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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 대한 스케치 혹은 모호한 것들에 대하여

윤진섭

 불안에 대한 스케치 혹은 모호한 것들에 대하여

                             윤진섭(미술평론가)

 미술대학 학부시절, 동양화를 전공한 이이내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개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순지 위에 수묵채색으로 그린 이 시기 그의 그림은 세필로 개의 터럭을 한 올 한 올 그릴 정도로 극사실적인 화풍을 띠었다. 2007년부터 수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이 시기의 그림은, 그러나 소위 서양화에서 나타난 극사실주의(hyper-realism)라기 보다는 동양화의 장르 가운데 하나인 영모(새와 동물을 그린 그림)의 오랜 전통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이내의 그림이 조선조 후기에 영모화로 유명한 김득신이나 변상벽처럼 전통의 틀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과감히 그 틀을 깨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개의 겉모습을 거의 사진에 가까울 정도로 핍진(逼眞)하게 그렸음은 물론, 개의 몸 일부에 빨간 채색을 가함으로써 초현실적인 소외(낯설음)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이내의 개를 소재로 한 일련의 그림들은 매우 신선해 보이며, 개의 눈에 전신(傳神)의 기운을 불어넣음으로써 보는 자로 하여금 강렬한 인상을 받게 한다. 마치 사대부를 그린 조선시대 초상화에 있어서 눈의 표현(傳神)이 중요했던 것처럼, 이이내의 개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도 역시 눈의 표정과 붉은 색의 신체 표현은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 상호 연관성을 불안이라고 풀이하면 설득력 있는 해석이 될지도 모르겠다. 훗날 이이내는 개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언어의 문제를 천착하게 되는데, 시(詩)는 그림의 이해를 돕는 하나의 방편 내지는 동반자적 관계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이이내에게 있어서 텍스트를 통해 내면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의 작품의 이해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이 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명확히 구분지을 수 없고, 따라서 명확히 답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 모호함에서 오는 감각은 불안하다.” -이이내, 작업노트 중에서-

 개에서 시선을 거둔 뒤 인간의 문제로 관심을 옮긴 이이내는 한지와 비단위에 먹과 연필을 사용하여 그린 일련의 드로잉 작업을 통해, 마치 유체이탈 기법과도 같은 연속적인 선의 중첩 효과에 주목했다. 시간의 추이에 따른 동작의 연속성을 가는 선 드로잉으로 표현한 것 같은 이 일련의 인체 작업들(<여보게, 나와 술 한 잔 어떠한가>(한지와 비단에 연필, 94x206cm, 2013), <열 불 나>(한지와 비단에 먹, 연필, 104x80cm, 2013)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가는 선의 중첩이다. 역시 이 연작에서도 감은 눈의 표정을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미세한 선의 중첩효과에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중첩된 선들의 리드미컬한 동세가 그 다음에 나타나는 선묘에 의한 텍스트 작업의 근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호화된 악보 혹은 안무를 위한 노트를 연상시키는 이 선 드로잉 연작이 그가 집중하고 있는 근작에 속하는 것들인데, 여기서 그림에 부기(附記)된 시는 이 텍스트를 해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텍스트는 이이내의 퍼포먼스 작품에서 작가로부터 행위에 따른 재량권을 부여받은 행위자들에게 지시가 아닌 능동적 참여를 유도한다. 

 “텍스트가 드로잉으로, 움직임으로 변화하는 과정에는 나의 감정판단이 개입되고, 그것이 퍼포머들의 움직임으로 치환될 때에도 그들 각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개입된다.” -이이내 작업노트 중에서-

 이이내의 작업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상황성에 주목한 결과이다. 그것은 인간의 다양한 삶의 양태와 실존적 본질, 혹은 그것들에서 배태되는 감정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그것이 압축적으로 표기된 것이 바로 그의 텍스트들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안의 감정을 내포한다. 모호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통해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시와 선묘로 표현하고 있는 이이내의 근작들은 모호하지만 명료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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