 김령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은 구성적인 면에서나 색의 조화, 배열에 이르기까지 다년 간 꽃을 그려온 김령의 전 역량이 실려 있다. 각양각색의 장미꽃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화면에 공존하고 있다. 그 공존은 색들의 조화와 형태의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통해 나온다. 이것은 크고 작은 꽃들의 조화, 푸른색과 붉은색, 베이지, 핑크 등 다양한 색채의 조화가 커다란 울림을 낳는 작품이다. 
 그와 더불어 정방형의 작은 캔버스 연작으로 이루어진 작품(새로운 빛-인생을 담다, 2008)은 꽃의 다양한 표정에 주목한 그림이다. 이 연작은 꽃의 표현에 있어서 구상과 반구상, 추상등 다양한 기법적 구사를 통해 대상의 본질을 묻고자 한 작품이다. 이제 삶의 한 축도이자 상징으로서의 꽃은 김령에게 있어서 하나의 화두가 아닐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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