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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상상력과 전위정신의 회복

윤진섭

물질적 상상력과 전위정신의 회복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주제에 대하여
 2016년, 제3회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주제는 ‘억조창생(億造創生)’이다. “수많은 사물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원래 이 말은 만백성, 즉 나라의 모든 민초(民草)들을 의미했다.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을 보면 임금이 부당한 명령을 내릴 때, 문무백관이 어전에 머리를 조아리며 “전하, 억조창생(億兆蒼生)을 굽어살피소서!”라고 일제히 외치는데, 나는 이 말을 약간 고쳐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로 삼았다. 수많은 사물에 생명을 부여한다! 이 말만큼 현대미술의 상황을 잘 설명해주는 단어가 있을까?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물이 존재한다. 나무, 돌, 풀과 같은 자연물에서부터 책, 가구, 침대와 같은 인공물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주변은 온갖 사물들로 넘쳐난다. 그 사물들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두 우리 자신과 직간접적으로 얽혀있다. 저기 저 침대는 내가 이틀 전에 구입한 것이며, 여기 보이는 이 돌은 내가 어제 산책을 하다가 눈길을 준 적이 있다. 그러니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물건이라도 나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지금 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물건, 가령 영수네 집 거실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작은 책상이 며칠 뒤에는 나의 소유가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사물은 끊임없이 유동하며, 세상을 떠돌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어느 날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창원조각비엔날레는 조각을 다루는 격년제 미술행사이다. 미술의 여러 장르 중에서 조각만큼 ‘만든다’는 인간의 행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물론 공예나 건축도 인간의 창작 행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만, 흙을 비롯하여 나무, 돌, 쇠, 구리, 시멘트 등등 원초적 자연의 질료를 통해 예술적 아이디어를 구현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조각만큼 생생한 것이 없다. 조각가들은 원초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거기에 예술의 혼을 불어넣는다. 따라서 “수많은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조각가들의 행위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데미우르고스의 후예들이다. 플라톤의 저작 ‘티마이오스’ 편에 나오는 이 말은 원래 ‘제작자’를 의미했다. 세계를 창조하는 거인, 즉 데미우르고스는 선성(善性)을 바탕으로 모든 것이 자신을 닮기를 바라면서 무질서와 혼돈에 질서를 부여했다. 그는 영원히 변치않는 이데아를 범본으로 웅혼한 영혼을 지닌 이성적 존재로서의 사물을 창조했다. 그러나 세계가 이미 존재하는 질료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은 데미우르고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에서 창조해 낸(creatio ex nihilo)’ 창조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에서 예술작품을 창조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현대예술의 숙명이다. 따라서 데미우르고스의 후예인 현대의 예술가들은 오직 상상력을 통해 존재하는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뿐이다. 성산아트홀 전시관 전관에서 열린 [오브제-물질적 상상력전]은 말 그대로 오브제를 다루는 작가들을 초대하여 사물의 본성과 그 변용 양상을 살펴볼 목적으로 만든 전시다. 오늘날의 작가들은 사물을 어떻게 다루며, 일상에서 구한 재료를 어떤 방식으로 작품화하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다다(Dada)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오브제가 예술현장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그것은 현대예술의 상황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싶었다. 
 
Ⅱ. 오브제-물질적 상상력
 소리와 동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연예술과는 달리 조형예술은 물질을 바탕으로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각은 구체적인 물질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조각가들은 물질을 매개로 눈앞에 존재하는 사물의 이미지와 상상의 세계를 나타낸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을 피해 스위스의 취리히에 모인 일단의 예술가들은 기상천외한 예술적 도발을 감행하였다. 캬바레 볼테르를 거점으로 ‘반(反)예술’을 주창한 이들은 고대 그리이스의 철학에 기반을 둔 합리주의적 이성이 낳은 ‘근대성(modernity)’의 결과인 전대미문의 전쟁양상에 경악하면서, 전위(avant-garde)의 입장에서 인간의 문제를 돌아볼 것을 주장하였다. 인간성의 상실과 탐욕, 이기주의의 횡포를 목격하고 전율한 이들은 기존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던 가치체계의 혼란을 콜라주를 비롯하여 기성 오브제의 도입, 우연성의 남발과 같은 전복적 예술행위를 통해 풍자하고자 하였다. 뉴욕다다 시절에 마르셀 뒤샹이 제시한 변기(샘(Fountain, 1917)>는 
르네상스 이후 진보주의적 노선을 걸으며 발전돼 온 ‘재현(representation)’의 패러다임을 ‘제시(presentation)’의 패러다임으로 바꾼 역사적 거사였다. 현대미술에서 오브제의 등장으로 인한 미학적 도발은 날로 자장(磁場)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이제 오브제는 회화에서 물감의 사용만큼이나 흔한 재료가 되고 말았다. 특히 70년대 개념미술의 여파로 인해 오늘날 비엔날레를 비롯한 첨단의 미술 전시에서 오브제와 그 연장으로서의 설치는 하나의 패션이 되고 말았다. 본래 재현의 패러다임에 대한 붕괴를 목격하고 이에 대한 풍자로 시작한 오브제의 제시가 하나의 패션으로 둔갑한 현장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다(Dada) 시절의 생생한 온기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가? 전위의 입장에서 볼 때, 오브제는 인간성의 붕괴에 대해 경고음을 발한 다다이스트들의 본연의 목소리를 더 이상 간직하고 있지 않다. 가공할 상업자본주의의 침투로 인한 이기주의의 횡포에 맞서고 있지 못함은 물론, 새로운 대안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오브제-물질적 상상력전]은 오브제와 설치미술이 처한 오늘의 현실을 되돌아보자는 의미에서 꾸민 전시이다. ‘물질적 상상력’은 프랑스 출신의 저명한 과학철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한 가스통 바슐라르의 잘 알려진 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일찍이 그는 고대 그리이스이래 형성돼 온 서양철학의 전통, 즉 합리적 이성에 가려진 인간의 감성과 상상력에 주목하였다. 그는 사물의 이미지와 사물에 대한 인간의 감성에 주목하여 인간들에게 꿈꿀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아 주었다. 흙, 물, 불, 공기 등 4원소를 근간으로 사물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시도하여 인간정신의 우주적 감응을 시도한 것이다.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물질을 다루는 작가들의 내면세계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오브제를 표현의 재료로 사용하는 작가들을 주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전통사상에 의거, 불(火), 물(水), 나무(木), 쇠(金), 흙(土) 등 오행으로 분류한 뒤, 현대미술에서 나타나고 있는 복잡한 변용양상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 전시가 지닌 의미는 무엇보다 ‘물질적 상상력’의 복원에 있다. 불, 물, 나무, 쇠, 흙 등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5원소에 대한 미학적 내지는 철학적 성찰을 통해 물질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것과의 만남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는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합리적 이성이 지배하는 오늘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을 매개로 그 물질의 너머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것에 대해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관객들은 이번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의 다양한 오브제 작품을 통해 근원적인 것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15개국 118명에 이르는 국내외 작가들의 독창적인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다양한 물질을 통해 근원적인 것에 다가가는 통로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이번 제3회 창원조각비엔날레가 지향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작가 혹은 작품과 관객과의 소통이다. 이번 비엔날레가 대중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과 관객참여에 많은 비중을 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다. 관객은 작가들이 제시한 작품을 통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이제까지 무심히 봐 온 사물의 존재방식과 양태, 성질을 제시된 작품을 통해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향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Ⅲ. 사물의 목소리, 상상력의 복원을 위하여 
 사물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감응의 대상이다. 합리적 이성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다시 가스통 바슐라르의 잘 알려진 표현을 빌면, 물질적 상상력을 통한 감성의 복원을 통해 이에 접근할 수 있다. 금세기 초, 다다이스트들이 행한 재현의 전복은 따라서 인간의 관념이 표상해 낸 이미지의 전복에 다름 아니었다. 사물의 이미지와 실제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드리워져 있어 실상 그 강을 건넌다는 것은 심히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재현에 입각한 서양의 회화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였다.  
 사물과 사태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통한 서양의 이원론적 접근 방식과 주관적 입장에서 물상을 대한 동양의 접근방식이 다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원근법적 체계에 기반한 서양의 회화와 직관에 근거한 동양의 산수화가 다른 것은 이러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문제는 세계의 파악에 있어서 서양의 방식이 동양에 비해 더 우월하다거나, 동양의 표현술이 서양에 비해 더 본질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인정하는 데 있다.
 바슐라르가 물질적 상상력이란 개념을 통해 철학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룬 것은 인간의 상상력과 직관을 중시한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인간의 정신을 옥죈 이성의 사슬로부터 해방돼 꿈꿀 수 있는 자유를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꿈꿀 수 있는 자유란 사물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 다름 아니다. 사물이 웅얼대는 소리를 내면의 성찰을 통해 듣고 이에 감응하는 일은 근원적인 세계의 본질에 다가가는 일이며, 그것은 결국 인간정신을 이성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 인간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북돋우는 일일 것이다. 1970년대, 과도한 상업주의의 폐해로부터 예술을 지키기 위해 상업적으로 치환될 수 없는 비물질과 정보에 주목했던 개념주의자들은 예술가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말살시킨 장본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다의 후예이자 전위의 전사인 그들이 상업주의에 편입된 사건은 스스로의 행위가 자가당착이었음을 입증한 사례일 것이다. 그러한 개념미술의 유령들이 갖가지 다양한 외피를 둘러쓰고 오늘날 비엔날레를 비롯한 미술현장 곳곳에 출몰하여 끈질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전위는 이제 하나의 패션이 되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으며, 더 이상 인류의 미래를 위한 지향점을 밝혀줄 수 있는 등대도 아니다. 종교의 세속화, 정치의 권위주의, 경제의 이기주의가 날로 기승을 부리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은 이제 인류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인가? 하지만 우리의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 힘은 매우 미약해 보인다. 이것이 현대의 예술이 지닌 숙명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기에는 인류의 미래적 전망이 암담하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이 지닌 심미적 기능에 한가닥 희망을 걸어보고자 한다. 더디고 느리지만 서서히 데워지는 한국의 온돌처럼, 예술이 우리의 무뎌진 감성을 일깨우고 인간의 상상력을 복원시켜 세상을 살만한 공동체로 만들 그 날을 꿈꿔보고자 하는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선택된 소수’로서 전위예술가들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 

                                 <2016 창원조각비엔날레 도록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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