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재료의 물성과 표정들

윤진섭

재료의 물성과 표정들


윤진섭(미술평론가)

 

현대 회화에서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탐색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이제는 그림의 내용보다는 색다른 재료의 개발이 주목 받는 작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관건이 될 만큼 재료의 문제가 작가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래서 문제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사이즈다라는 유명한 문장이 있듯이, 이제는 문제는 그림의 내용이 아니라 재료다라는 말이 탄생할 듯도 싶다.

 

제작 과정 자체를 즐기는 아날로그적 방식

주지하듯이 현대미술에서 새로운 것(novelty)’의 등장은 개념미술의 등장과 궤를 같이 한다. 작가들이 너나없이 남이 하지 않은 새로운 것, 마치 실용신안 특허와도 같이 신기한 것에 탐닉하여 화단에 충격파를 던지는 일을 일삼는 상황이 전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개념미술의 영향은 회화는 물론 입체, 설치, 퍼포먼스, 그리고 미디어아트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미쳐 사물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이끌어내고 있다. 따라서 현대미술에 있어서 개념주의는 아직도 유효하며, 단지 그것이 하나의 트렌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깊숙이 내재된 중심의 핵으로서 지속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하나의 중심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소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성희 재조명>전은 현대미술의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캔버스천 붓 물감 나팔 새장 등등 주변에서 흔히 보는 오브제나 회화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회화에 대한 자신의 개념적 성찰의 결과를 다각적인 방법으로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는 재료의 특성에 대한 깊은 탐구를 바탕으로 회화의 개념, 즉 그린다는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연관돼 있다. 그가 수작업으로 많은 공을 들여서 제작한 캔버스 작업은 그러한 성찰에 대한 결과물이다.

실상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디지털 베이스의 기술 환경 속에서 그처럼 천천히 아날로그 방식의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경이일 수 있겠다. 그것은 만드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캔버스의 천을 자르고, 꼬고, 거기에 다른 천을 덧대어 또 꼬는, 그 숱하게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과연 그는 어떤 상념에 젖었을까.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또 한 사람의 노동집약적인 유형의 작가 전광영은 또 어떤가. 삼각형의 스티로폼을 한지로 싸고 그것을 역시 한지로 꼰 노끈으로 감는 작업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공교롭게도 60대에 해당하는 이 두 사람은 개념미술이 기승을 부리던 197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한복판을 통과한 경험이 있는 작가들이다. 당시 신성희는 마대 천위에 마대의 올을 일일이 그리는 동어반복적인 작업에 주력했으며, 전광영은 푸른색의 기둥과도 같은 이미지를 캔버스에 그리는 추상 작업으로 화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1960년대 후반에 전광영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신성희는 1980년에 파리에 정착했다. 이 두 작가의 공통점 가운데 또 하나는 먼 이국땅에서 조국의 화단을 지켜봤다는 점이다. 전광영은 1970년대 후반에 귀국, 국내 화단에 합류했으나, 신성희는 그 이후 계속해서 파리에 체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성희, 회화의 본질을 묻다

소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성희의 전시는 재조명이라는 명칭에 걸맞듯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는 작업의 대강을 소개하고 있어서 근 40여년에 이르는 이 작가의 작업 과정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도록 배열돼 있다. ‘재조명이란 원래 충분한 역량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나 그동안 간과돼 온 작가에 대해 미술관 측이 배려할 수 있는 최고의 헌정일 것이다. 그만큼 작가의 입장에서는 영광스러울 수밖에 없는 자리다. 신성희는 그 명칭에 손색이 없는 작품들로 그 헌정에 보답했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신성희가 던지는 화두는 회화란 무엇인가?”이다. 그것은 회화의 본질과 개념을 향한 작가 나름의 끈질긴 질문으로 점철된다. 캔버스의 안과 밖, 지지체와 캔버스 표면의 관계, 감추어진 그림들과 그것을 야기한 행위, 그리고 그러한 그림들과 행위를 덮고 있는 표면적인 도상과의 관계, 만드는 행위와 결과로서의 이미지 등등 그가 다양한 표현 매체 내지는 재료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역시 회화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으로 수렴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가 1970년대에 동어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묻고자 했던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한 작가에게 있어서 정작 좋은 작품은 7점 정도에 불과하다는 마르셀 뒤샹의 발언처럼, 개념이 중시되는 신성희의 작업을 놓고 볼 때, 그가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미술사가 선례의 역사라고 할 때, 가령 그가 보여주고 있는 공간의 개념이 루치오 폰타나를 넘어서고 있는가, 또는 그가 수십 개의 붓을 집적했을 때 그 개념이 아르망을 초월했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유형의 작업보다는 오히려 트럼펫을 집적된 작고 얇은 각목들 속에 넣은 작품이나, 숱한 그림들을 쌓아놓고 그 위를 흰 종이로 덮은 다음 가위의 형상으로 도려낸 작품들이 보다 독창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캔버스 작품들 중에서 몇몇은 개념 이전에 매우 감동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것들이 있어서 그의 회화적 역량을 다시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전광영의 한지 작업, 국제적 브랜드 창출

더컬럼스갤러리에서는 여러 차례의 검증을 통해 이제는 국제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전광영의 근작들을 소개하고 있다. 수많은 삼각형 단위들의 집적으로 이루어진 그의 <집합(Aggregation)> 연작은 작품의 완성을 위해 기울이는 노동의 강도나 그 결과가 주는 시각적 충격으로 인하여 늘 화제를 몰고 다닌다. 그러나 가령, “100호 정도의 캔버스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7천개의 삼각형이 필요하다는 식의 매스컴 보도는 작품이 지닌 의미와는 별 관계가 없이 선정적일 뿐이다. 사실 어쩌면 그의 작업의 진정한 의미는 작품의 크기나 그것이 보여주는 스펙터클한 양태와는 무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업의 진정한 의미는 그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작업의 전 과정을 통해 어떤 개념적 변천을 이루어 왔는가, 그리고 그것은 장차 어떤 방향을 향해 전개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번 더컬럼스갤러리의 전시가 이전 전시의 연장에 불과해 보였던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작업의 새로운 국면의 제시에 대한 작가적 고민이 읽히지 않았던 것도 못내 아쉬웠다. 사실 전광영은 아트페어보다는 비엔날레와 같은 보다 넓은 국제 무대의 진출을 위해 작업에 내재된 개념의 날을 더욱 예리하게 갈아야 할 작가다. 이는 그가 이제까지 시도했던 다양한 방법론들, 가령 입체라든가 대규모의 설치 작업을 놓고 볼 때 더욱 그렇다. 그런 진취적인 의식을 지닌 작가가 비슷한 유형의 작품들을 반복 재생산한다는 것은 그의 작품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광영의 한지 작업은 국제적인 브랜드 창출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한지가 지닌 물성적 특질의 현시와 함께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독창적으로 조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한지 작업은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화 내지는 국제화에 따른 문화 전략, 즉 브랜드화에 있어서 훌륭한 모델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이 지닌 심미적 세련미, 특유의 천연 염료가 발하는 그윽한 색의 맛과 삼각형 단위체들의 집합에서 오는 시각적 내지는 조형적 아름다움 등등은 이를 위한 가장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그가 상업주의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이유다.

 

<아트 인 컬처 200910월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