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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ing!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윤진섭

 Rolling!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대만은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우방국으로서 오랜 기간 친교를 맺어왔으나 양국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1992년 단교 조치가 내려지면서부터였다. 중국 본토와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비롯된 일련의 정치적 사태는 문화예술에도 파장을 미치면서 이후 원만한 교류를 어렵게 만들었다. 미술의 경우, 양국의 교류는 70년대의 활성적 시기를 거쳐 90년대에 침체기를 겪은 후 2000년대에 접어들어 겨우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복합어 복화술-대만현대미술전](광주시립미술관/2010), [대만현대미술전](경남도립미술관/2010) 등은 최근 몇 년 사이 양국의 국공립미술관이 교류 차원에서 주최한 대규모 전시회들이다. 그 외 단교 이후 민간 차원에서 소규모의 전시회들이 기획되었지만 본격적인 수준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예술을 통한 대만과의 교류가 지닌 의미는 장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동아시아 문화의 포석 내지는 전략과 관계가 깊다. 주지하듯이 해양국가로서 대만은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동남아시아 제국과 한국, 중국, 일본으로 대변되는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문화지형도에서 중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문화연구 내지는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담론의 창출에 있어서 아세안(ASEAN)으로 통칭되는 동남아시아 제국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되 중간지점으로서 대만이 갖는 지정학적 의의를 간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즉,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지정학적으로 동남아시아 제국으로 향하는 도정에 대만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사실 중국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는 화교문화권이 의미하듯이 대만이 포함돼 있는 것이 현실이며, 어느 면에서 그 뿌리는 대만이기 때문이다. 대만이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는 이유는 정치적 의미에서는 물론이요, 문화적 입장에서 살펴봐도 충분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 이후에 증대된 한국과 중국 본토와의 빈번한 문화교류는 그 양에 있어서 대만과는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특히 한중 수교이후 양국 사이의 막대한 무역 규모와 이로 인한 대 중국 의존도는 문화예술의 교류에 있어서조차 상대적으로 대만을 소홀히 대접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바, 이는 아세안을 포함하는 장기적인 입장에서 동아시아의 문화 담론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재고해야 할 측면임에 분명해 보인다.  

Ⅱ.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대만 교류전 대만현대미술(Rolling! Visual Art in Taiwan)]전은 비록 만족할 만한 규모는 아니지만 대만 현대미술의 흐름을 일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시이다. 2012년 국립대만미술관에서 열린 [한화류-한국당대회화]전의 답방 형식으로 열린 이 전시회는 대만 근현대미술의 흐름을 살펴보자는 기획의도 아래 6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작품 약 32점으로 구성돼 있다. 회화, 판화, 조각, 입체, 설치, 영상 등 미술의 전 분야를 망라한 출품작들을 통해 한국의 관객들은 대만 근현대미술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서구 모더니즘의 침윤적 요소와 이로 인한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과 길항 작용은 물론, 다변화된 미의식 등 어찌 보면 한국과 유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동아시아 국가의 일원으로서 대만이 처한 현실이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공감을 자아내고 있다. 일제 강점기(1910-1945)를 겪은 바 있는 한국처럼 대만 역시 일본 식민지 시기(1895-1945)를 겪었으며, 그 결과 유사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공감을 자아내는 한 요인일 것이다. 대만이 일본 식민지시기에 일본을 통해 서양의 미술을 받아들인 것처럼, 한국 역시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필터로 서양의 미술을 이식했다. 말하자면 두 나라 공히 일본을 통해 서양 근대미술을 수입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서양 근대미술의 번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류 논쟁에 휘말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운명론에 대한 반역으로 나타난 일련의 저항 운동이 한국의 민족미술 논의이며 대만의 중국 수묵화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한국에서의 민중 민족미술 운동이 서구화가 깊숙이 진행된 70년대의 군부통치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반면, 대만의 그것은 국민정부가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밀려들어온 40년대 후반, 본토의 중국 공산당에 대응하기 위한 문화적 전략의 일환으로 국민정부가 예술가들에게 강요했다는 점이 다르다. 이번 전시 도록의 서문을 쓴 챠이 샤오이에 의하면 이 강요된 현실 앞에서 “속박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문제는 당시 이상을 추구하던 청년 예술가들의 공통된 과제”였다고 하는데, 이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대 초반, 미국이 대만에 주둔하면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유입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앵포르멜로 대변되는 한국 현대미술의 50년대 풍경처럼, 대만 역시 50년대 후반에 ‘동방화회’, ‘오월화회’, ‘현대판화회’가 발족되면서 현대회화 운동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것이다. 
 근대 초기에 일본을 필터로 서양 근대미술의 유입이 이루어진 한국과 대만의 공통된 역사적 조건은 50년대 초반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미국을 필터로 한 서구 추상회화의 유입이 양국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근친적 결과를 낳았다. 1957년 경 한국의 ‘현대미술가협회’에 의한 앵포르멜의 수용과 같은 해에 이루어진 대만 미술의 현대화 운동은 다 같이 전위운동이란 점에서 친연성을 갖는다. 예술의 새로운 형식에 대한 추구와 전통 형식에 대한 타파 의지는 전위의 외피를 입고 독창성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이는 추상 형식을 선호하되 서양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즉 동양의 문화적 전통에 뿌리를 둔 독창적인 것이 돼야 한다는 당위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한국에서 이런 경향은 70년대에 커다란 물결을 이룬 ‘단색화(Dansaekhwa)’운동으로 표면화된 바 있다. 

Ⅲ. 
 리중셩(1912-1984)이 이끈 ‘동방화회’의 창립 회원인 샤양(1932-  )과 주웨이바이(1929-  ) 등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듯이, 전통적인 수묵화의 필법을 사용하면서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탐색으로 나아가는 태도(주웨이바이)는 미니멀리즘 추상화들이 걸린 화이트 큐브 전시장을 암시한 상황 설정에 기(氣)를 발산하는 인물들을 다수 배치한 작품(샤양)에 나타난 태도와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 대만 현대회화 운동의 1세대인 이 작가들은 서양의 현대회화 개념에 대한 중국식 대응의 방편으로 중국의 회화사 내지는 인문적 토양에서 숙성된 필법을 구사하고 있다. 비록 드러내 놓고 의도적인 것은 아니되 전통에 기대는 이러한 방법론은 50대 초반의 중견에 속하는 허우쥔밍(1963-  )의 고서의 차용과 금기에 대한 도전으로, 장용춘(1957-  )의 ‘수묵변법 시리즈’를 통한, 중국의 전통적 두루마리 형식을 차용하여 발묵법을 실험하는 순수한 형식 실험으로, 예주성(1946-   )의 기운생동한 붓질과 재료의 고유한 텍스춰의 결합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글로벌리즘으로 인한 다문화주의의 팽배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입으로 인한 다원주의 대두는 대만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특히 개인주의와 함께 나날이 원자화돼 가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작가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은 궈웨이궈(1960-  )의 자화상을 통해 엿볼 수 있으며, 황진허(1956-  )의 통속적 하위문화를 해학적으로 묘사한 인물을 통해 통렬히 풍자하고 있는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다. 대만 비디오 아트의 전위적인 인물인 위안광밍(1965-  )은 자신의 집과 주변 풍경을 소재로 한 파노라마적 영상을 통해 개인의 기억과 현재, 미래를 둘러싼 시간의 추이를 보여주고 있다. 

Ⅳ. 
 천제런(1960-  )이 장편 비디오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계엄령 시기에 발생한 정치범 재판 및 구금과 관련된 것이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출품된 우톈장(1956-  )의 사회비판적인 작품과 함께 체제에 대한 저항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 두 작가는 다 같이 사회 제도와 정치체제가 개인에게 남긴 상처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전자는 사실적인 묘사를 통한 허구의 세계, 후자는 과격한 표현주의적 화풍을 통한 환상의 세계라는 점이 다를 뿐, 대만의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상을 다루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1945년 이후의 근현대미술사를 일별할 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비단 한국이나 대만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 제국의 미술 역시 내용 면에서 대동소이할 줄 믿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동아시아 제국은 근대국가의 형성과정이나 민족 개념에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유사한 운명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차제에 이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서양의 근대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동아시아 제국의 문화적 동질성과 이질성에 대한 보다 섬세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아트 인 컬처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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