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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와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화

윤진섭

다원주의와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화 

                                    윤진섭(미술평론가)

 기댈 전통이 없다는 사실은 결국 '모태 컴플렉스'에 시달리게 하는 요인이다. 전통의 뿌리가 없다는 것, 그것은 반대급부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갈증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경우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마치 신원을 모르는 고아가 스스로 출생증명서를 만드는 것처럼 힘겹고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윤진섭, <상파울루비엔날레에 관한 소고(小考)>(국립현대미술관 논문집) 중에서

Ⅰ. 한국의 현대미술은 지금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제자백가(諸子百家)’처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용과 형식의 양면에서 자유분방하게 외국의 미술 사조를 받아들이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전통을 현대화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개방적이되 균형감각을 잊지 않는다. 외국의 미술 사조를 받아들인 일은, 1980년대 초반 이전에는 주로 미술잡지를 비롯한 서적에 의존했으나, 그 이후에는 정부의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인해 현장 중심적으로 변해갔다. 80년대 초반에 미국과 유럽 등 외국의 미술대학에 진학한 세대들이 귀국하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아 현재 화단의 중추세력으로 성장했다. 
 현재 한국 화단의 원로 세대인 ‘단색화(Dansaekhwa:Korean Monochrome Painting)’ 작가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한국 최초의 전위작가들이다. 이들은 1950년대 후반, 혈기가 왕성한 청년시절에 ‘앵포르멜(非定形, Informel)’이라고 하는, 유럽에 본거를 둔 서구의 사조를 받아들여 토착화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가난하고 헐벗은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황폐한 내면의 세계를 체험으로 육화(肉化)시켜 추상적으로 그려냈다. 그들은 청계천 상가에서 구한 값싼 안료를 린시드 기름에 개서 물감을 만들고, 헌 천막을 구해 캔버스를 만든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값 비싼 외제물감은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공업용 페인트와 직접 제조한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으니 캔버스가 자연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후반의 앵포르멜 작품은 극히 몇몇을 제외하고는 현존하지 않는다. 가난한 화가들은 잦은 이사 때문에 많은 양의 작품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 앵포르멜의 대표작가인 박서보(朴栖甫)의 당시 사진을 보면 1천호가 넘는 대형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보인다. 공업용 페인트와 직접 제조한 값싼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으니 겁 없이 마구 뿌리고 던지던 시절이었다. 
 박서보(朴栖甫), 정창섭(丁昌燮), 권영우(權寧禹), 정상화(鄭相和), 윤형근(尹亨根), 하종현(河鍾賢) 등 앵포르멜 작가들은 1970년대에 들어서 단색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1960년대 중반, 앵포르멜이 쇠잔한 틈을 타 화단으로 진입한 [청년작가연립전](‘무’, ‘신전’, ‘오리진(Origin)’ 동인의 연합전) 세대에게 전위의 일선을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작가연립전]이 열린 1967년은 군사정권에 의해 한창 산업화(産業化)가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바캉스’라는 말이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리던 이 시절에 해프닝을 비롯하여 팝, 네오다다(Neo Dada), 오브제, 설치 등등 해외의 최신 경향이 이들에 의해 시도된 것이다. 김구림(金丘林), 강국진(姜國鎭), 정찬승(鄭燦昇), 정강자(鄭江子) 등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에 해프닝에 몰두하며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김구림에 의해 주도된 <제4집단>은 비단 미술뿐만 아니라 연극, 음악, 의상 등 토탈아트 지향의 예술운동이었다. 한편, 1958년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이승택은 60년대 초반 이후 연기, 불, 바람 등 무체(無體)를 이용한 실험작업에 몰두하여 독자적인 전위예술의 세계를 확립하였다. 

Ⅱ. 단색화 작가들이 단색의 세계에 몰입해 있던 1970년대는 군사정권에 의해 정국이 얼어붙은 엄혹한 시절이었다. 단색화 작가들은 단색의 반복된 행위를 통해 부정의 정신을 드러냈다. 정신성, 촉각성(물성), 수행성(행위)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단색화는 시각중심적인 서구의 미니멀 아트와는 근본적인 면에서 다르다. 그것은 서구의 미니멀 아트와는 달리 촉각중심적이며 대지적이다.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선비(Sunbi) 정신의 소산인 한국의 단색화는 몸을 통한 수행적 성격을 띤다. 반복은 이의 근간으로 동일한 행위의 무수한 반복을 통해 물성(物性)이 드러난다. 
 한편, 이 시기에 화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단색화 세대에 대한 반발이 정국과 맞물려 일어났으니 그것을 가리켜 ‘민중미술(Min Joong Art/People's Art)’이라고 부른다. <현실과 발언> 그룹의 결성은 민중미술의 신호탄이었다. 1979년, 오윤(吳潤),  손장섭(孫壯燮), 김정헌(金正憲) 등 작가들은 성완경(成完慶,), 원동석(元東錫), 윤범모(尹凡牟), 최민(崔旻) 등 미술평론가들과 함께 그룹을 결성하고 전시회를 열었으나 미술회관 운영위원회 측의 일방적인 대관취소로 인해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전시장에 전기가 끊기자 이들은 촛불을 켜고 전시회 오프닝을 치루는 초유의 사태를 연출했다.  
 1970년대, 단색화 1세대 작가들, 그 중에서도 특히 박서보의 한국미술협회(Korea Fine Art Association) 국제 부이사장과 연 이은 이사장 진출은 [앙데팡당], [에꼴드서울], [서울현대미술제] 등의 대형 전시의 창설과 관련이 깊은데, 이를 통해 단색화 운동이 확산되기에 이른다. 박서보는 당시에 일본 모노하(Monoha/物派)의 주요 이론가이자 작가로 떠오른 이우환(李禹煥)과 깊은 친분을 유지하면서 대형 순회 전시를 통해 일본에 한국의 단색화를 알리는 일에 주력했다. 당시 한국화단에 미친 이우환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70년대 초반에는 하종현이 주도하는 [A.G] 그룹과 이건용(李健鏞)이 주도하는 [S.T] 그룹이 결성되어 전위 활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개념미술과 오브제, 설치에 주력을 하였으며 선언문과 기관지 발행을 통해 전위적 입장을 확고히 했다. 이 당시 이벤트(Event)라 부르는 행위미술이 이건용, 성능경(性能慶), 김용민(金容民), 장석원(張錫元), 강용대(姜龍大) 등에 의해 활발히 전개되었다.  
 거칠게 요약하면,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는 1950년대의 앵포르멜 세대의 등장과 1960대 후반에 등장한 [청년작가연립전] 세대의 탈(脫) 평면 지향, 70년대의 [A.G]와 [S.T], [신체제] 등 전위 그룹의 등장, 1970년대 단색화 운동, 즉 앵포르멜 세대의 재부상(再浮上), 80년대 초반의 [현실과 발언]으로 대변되는 민중미술의 대두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1987년의 민주화 선언은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볼 때 커다란 분기점에 해당한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현대사를 점유한 긴 군부통치 기간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특히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국 유입은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다원주의(Pluralism)가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속칭 ‘압구정 문화’로 대변되는 고도 소비사회의 양상은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확산된 포스트모던 건축물과 함께 미술에서는 1987년에 최정화(崔正化), 이불(李昢) 등에 의해 결성된 [뮤지엄] 그룹에 나타났다. 신세대 미술의 원조격인 이들의 활동은 김형태(金亨泰) 등의 [Sub Club]으로 이어지면서 숱한 후속 신세대 그룹의 등장으로 연결되기에 이른다. 

Ⅲ. 이번에 대만의 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K-P.O.P : Process, Otherness, Play]전은 80년대 후반이후 한국 현대미술에 등장한 다양한 미술경향을 보여준다. 이수경, 박승모, 이기봉, 한효석, 강이연, 이경호, 권오상, 김기라, 최영욱, 정진용, 홍지윤, 김창겸, 이경미, 차명희, 김수자, 정수진, 김홍석, 정연두 등 18인의 작가들은 회화를 비롯하여 조각, 오브제, 설치, 미디어아트, 퍼포먼스 등 독자적이면서도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인 ‘K-P.O.P’은 문자 그대로의 팝(POP) 아트가 아니다. 그것은 퍼포먼스처럼 ‘과정(process)’이 중시되는 현대미술의 특징과 이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타자(Otherness)’,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가 문화의 요체로 본 ‘놀이(Play)’ 등 3개의 키워드를 뽑아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과 양상을 보여주고자 구상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가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대변한다고 단언할 수 없으나 대략적인 흐름은 보여줄 수 있다고 자부한다. 이번 전시에 선정된 18명의 작가들은 다같이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 정상급의 예술가이다. 이들의 세계를 장르별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회화 : 한효석, 최영욱, 정진용, 홍지윤, 이경미, 차명희, 정수진
조각 : 박승모, 이수경, 권오상, 김홍석
미디어 아트 : 강이연, 이경호, 김기라, 이기봉, 김창겸, 김수자, 정연두
 그러나 한편으로 볼 때 이러한 장르상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그 이유는 모든 작가가 엄격히 한 범주에 속하지 않고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김수자, 정연두, 김홍석, 홍지윤은 퍼포먼스와 미디어 아트에도 속하며 한효석은 회화 외에도 극사실적이며 즉물적인 조각을 병행하는가 하면, 이수경은 경면주사를 이용한 드로잉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김기라와 이기봉 역시 회화에도 주력하고 있어 한 마디로 이들의 활동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대부분의 작가들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미술의 국제화 붐을 타고 국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국 미술계에서 국제화란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창설과 맞물리는데, 김영삼 정부 시절인 무렵 한국의 약진을 가리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한국을 특집으로 삼고 표지에 ‘한국인들이 몰려온다’고 썼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은 홍콩, 대만,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면서 경제적인 도약을 하던 때였다. 70년대의 베트남 전쟁과 80년대의 중동 특수(特需)로 인해 부가 축적되었고 해외 수출은 호조를 보였다. 1995년은 한국미술 발전의 분수령을 이루는 해였다. 광주비엔날레의 창설, 베니스비엔날레에 국가관 개관, ‘미술의 해’ 지정 등 미술 발전을 촉진하는 쾌거가 잇달았다. 아시아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 광주비엔날레의 창설을 전후하여 타이페이비엔날레, 샹하이비엔날레, 싱가포르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요코하마트리엔날레 등등 많은 비엔날레가 창설된 것은 아시아 미술의 국제화를 촉진시킨 주요인이다. 비엔날레와 아트페어, 옥션의 활성화는 아시아 미술의 국제화에 기여를 하였지만 거대 자본의 미술시장 유입에 따른 상업화는 작가주의 정신의 퇴조를 가져왔다. 아방가르드의 전사(戰士)인 작가들이 상업주의에 매몰되는 순간, 세계에 대한 파수꾼으로서 작가의 역할은 끝난다. 작가들에 의한 전위 그룹의 결성과 선언문, 기관지의 발행은 인류 정신의 보루를 지키려고 하는 몸부림이다. 상업주의는 이런 작가들의 몸부림을 무력화시킨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18인의 작가들은 모두 작가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지닌 이들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융합하면서 예민한 촉수를 뻗어나가고 있다. 이들의 작품이 보여주는 독창적인 예술적 아우라를 통해 대만의 관객들이 한국 현대미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타이페이 현대미술관 K-P.O.P전 도록 서문>

글쓴이 윤진섭은 1955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제1,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전시총감독,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서울국제퍼포먼스페스티벌(SIPAF) 조직위원장 겸 총감독, 포천아시아미술제 조직위원장 겸 전시총감독,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총감독,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의 단색화]전 초빙 큐레이터,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과 호남대 교수,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몸의 언어>,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행위예술의 이론과 현장>, <글로벌리즘과 한국 현대미술>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Yoon, Jin Sup was born in Cheonan of Chungcheong province in 1955. He holds B.A. in the Western painting and has M.A. in Aesthetics at Hongik University. He received a doctorate in Philosophy at University of Western Sydney in Australia. He was appointed as curator of the 1st and 3rd Gwangju Biennale Special Exhibition, general artistic director of the 3rd international Media Art Biennale of Seoul, commissioner of Sao-paulo Biennale, committee head -cum-general artistic director of Pocheon Asian Art Festival, general artistic director of Geumgang Nature Art Biennale, guest curator of [Dansaekhwa:Korean Monochrome Painting] hosted by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president of Korean Art Critics Association. He is currently vice president of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Art Critics (AICA) AND professor at Honam Univ. and honorary professor at Sydney Univ. He published many books such as <Body Speaks>, <Performance Art, its theory and art scene>, <A study of Korean Modernism>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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