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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단색화의 예술

윤진섭

후기 단색화의 예술

                                윤진섭(초빙 큐레이터/미술평론가)
                               

Ⅰ.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의 단색화전>이후 국내외적으로 선풍을 일으킨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최근 들어 다소 둔화되는 조짐이 보인다. 이는 특히 현재 연령이 70-80대에 달하는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경우 더욱 심하다. 불과 1년전만 해도 국내의 언론이 국내외 옥션의 동향이나 전시와 관련된 소식을 긴급 뉴스로 다루었던 사실에 비하면 최근 들어 다소 주춤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처럼 전기 단색화의 위축을 야기한 이유로는 여럿을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이 높은 것은 국내외의 콜렉터, 기관들이 선호하는 70-80년대의 작품들이 물량적 측면에서 이젠 어느 정도 고갈될 단계에 이르지 않았는가 하는 관측이 유력하다. 초기에 단색화를 주도한 메이저 갤러리들이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70-80년대 작품의 우수성을 선전하면서 국내외 미술계와 언론의 시선은 여기에 집중됐고, 거기에 맞춰 작품 가격이 고공 상승하는 열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평단과 학계에서는 단색화의 상업적 붐에 걸맞는 담론의 부재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분위기는 실질적인 담론의 창출로 이어지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보다 튼실한 한국 단색화의 형성을 위해서는 전기 단색화에 이어 후기 단색화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의 형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민간의 노력만은 충분치 않고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편, 미술계의 중심부에서는 후기 단색화 작가들이 전기 단색화의 퇴조를 만회할 만큼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후기 단색화 작가들이란 70-80년대에 한국 미술의 현장에서 모더니즘 미술을 직접 체험한 작가군(群)을 지칭하는 말로 현재 50-60대의 연령에 도달한 세대가 여기에 속한다. 말하자면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제자 벌에 해당하는 이들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몸소 체험한 세대이다. 
 이들은 유교적 생활 윤리보다는 합리적 사고가 몸에 배 있으며, 일본어보다는 한글과 영어의 구사가 더욱 자연스럽고 편하다. 또한 유럽과 미국 등 서구사회에서 미술을 전공한 유학세대가 많은 것도 후기 단색화 작가들의 특징이다. 따라서 전기 단색화 작가들처럼 예술을 수양이나 수신의 과정 혹은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표현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다. 특히 한국이 산업사회에 접어들기 시작한 70-8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한 이들은 독자적인 재료와 매체의 실험을 통해 단색화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해 봐야 할 이유가 있다. 
 차제에 리안갤러리가 개최하는 <후기 단색화의 예술(The Art of Post Dansaekhwa>전은 후기 단색화의 정상급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 진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시이다. 특히 이 전시는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의 단색화전> 이후 본격적으로 후기 단색화를 조명한 전시라는 점에서 향후 후기 단색화의 흐름과 향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Ⅱ.
 전기 단색화와 후기 단색화를 망라한 한국의 단색화에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소통과 상호작용이다. 그것은 곧 ‘자연과의 대화’에 다름 아니다. 서구 미니멀 회화의 요체인 변증법적인 이미지 사상(捨象)의 역사적 귀결로서의 회화가 아니라, 자연의 근원에 다가가려는 몸짓인 것이다. 한국의 단색화가 여백을 중시하며, 행위의 반복을 통해 자연의 본질에 다가가려고 하는 심리에는 이러한 정신이 담겨 있다. 그것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본 서구의 문명관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이며, 자연이란 거울에 비친 인간상, 즉 우주와 자연에 조응된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몸짓’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한국 단색화 작가들의 자연친화적인 자세는 자연을 내가 사는 터전의 넓은 품으로 본 한국의 풍수사상에 맥이 닿아 있으며, 회화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서예와 동양화의 여백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단색화가 가령 ‘평면성’이란 근대적 개념의 측면에서 볼 때 서구 미니멀 회화와 공유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 발생의 미학적 근거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의 타당성이 인정되려면 무엇보다 국제미술계에 만연된 서구적 관점의 해석 기준이 바뀌어야 하며, 우리의 고유한 단색화의 미적 특질이 보편성을 얻어 국제적으로 공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지금은 단색화를 둘러싼 미적 담론의 왕성한 창출이 필요하며, 대화를 통해 설득력 있게 소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되는 때이다. 비판은 쉬우나 고유한 이론의 창출은 어려우니, 학계와 평단을 막론하고 관심있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의 단색화를 가리켜 ‘아름답다’거나 심지어는 ‘예쁘다’고 표현한 한 서구 비평가의 견해는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한’ 것이다. 혹자는 아방가르드의 본질인 저항정신이 부족하여 퇴행적이라 비판하기도하나, 단색화는 그 안에 분명한 ‘자기부정의 논리’를 지니고 있다. 대다수의 후기 단색화 작가들 역시 전기 단색화 작가들처럼 반복적 행위를 통해 이러한 자기부정의 정신을 드러낸다. 서구의 미니멀 회화가 70년대를 정점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반면, 한국의 단색화는 40여 년 이상 지속돼 오늘날 후기 단색화 작가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하나의 미술 사조가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전개된 경우는 세계를 통틀어 봐도 그 유례가 없다. 
 한국의 단색화가 아름답거나 예쁘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단색화의 대상이 자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번 전시에 참여한 후기 단색화 작가들은 모두 자연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자연은 김근태의 대지, 남춘모의 밭이랑, 이배와 이진우의 숯, 김택상의 사계(四季), 김춘수의 하늘과 바다, 전영희의 물, 김이수의 바다, 법관의 하늘, 장승택의 대기, 천광엽의 숲 등등의 이미지를 통해 자연에 대한 하나의 유비로 어렴풋이 그 모습을 화면에 드러낸다. 
 한국의 단색화가 서구의 미니멀 회화와 비교되는 부분이 있다면 단순히 ‘시각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촉각적’인 양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모든 작가들의 작품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단색화에서 공통적으로 엿보이는 이 촉각적인 특징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위의 축적을 통해 드러난다.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물질은 캔버스 표면에 축적되며 그 과정에서 물질은 변화된다. 이 물질은 일종의 몸이다. 신체의 살이나 피부와도 같은 그것은 채 식지않은 대지의 온기를 지니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식지않은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대지의 온기를 환기시키는 중에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초혼(招魂)의 행위가 아닌가? 생태의 위기가 운위되는 요즘처럼 자연의 소중함이 돋보이는 시기는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이 자연을 향해 다가가려는 이 원초적인 몸짓은 한낱 지난 미술사로의 퇴행이 아니라, 인류를 향해 보내는 일종의 경고음이 아닌가? 아마도 이들의 행위에서 어떤 아방가르드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20세기 초엽의 다다이스트들이 발한 인류에의 경고음과도 같은 것 일는 지도 모른다. 비록 명상적이며 침잠된 화면이지만 이들의 화면을 한참동안 응시하면 거기에서 어떤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그 웅얼대는 음성이 바로 메시지로서의 ‘자연의 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시각적인 것의 청각적인 전화(轉化)야말로 후기 단색화가 지닌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후기 단색화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작가들의 작품을 간략히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김근태의 작업은 마치 면벽 수도를 하는 것처럼 무형상(無形相)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이는 형태가 없는 화면의 구축을 통해 어떤 정신세계를 드러내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근태는 우선 회화의 근본 원리인 평면성을 용인하고, 여기에 색을 칠하는 반복적인 행위를 가함으로써 “회화는 하나의 평면이다”라는 존재론적 명제에 충실한 작업을 행한다. 그가 그리는 것은 어떤 대상 세계의 표정이나 사물의 외관이 아니다. 그는 내면의 세계에 충실히 접근하여 마치 선사들이 선(禪)을 수행하듯이 정신의 세계를 탐색해 나간다. 

김이수의 작품은 수평선 혹은 지평선을 연상시킨다. 얇은 단색의 띠들이 중첩돼 이루어지는 화면은 보는 자의 마음을 지극히 평정한 상태로 이끈다. 이를 위해 김이수는 가로로 된 색의 면들을 무수히 중첩시켜 계조(gradation)의 화면을 창출한다. 그것은 얼핏 바다의 수평선을 연상시킨다. 저 먼 곳에 존재하는 수평선은 그러나 기실 수평선이 아니라 마음이 그려내는 관념이다. 김이수의 기억 속의 풍경을 찾아가는 작업은 따라서 시간과 연관이 있으며, 작가 자신의 말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간극을 찾아내 현재에 호출하는 작업이다. 

 김택상의 단색 화면은 미묘한 뉘앙스의 색의 자취들로 이루어진다. 그는 캔버스나 종이를 펼쳐놓고 그 위에 묽게 푼 아크릴 물감을 넓은 붓으로 칠해 서서히 말린다. 김택상은 마른 종이에 다시 물감을 칠하고 이 과정은 수없이 반복된다. 가을에 나무 위에 매달린 홍시나 잔잔한 푸른 바다, 혹은 풀밭을 연상시키는 김택상의 단색화는 보는 자를 깊은 관조의 세계로 이끈다. 최근 그가 특별히 구상한 전시 <사계>는 각기 다른 사계절의 변화를 단색을 통해 보여주고자 기획된 것이다. 캔버스나 종이의 표면에 정착된 안료 입자의 집적을 통해 김택상은 자연에 가까운 색을 보여주고자 한다.   

 김춘수는 그림을 그릴 때 물감이 묻은 손으로 캔버스 전체를 누비게 되는데 이 때 몸은 정신의 작용에 따라 특유의 리듬을 타게 된다. 작업에 깊이 빠져들수록 몸의 역동성이 더해지면서 정신적인 법열감이 찾아온다. 김춘수의 작업은 무엇보다 ‘몸성’이 두드러진 몸의 예술이다. 그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질문이며, 신체를 통해 언어 이전의 문제에 대해 성찰하는 원초적 몸짓이다. 짙푸른 하늘이나 깊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김춘수의 작품은 사물 자체의 너머에 존재하는 우주의 신령한 영기에 대한 유비로 읽힌다. 

 남춘모 작품의 사물성(objecthood)은 ‘만드는’ 행위에서 온다. 그리는 행위가 아닌, 만드는 행위 속에 그의 작품의 사물성이 깃들어 있다. 그리는 행위가 범할 수밖에 없는 모사(copy)의 숙명에서 벗어나 사물을 만드는 행위야말로 사물이 세계에 존재하게 하는 요인이다. 그가 천에 직접 색을 칠하지 않고 염색기법을 동원한다든가, 준비된 나무틀에 염색된 천을 깔고 폴리에스테르를 반복적으로 칠해 떠내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 등은 가능한 한 사물이 사물이게끔 하는, 다시 말해서 의식의 투사를 가능한 한 막자는 의도로 읽혀진다. 색의 중성성과 사물의 중성성의 만남은 사물이 지닌 세계의 투명성을 위해 전제되어야 할 요건이다. 신체를 어떠한 의식의 조작 없이 투명하게 열어놓는 것이야말로 생(生)의 세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법관의 작품은 인과론적 독재의 논리에서 벗어나 상대론적 관계성에 입각해 정신의 여유를 찾고자 하는 태도와 관련된다. 그의 그림에는 무수한 빗금들이 존재한다. 가로와 세로로 겹쳐진(+) 무수한 선들은 자신을 모나게 드러내지 않고 화면 위에 공존한다. 그렇게 해서 기왕에 그려진 선들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선들이 자리 잡는다. 시간이 갈수록 그것들은 다시 화면 바닥으로 가라앉고 다시 새로운 선들이 나타난다. 이 선들의 공존은 융화(融和)의 세계를 이루며, 세계는 다시 반복되기를 그치지 않는다. 법관의 그림은 따라서 완성이 아니라 오로지 완성을 지향할 뿐이다. 

이배는 오랜 기간 파라핀과 숯으로 작업을 해 왔다. 숯은 천연의 재료로서 나무를 태워서 얻어지는 만큼 자연의 본질적인 원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배는 파라핀 위에 숯가루를 용제에 섞어 마치 상감을 하듯 새겨 넣거나 혹은 숯 자체를 오브제로 삼아 큰 자루에 넣어 거대한 양괴를 보여주는 설치작품도 시도하고 있다. 숯을 작은 크기로 잘라 캔버스에 무수히 붙이는 이배의 단색 작품은 일종의 오브제 회화이다. 검정색에 내포된 다양한 색의 뉘앙스를 살리면서 깊은 아우라를 뿜어내는 이배의 숯을 이용한 서체 단색화는 그만의 독특한 경지를 열어가고 있다.    

 이진우의 단색화에서 한국 단색화의 일반적인 특징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가 작업에 임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는 우직할 정도로 숯이 놓인 한지를 끊임없이 쇠솔로 두드리는 강도 높은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데, 작업이 끝나고 나타난 결과를 보면 마치 공동묘지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검거나 회색, 혹은 푸른 기미가 감도는 한지의 표면은 그 안에 축적된 오톨도톨하며 크고 작은 숯덩어리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물질적 효과로 인해 무채색으로 덮여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검거나 회색, 혹은 푸른 기미가 감도는 작품의 두꺼운 층은 삶과 죽음을 연상시키리만치 묵상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 특유의 아우라가 감도는 장엄한 분위기가 이진우 단색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장승택의 <무제> 연작은 수없이 되풀이 되는 물감의 분무(噴霧) 과정을 거친 뒤, 회색, 갈색, 검정 등 주로 무채색으로 마감된다. 표면은 연한 파스텔 톤의 무광택을 띠게 되며, 관객은 눈앞에 존재하는 하나의 단일한 물체, 즉 ‘몸’을 보게 된다. 
 양태는 각기 다르지만 장승택의 작업 역시 김춘수의 경우처럼 ‘몸성’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무수히 반복되는 스프레이 작업이 주는 극한적 상황을 통해 몸은 고되지만 정신은 모종의 희열을 느끼게 되는 심리적 과정을 통해 획득된다. 안개와도 같이 모호한 중성색의 반투명한 느낌은 대기에 비유된다. 

 최근 들어서 전영희는 이제까지 사용해 오던 회색에서 떠나 푸른색의 천연염료인 쪽을 사용하고 있다. 근작들은 선과 면을 중심으로 전작에 비해 더 단순화되고 절제된 구성으로 이루어지는 회화적 실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간 분할의 문제와 캔버스 표면에 색이 침투하면서 발생하는 색의 깊이와 그것이 주는 색의 느낌, 즉 색감과 관련된다. 한편으로는 재료의 질감(物性)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색의 침투에 많은 신경을 쓰는 전영희의 이번 작업은 또 다른 변화를 예측케 한다. 

천광엽의 단색화 작품은 초기에는 점자를 연상시키는 점(dot)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은 선적인 요소로 발전했으며, 결국은 무수한 점들이 선이 되고 선이 중첩돼 면이 되는 평면의 논리 위에 형성되었다. 그의 작품은 캔버스에 작은 점들이 정착되고 이를 샌드페이퍼로 갈아낸 뒤 다시 물감을 바르고 갈아내는 반복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미세한 점이 반복되면서 형성되는 질서의 세계가 천광엽 작품의 특징이다. 점들이 모이고 깎여나가고 다시 모이는 반복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천광엽 단색화의 특징은 작업이 어디로 진행돼 나갈이지 모르는 비결정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Ⅲ.
 한국의 후기 단색화는 어디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 단색화는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의 미술계에서 한국 고유의 미술사조로 자리잡아 가는 중이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한국의 단색화전> 이후 세계의 미술계는 뜨겁게 반응했다. 많은 전시와 리뷰, 잡지 및 신문의 특집기사 등은 한국의 단색화를 세계의 미술인들과 애호가들의 뇌리 속에 각인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단색화 작품들이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많은 미술관과 미술재단에 소장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최근 몇 년간 단색화를 해외에 집중적으로 알린 국내 주요 갤러리들의 역할이 컸다. 한국 미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해외의 미술관이나 재단 등 공사립 미술기관에 작품들이 많이 소장돼야 한다. 그렇다고 볼 때, 단색화 작품의 판매를 둘러싸고 일부 언론을 비롯한 미술관계자들이 상업화랑의 기능을 폄하한 태도는 온당치 못하다. 주지하듯이 공공미술관은 상업적 행위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 말고 누가 한국의 작품을 해외의 미술기관에 소장시킬 것인가?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은 언젠가는 전시를 통해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며, 향후 순회전을 통해 더 많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이 지닌 미덕이라면 항상성이다. 꾸준히 자기 연마를 하는 가운데 더 높은 미적 경지를 향해 나아간다. 이 전시에 참여한 후기 단색화 작가들 역시 최소 10년에서 최장 30년에 걸친 세월동안 자기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은 작가들이다. 나는 이들의 작품에서 한국 후기 단색화의 미래를 본다. 나아가 이들에게서 1960년대 후반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단색화를 형성시켜온 회화적 전통과 거기에서 배태된 문화적 저력을 읽을 수 있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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