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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n Fusion’과 원융무애(圓融無礙)의 정신성

윤진섭

‘Asian Fusion’과 원융무애(圓融無礙)의 정신성

                                                 윤진섭 (미술평론가)
                                           
Ⅰ. 예술 실험의 파이어니어로서의 홍지윤
  홍지윤은 전방위 작가다. 그녀는 비단 전공인 동양화뿐만 아니라 오브제, 설치, 퍼포먼스, 사진, 미디어 아트, 출판, 공공미술, 패션, 그리고 예술상품 콜라보레이션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그 중심에 서화동원(書畵同源)과 시서화 일체(詩書畵一體), 지필묵(紙筆墨)을 기본으로 하는 동양화의 화론이 자리 잡고 있다. 말하자면 동양화 특유의 원칙에 철저하되, 그 원칙으로부터 다양한 예술적 변용과 매체의 융합(convergence)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홍지윤은 동양화를 전공한 대다수의 작가들이 지필묵(紙筆墨)만을 고집하는 것과는 달리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디자인에 능하다. 그녀는 2001년 연세 디지털 헐리우드에서 3D, 에니메이션 과정을 이수할 만큼 새로운 매체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보인다. 이 디지털 기반이 결국은 오늘의 전방위 작가 홍지윤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즉, 수묵영상을 실험하는가 하면, 순수미술과 디자인의 융합을 꾀하는 가운데, 이미 2008년에 LED미디어 파사드(A Patner for Life, 삼성생명사옥, 서울)를 필두로 홍지윤의 예술세계는 보다 폭이 넓어져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녀 특유의 서체와 꽃과 새, 인간을 테마로 한 예술언어의 양식화(樣式化)는 캔버스를 비롯한 다양한 표현매체에 시서화(詩書畵) 3절(三絶)을 담아냄으로써, 동양화의 주체성을 견지하는 한편, 세계화(globalization)를 전제로 한 현대화에 성공하고 있다. 
 오늘날 떠오르는 글로벌 아티스트로서 홍지윤을 거론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예술세계가 지닌 이러한 장점 때문일 것이다. 즉, 오늘날 국제 미술계의 현장에서 보편적인 언어로 소통되는 오브제와 설치, 미디어 아트와 같은 매체를 수용할 줄 아는 개방성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국제적 감각이 어우러져 세련된 예술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홍지윤의 경우, 각종 비엔날레를 통해 국제무대에 진출한 대다수의 한국작가들과는 달리, 한국화를 바탕으로 한 뚜렷한 미학적 정체성과 지필묵과 한지를 비롯한 고유의 매체, 오방색을 근간으로 한 특유의 색채로 무장하여 확고한 미감적 정체성을 확보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이러한 성과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것은 한국 고유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문화적 유산에 뿌리박지 못한 예술세계는 그만큼 뚜렷한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즉, 당대의 문화적 보편성이라는 미명 하에 서구화된 예술은 역으로 객관적인 문화적 특수성에 기인한 세계적 보편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보다 엄격히 말하자면 평준화된 예술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예술이 과연 영속성을 지닐 수 있을까? 우리는 세계 미술의 현장이나 미술시장에서 자국(自國)의 문화와 전통, 역사에 젖줄을 대지 못하고 단지 세계의 미술 트렌트에 편승한 일시적인 유행으로는 미래라는 엄격한 시간의 검증을 통과하기 어려우며, 후세에 거장이나 혹은 고전으로 남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사실을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미술의 현장에서 뛰고 있는 한국의 작가 중 과연 그런 작가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는 사실을 상기할 때, 우리는 부정적인 인식에 도달한다. 
 홍지윤이 거론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맹목적으로 현대의 미술 트렌드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땅의 문화와 예술적 전통에 대한 강한 애정을 바탕으로 현대의 미감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그녀의 태도야 말로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돋보이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세계는 이제 선의의 문화 경쟁이라는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그런 연유로 각국의 작가들은 이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뚜렷이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소리 없는 문화의 경쟁은 국제무대에서 자국(自國)의 목소리를 뚜렷이 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한국 작가가 영국의 목소리를 내거나 아프리카 작가가 일본의 목소리를 내는 것만큼 큰 웃음거리는 없을 것이다. 
 홍지윤은 일찍이 20대 시절에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지필묵에 의한 동양화의 기본에 충실했다. 구상과 추상의 세계를 고르게 섭렵하고 드로잉을 포함, 수 천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문인화의 기본인 사군자를 비롯하여 산수화의 정석이라 일컫는 다양한 준법(峻法)도 터득했다. 채색화 역시 수묵화 못지않게 기본에 충실하여 표현의 다양한 기교를 키웠다. 오늘날 홍지윤이 화려한 오방색을 바탕으로 꽃과 새, 여인상 등을 모티브로 하여 눈부신 형광색을 도입하기까지에는 채색화의 탄탄한 기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의식의 밑바닥에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홍지윤의 장점이다. 그녀는 불가사리가 쇠를 먹고 자란다는 전설처럼, 자신의 호기심을 끄는 것이면 무엇이든 일정한 실험을 거친 후 과감히 수용하는 아방가르드 전사의 기질을 타고 났다. 그녀가 패션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통해 의상 디자인의 영역에 까지 도전한 사례는 단순히 호기심의 차원이라기보다는 패션 디자이너를 어머니로 둔 가계(家系)의 영향이 크다. 어렸을 적 어머니 곁에서 보고 익힌 패션 디자인에 대한 감각이 훗날 작가로 활동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뿐이다. 홍지윤의 그러한 콜라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비단 패션뿐만이 아니라, 각종 아트 상품 개발을 위한 협업에 이르러 더욱 빛나고 있다. 
 한국의 동양화는 원래 시와 글씨, 그림이 한 자리에 만나는 시서화(詩書畵) 3절(三絶)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선비(Sunbi)* 정신의 발현이기도 하려니와 품격 높은 유교사회의 문화적 전통이기도 하다. 옛날 선비들이 정자에 모여 화선지를 펼쳐놓고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에 곁들여 그림을 그리는 일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수준 높은 품격의 의사 소통방식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의 의중을 떠보고 상호간의 공감대를 찾는 것이다. 사언절구(四言絶句)나 오언율시(五言律詩)와 같은 전통적인 정형시에는 운(韻)이라는 것이 있는데, 압운, 두운 등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약수와 같은 것이다. 이 운(韻)을 매개로 서로 시구(詩句)를 주고 받으며 상대방의 의중을 떠봤던 것이다.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때로 여럿이 모여 시회(詩會)를 펼치며 문학과 미술, 음악, 무용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종합예술을 일상에서 실현했다. 이른바 기생문화가 그것이다. 오늘날 홍지윤의 퍼포먼스에는 이러한 공동사회의 전통이 관객참여의 형식으로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검게 칠해진 벽에 형광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 아이들이 나타나 함께 유사한 행위를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Are you Crazy Honey? - Cosmos is Chaos/Chaos is Cosmos, Video work, [예술의전당 미술과 놀이展], 서울, 2013> 
 홍지윤 작품의 주된 특징이랄 수 있는 시, 서, 화의 혼합은 한국의 이러한 문화적 전통에서 온 것이다. 지필묵을 기본으로 한 그것은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의 그림처럼 고답적이지 않고 개방적이며, 문인화적 전통에서는 금기시돼 온 형광색을 도입할 만큼 실험성이 강하다. 홍지윤이 아방가르드적 전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전통에의 강한 도전과 반항정신에 기인한다. 특히 여성이 비하되기 일쑤인 한국의 문화 풍토에서 이러한 도발과 저항은 자칫 사회적 도태를 당할 수 있을 만큼 신분상의 위험이 따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홍지윤의 그러한 행위는 차라리 모험에 가깝다. 그녀의 작품에는 종종 여성의 누드가 등장한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몸일 수도 있지만, 보통명사로서의 한국 여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한국과 같은 보수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몸을 나체로 드러내는 것은 결코 환영받지 못할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홍지윤의 작품에는 글씨와 자작시 혹은 대중음악의 가사, 그리고 그림이 한 자리에 등장한다. 그녀는 약 900편에 이르는 시를 썼다. 그중에서 그림의 주제에 맞는 시를 골라 특유의 서체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곁들인다. 그것은 이제 홍지윤의 트레이트 마크가 되었다. 다수의 추종자들이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으며, 그녀의 서체를 분석한 석사논문도 나왔을 만큼 디자인 분야에서 명성이 높고 또 영향력이 크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앞에서 언급한 순수예술과 생활예술의 경계를 허문 파이어니어로서 홍지윤의 실험정신을 거론한 이유이다.  

Ⅱ. 아시안 융합과 예술적 실천 
 작년에 홍지윤은 그동안의 예술적 성과를 모은 화집을 발간하면서 제목을 다소 거창하게 ‘아시안 융합(Asian Fusion)’이라고 붙였다. 그녀의 야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왜 그랬을까? 은연중 떠오르는 생각은 서구적인 것에 대한 강렬한 ‘안티(anti)’이자, 거꾸로 서구에서 발원한 현대적인 것의 과감한 수용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녀의 강렬한 문화적 흡인력과 못 말리는 친화력은 이질적인 요소조차 내 것으로 만드는 강력한 실험정신,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아방가르드적 도전정신으로부터 나온다. 그 정신의 핵심적인 개념이 바로 퓨전이다.    
 융합을 의미하는 퓨전은 다양성이 특징이다. 다양한 요소와 이질적인 성질들이 한데 섞여 화학적 변화를 이루는 가운데 전혀 다른 내용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 바로 퓨전이다. 가령, 미국은 다인종 사회인데, 그런 미국의 문화는 퓨전적이다. 그래서 미국문화를 가리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고 하는데, 이는 특정한 인종이나 민족의 문화를 편애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용인하는 데서 온 일종의 사회적 합의(合意)이다. 
 학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自作詩를 통한 多元的 融合과 現代東洋畵의 變容>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홍지윤이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는 예술의 내용이 바로 이 퓨전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회화를 근간으로 사진, 퍼포먼스, 패션, 예술상품 일러스트레이션, 애니메이션, 미디어 아트, 공공미술, 그리고 책의 출판과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뻗어나가는 그녀의 기민한 상상력은 마치 거대한 용광로와도 같다. 한국을 넘어 홍콩, 중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등 아시아와 유럽에 이르기까지 진출한 홍지윤의 독특한 서체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예술세계는 미래의 그녀를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탄탄한 조형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홍지윤이 주장하는 ‘아시안 융합’이란 아시아적 미적 가치에 대한 그녀 나름의 확신인 동시에 미학적 탐색의 핵심적 개념이다. 그것이 예술실천의 구체성을 띌 때, 거대한 스케일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예컨대 허공을 캔버스로 삼은 미디어 아트로 나타날 수 있는 상상력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홍지윤 특유의 서체 예술로 나타나게 될 이러한 잠재력과 기민한 상상력은 협업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징후는 곧 있게 될 홍콩의 대표적인 문화예술공간인 프린지 클럽에서 전개될 공공미술과 상징물 제작 프로젝트, 중국정부가 후원하는 북경의 [2016 베이징 디자인 위크전]을 통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활동은 이미 안도 다다오, 장 샤오강 등 국제적 명망가의 반열에 오른 인사들과 함께 가진 ‘2012 Herald Forum’의 초청에서도 그 맹아(萌芽)가 나타난 바 있다. 
 아시아의 미적 독자성과 가치에 대한 홍지윤의 예술실천은 2010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이 주최한 [세계미술의 진주, 동아시아미술(Rainbow Asia-Pearl of World Art, East Asia)전]에서 빛을 발했다. 이 전시를 위해 홍지윤은 한국에 거주한 지 20년이 된 한 파키스탄 가족의 삶을 밀착 취재했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서 인도식당을 운영하는 한 무슬림부부와의 열흘 간 에피소드를 담은 홍지윤의 <10 days in India>는 이 부부를 주인공으로 전개되는 시, 미디어 아트, 설치미술, 퍼포먼스가 융합된 대작이다. 홍지윤은 이 작품을 통해 이 부부를 단지 조연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작품의 주연으로 삼는 과감한 시도를 하였다. 작품의 모티브로 디자인한 옷을 입은 부인에게 자신의 시를 ‘우르두어’로 적게 하는가 하면 인터뷰와 함께 식당에 장식된 인도와 파키스탄의 민속적인 모티브를 재해석한 드로잉 벽지를 제작하는 등 적극적인 문화적 소통을 시도한 후 그 결과물을 전시에 활용했다. 

Ⅲ. 대작 위주의 회화 실험과 동서양의 미학적 융합 
 홍지윤은 대작에 능한 작가이다. 크기가 보통 5백호를 능가한다. 그처럼 큰 캔버스에 먹과 형광색 아크릴 칼라를 섞어 현란하면서도 깊이감이 있는 화면을 창조한다. ‘화려(華麗)’라는 한자를 쓴 가운데 캔버스의 좌우에 특유의 화려한 색과 분방한 필치로 꽃무더기를 묘사한 작품**은 홍지윤의 회화 세계를 잘 드러낸 수작(秀作)이다. <천지화(天地花/Flower World. 116x80cmx3폭, Acrylic on canvas, 2014)는 한자와 꽃이 병치돼 시니피에(기표)와 시니피앙(기의)의 간극을 피해 이미지와 타이포 사이의 동일 증명을 시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문자와 이미지를 병치하는 홍지윤의 회화전략은 시서화 일체의 동양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홍지윤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칫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전통적 문화 형식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 과감하게 이를 자기화 내지는 현대화하는 작업에 몰입해 오고 있다. <접시꽃 들판에 서서>(220x640cm, Acrylic on canvas, 2014)는 신라시대의 거목인 고운 최치원이 접시꽃을 소재로 쓴 시를 한자의 원문을 캔버스의 여백에 적고, 붉은 색의 화려한 접시꽃을 푸른색 바탕에 가득 그려넣은 대표작이다. 아마 이 작품만큼 대담하고 화려하며, 호방한 홍지윤의 예술가적 기질을 잘 드러낸 작품도 드물 것이다. 
 홍지윤은 규모가 크고 화려한 미디어 파사드의 제작과 함께 설치미술에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은 아마도 <봉별(逢別 :Being and Dead Meet and Seperate, 2011>***일 것이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다다(Dada)적 실험을 한 천재 시인 이상(李霜:1910-1937))의 소설 <봉별기>를 설치미술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은 그의 연인인 1930년대 기생 금홍의 방을 그녀 특유의 필치와 원색적인 색채감,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든 다양한 형태의 오브제와 벼룩시장에서 구한 앤틱가구들로 이루어졌다. 홍지윤은 이 작품을 통해 헤어짐과 만남을 거듭하는 한 커플의 불행한 운명에서 가치의 혼돈으로 점철된 포스트모던 시대 모럴의 원형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화려해 보이지만 어딘지 서글픈 정서가 감도는 미장센은 화려하지만 곧 부패할 운명에 처한 꽃의 미래를 예감케 하는 듯해 처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홍지윤의 섬세한 시적 감수성이 배가된 분위기에서 그녀 특유의 예술적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홍지윤의 미디어 아트에 대한 관심은 2012년 백령도의 바닷가에서 벌인 퍼포먼스 영상작업****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영상작업은 이미 2천년대 초반에 여러 편의 에니메이션 단편 영화 제작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바닷가를 무대로 군복을 입은 여자 무용수(유소정)가 장고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벌인 한 판의 퍼포먼스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그녀는 남북 분단의 운명에 처한 한반도의 문제를 ‘한(恨)’을 주제로 비디오 영상과 그림, 설치미술을 통해 잘 소화해 냈고, 이는 영상미가 뛰어난 수작(秀作)으로 평가된다.   
 홍지윤의 그림은 자작시와 그림을 한 화면에 공존시킴으로써 문학과 회화의 교섭을 시도한다. 이는 비단 시서화 일체라는 동양의 전통을 따를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서양의 문화적 전통을 용인하는 그녀의 태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지하듯이, 고대 희랍에서는 시와 그림을 서로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호라티우스는 ‘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란 유명한 발언을 통해 멀리서 봐야 할 그림과 가까이서 봐야 할 그림이 있는 것처럼, 시의 해석도 서로 다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원리가 전복되는 것은 ‘그림이 시를 모방하고(그림은 시와 같이:ut poesis pictura)’, ‘시는 그림을 본받도록 했던(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 근대의 예술원리가 태동하면서부터다. 
 홍지윤은 <인생은 아름다워> 연작을 통해 시와 그림의 통교(通交)를 시도함으로써 이미지뿐인 회화적 관례에 저항한다. 그녀는 시를 읽으며 그림을 보게 만들고, 그림을 보면서 시를 연상케 하는 형식을 통해 사랑과 같은 인간의 다양한 정서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흔히 이야기하는 ‘아시아적 가치’란 말은 일종의 수사 내지는 허구일는지도 모른다. 이념과 종교, 피부색, 문화적 전통, 지리적 풍토가 서로 다른 아시아를 어떻게 하나의 가치로 통합할 것인가? 그러나 공감에 바탕을 둔 예술은 가능하다. 그러한 예술에 대한 홍지윤의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Asian Fusion’이란 개념을 고안케 했다. 그녀는 수없이 존재하는 아시아적 가치와 문화적 형식에서 간극, 곧 ‘겹’을 찾아내고자 한다. 아시아에서 발원한 수많은 예술적, 미적 성과들이 지닌 겹과 결을 찾아내 이를 자기 작업의 원천으로 삼는 것, 그것은 홍지윤이 구사하는 수많은 조형언어와 매체를 통해 숙성될 것이다. 홍지윤은 말한다. “수많은 겹이 새롭게 하나가 되는 것이 예술세계의 근본이다. ‘Asian Fusion’은 간극 사이에 존재하며 ‘겹’의 칼라풀한 시각화이다”라고. 
 홍지윤은 그녀 자신의 말을 빌리면, “삶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기록하고자 하며 이것이 바탕이 된 미술과 인문(人文)의 융합, 궁극적으로 ‘원융무애(圓融無礙)’를 추구하는” 동양의 한 예술가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놀이정신에 근간을 두고 있는 그녀의 작품세계를 주목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선비(Sunbi)는 조선시대(1392-1910)에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는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를 이르는 말.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고 매사 절제력이 강하다. 

**<너에게 꽃을 꽂아줄게3(Let me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eart 3>(210x150cmx3폭), 2013

***2014년에 성남아트센터 미술관이 주최한 [한국화의 재발견전]에서 발표한 작품. Installation, ink & acrylic on Korean paper(Jangji)+single channel video+painted wooden cut, size : painting each 201x150cm, 3pieces+video, running time 2min 50 sec, variable size objects. 

****홍지윤, <어진 바다-화려한 경계>(An Ocean of Mother Nature-Gogeous Border), single channel video, running time 6'00'', 2012
 영화가 시작되면 파도의 포말이 밀려오는 백령도 바닷가 백사장 저 멀리서 한 여인이 장고 춤을 추고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바닷가 해변에는 빨랫줄이 걸려있고 거기에는 군복, 화가가 천에 그린 그림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사이로 간간히 트럭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여인의 춤은 점점 빨라지고 장구소리와 파도소리가 뒤섞여 애잔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영상미가 일품인데, 여인(유소정)은 “어느 날은 꽃이 바다를 뒤덮고/어느 날은 바다가 꽃을 뒤덮고/바다같은 꽃이 바다를 채우네/꽃같은 바다가 바다를 채우네/어진 바다. 어진 꽃”이라는 애조 띤 노래를 부른다. 홍지윤의 꽃 그림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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