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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향한 영원한 항해

윤진섭

빛을 향한 영원한 항해

                                                    윤진섭(미술평론가)


 자개와 크리스탈은 정현숙이 작품을 만들 때 사용하는 주재료이다. 둘 다 발광물질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무지개색이 어우러져 오묘하고도 부드러우며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자개와 눈부시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는 크리스탈은 그런 점에서 예로부터 공예의 재료로 각광받아왔다.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정현숙이 붓과 물감이 아닌 자개와 크리스탈을 작업의 주재료로 사용하게 된 데에는 개인의 취향도 작용했겠지만, 일상과 예술, 구상과 추상, 순수미술과 공예 등 그동안 엄격하게 구분돼 온 모더니즘의 층위(hierarchy)와 관례들이 허물어지면서 각 요소들이 서로 뒤섞이는 포스트모던적 상황도 한 몫을 했다. 이제는 어느 것이 고급예술이고 어느 것이 저급예술이라는 식의 등식과 구분이 사라지면서 한편으로는 그동안 열등한 것으로 치부돼 온 가치들이 문화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것이다. 제3세계의 예술과 민속예술, 그리고 공예와 같은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자개와 크리스탈을 회화의 주재료로 사용하는 작가는 비단 정현숙뿐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빠삐에 꼴레를 비롯하여 꼴라주, 아상블라주 등등의 표현기법들이 현대미술의 풍경에서 아주 친숙해진 것처럼 점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붓과 물감이 여전히 회화의 주재료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상태에서 이처럼 이질적인 재료들이 속속 회화의 범주 속에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실용신안특허를 내듯이 새로운 재료의 발견은 그만큼 회화적 표현 가능성의 폭을 넓히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정현숙의 작업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둘 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그 진가가 드러난다. 
 자개와 크리스탈에 관한 한, 정현숙은 이제 수준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10여 년 이상의 세월을 이 두 재료에 몰두해 온 결과이다. 붓과 물감을 사용하는 대신 일종의 오브제인 자개와 작은 크리스탈 조각을 캔버스에 붙여나갔다. 이 작업은 매우 고된 반복적 동작을 필요로 하며 긴 정신적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현숙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아주 작은 단위들이 모여 일정한 배열을 이루는 가운데 나타나는 질서의 세계이다. 질서는 어떤 원칙과 법식(法式)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정현숙의 경우 그 나름의 제작방식이 된다. 정현숙의 제작방식은 그녀 스스로가 고안한 것으로써 특수한 것이 되며, 그녀의 노하우인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다. 예술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 동시에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정현숙의 작업은 오늘날 예술(fine art)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techne)’를 떠올리게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오늘날 예술을 뜻하는 ‘art’는 기술이라는 의미의 ‘techne’였으며, 그것은 조선술이나 직조술처럼 일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적 의미에서 이 테크네에 필수적인 것이 바로 법식(rule)이었다. 거미줄에서 착안한 직조술이 가로줄과 세로줄의 교직(交織)이란 법식을 필요로 했듯이, 정현숙 작업에서도 역시 가로와 세로의 확장이라는 법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개와 크리스탈이 일상적 사물이듯이 일상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의 원환적 성격, 다시 말해서 ‘모던(modern)’이 ‘후기모던(postmodern)’에 와서 ‘모던 이전(premodern)’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양태를 보이고 있다. 
 물감과 붓 대신에 자개와 크리스탈을 취한 정현숙은 통상적인 회화의 재료인 물감과 붓이 만들어내는 표현의 가능성을 포기한 대신 자개와 크리스탈과 같은 천연의 재료만이 낼 수 있는 특수 효과에 주목했다. 빛이 그것이다. 이 두 재료는 스스로 빛을 낸다는 점에서 발광물질에 속하는데, 그것들은 광원에서 빛을 받아야 존재감을 드러내는 유성물감이나 아크릴물감과는 다른 표현효과를 낳는다. 기름이나 물의 농도에 따라 선염과 갈필의 효과를 낳는 물감과는 달리 이 두 천연물질은 오브제로서의 사물적 속성이 강하다. 예컨대 회화적 표현의 강점을 지닌 물감과는 달리, 자개와 크리스탈은 회화적 표현에는 적합하지 않은 대신에 물성이 강하고,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장점은 있으나 다소 메마른 느낌을 주는 것이 흠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개와 크리스탈이 지닌 빛의 속성은 여전히 매력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빛은 특히 기독교의 영원한 주제인 동시에 구원의 메시지라는 점에서 유독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정현숙은 빛이 지닌 이러한 속성에 주목하여 작업의 영역을 넓혀왔다. 꽃과 나비, 달항아리와 같은 구체적인 소재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선이나 면, 점 등 조형의 기본요소를 살린 기하학적 추상에도 깊이 빠져들었다. 최근에는 이마저도 다 버린 상태에서 단색의 세계에 천착하고 있다. 
 정현숙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지각작용(知覺作用)과 관련된 것이다. 빛을 매개로  인간은 사물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심리적 효과를 낳는가, 형태(figure)와 바탕(ground)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등등의 다양한 질문들이 나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현숙의 작품은 형태심리학(Gestalt psychology)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실제 바자렐리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것도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진출과 후퇴 등 형태심리학의 전범(典範)이 되는 형태를 지닌 작품들도 다수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리좀적(rhyzomatic) 형태를 지닌 것으로 캔버스의 검은 바탕 위에 만들어진 원형의 이 작품은 어지럽게 얽힌 식물의 뿌리를 연상시키는 한 폭의 추상화이다.  
 이 엄정한 기하학 또는 예측 불가능한 리좀적 세계에 나비나 그릇, 꽃과 같은 구상적 요소들이 첨가됨으로써 지성적(intellectual) 성격을 잠시 흐린 적이 있다. 그러나 정현숙은 단색조의 미니멀한 세계로 방향을 바꿔 그 무한한 적요(寂寥)의 세계로 점차 빠져들고 있다. 이에 대한 분석과 비평적 해석에는 작품의 추이를 지켜본 뒤 얼마 동안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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