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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도전, 전위와 실험-변방의 이단아들

윤진섭

 저항과 도전, 전위와 실험-변방의 이단아들

한국 행위미술 50년 약사(略史)




                                   윤진섭(협력 큐레이터/미술평론가)


                            

“이 거사1)를 기점으로 한국의 전위미술은 도도한 물줄기를 이루며 화단의 변방에서 점차 미술사의 중심으로 위치이동을 해왔고, 50년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미술사를 써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 ‘행위미술’이 있다.” 



Ⅰ. 들어가는 말


 대구미술관이 주최한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전2)은 한국의 전위미술 50년을 돌아보는 기념비적인 전시이다. 이 전시는 도입부에서 한국 전위미술의 태동을 알린 1950년대 후반의 비정형(Informel) 회화 운동이 약 10년의 세월을 경과하는 동안, 내부의 동력이 고갈된 틈을 타 도발을 감행한 ‘4.19세대’의 예술적 반란을 다루고 있다.


 연령적으로 볼 때, 이들은 앵포르멜 운동을 추진한 작가들인 ‘6. 25 전쟁세대’의 제자뻘에 해당하며, 동시에 4. 19혁명으로 대변되는 민주화 운동의 주체세력이었다. 따라서 구세대의 미학에 대한 신세대의 저항과 도전이 전시 도입부의 내용을 이루며, 1부와 2부의 전시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키워드는 ‘탈(脫)평면’이다. 즉 앵포르멜의 존재론적 조건인 평면에 대항하여 신세대 작가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론과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예술을 펼쳐나갔는가 하는 점이 주된 관심사이다.


 ‘신세대의 저항과 도전’은 한국행위미술사를 관류하는 키워드이다. 50년에 걸친 한국의 행위미술은 선대의 예술에 대한 후대의 저항과 도전으로 점철돼 왔다. 이러한 시대구분은 경우에 따라서는 다소의 무리가 따를 수 있으나, 각 시대를 관류하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에 따른 형식이나 매체, 내용이 같을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또 하나는 한 나라의 문화와 예술이 고립된 상태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외래의 문화예술과 끊임없이 충돌하거나 접변하는 가운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 나간다는 보편적 사실에 있다. 한국의 행위미술 역시 그러하다. 60년대의 해프닝에서 70년대의 이벤트, 그리고 80년대 이후의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마다 한국 고유의 행위미술을 형성시킨 공통적인 동인(動因)이 있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 이 전시기획의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앞에서 나는 ‘고유’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한국 고유의 행위미술이라? 그렇다면 그것은 자칫 국수주의적으로 흐를 수도 있지 않은가? 행위미술처럼 규정지워지지 않은 것, 고정된 틀을 생리적으로 거부하는 자유분방한 제스처에 고유라니? 아마도 이 어불성설처럼 들리는 주장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인터넷에 기반을 둔 SNS의 시대를 맞이하여 거대한 지구촌을 살아가는 인류는 그럴수록 다채로운 문화예술의 피륙을 짜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의 문화적 폭력이 기승을 부리는 암흑의 시대를 맞이하여 ‘저항과 도전’을 모토로 삼는 행위미술가들은 이러한 획일적 폭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과감한 응전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 전시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2000년대의 행위미술에 ‘국제화’라는 타이틀을 붙인 이유는 바로 이처럼 지구촌 전체를 대상으로 한 국제화의 시대에 이 땅의 행위미술가들은 과연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고자 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이들을 가리켜 우리는 ‘실험과 도전의 전사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이러한 타이틀은 실험과 도전을 그친 국제미술계의 동향과도 무관치 않다. 실험과 도전의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따먹으려 혈안이 돼 있는 속악한 자본주의 체제는 전사들을 무장해제시킴으로써, 급기야는 전위를 무력화시키는 주요 세력이 되고 있다. 실험과 전위를 표방한 아트페어의 창궐이 목하 비엔날레의 위상을 넘보는 가운데, 미술관들이 본연의 정신을 잃고 이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거간의 문화-세계를 뒤덮고 있는 이 음산한 기운은 이제 순수해야 할 예술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이 전시기획의 배후에 깔린 노림수이며, 그 목적은 전위예술의 대명사격인 행위미술가들로 하여금 의식의 재무장을 통해 ‘저항과 도전’의 깃발을 들 것을 요청하는 데 있다.


 한국 행위미술 50년의 역사를 회고하는 이 자리는 반성과 전망을 전제로 한다. 이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를 통한 행위미술의 역사적 재구성이다. 따라서 장소의 제약은 있지만 그에 따른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50년에 걸친 한국행위미술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구성하여 대강의 흐름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통시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서구미술의 서술방식처럼 선형적인 전개과정의 선례를 좇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오히려 시대구분을 통해 한국행위미술의 각 시기별 특징과 정신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고안된 시대구분과 각 시기별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섹션1. 한국행위미술의 태동기(1967-1970) : 실험과 도전


 섹션2. 한국행위미술의 정착기(1971-1980) : 논리와 사유


 섹션3. 한국행위미술의 확산기(1981-1999) : 융합과 충돌


 섹션4. 한국행위미술의 국제화(2000-    )  : 상승과 교류




Ⅱ. 지상에서 지하로-정념과 지성의 도화술


 이 전시의 2부에 해당하는 [한국 행위미술 50년 : 1967-2017]전은 이 땅에 최초의 해프닝이 등장한 1967년의 [청년작가연립]전3)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전시에서 두 개의 해프닝이 발표되었다. 전시 개막일인 1967년 12월 11일 오후, ‘무’동인과 ‘신전’ 동인이 주축이 된 한국 최초의 해프닝인 [가두시위]와 14일 같은 멤버들이 전시장에서 벌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4)이 그것이다.


 [가두시위]를 비롯하여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이듬해에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이 제2한강교 밑에서 벌인 [한강변의 타살], 그리고 제4집단이 행한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5)(1970) 등등의 해프닝들은 다 같이 당대의 현실을 풍자하거나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당시 이들 해프너들의 활동은 현실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기존의 제도에 대한 전복이나 도전, 저항 등 아방가르드적 속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초기 해프닝은 이후에 등장한 어떤 퍼포먼스보다도 급진적이었다. 이는 80년대 초엽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민중미술이 제도권 미술에 대해 보인 강한 저항적 태도 보다 앞선 것이었다. 본격적이진 않았지만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맹아가 된다는 점에 초기 해프닝이 지닌 미술사적 의의가 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민중미술이 ‘정치적 아방가르드’로서 제도권 미술에 대한 이의제기였다고 한다면, 행위미술은 기존 미술의 언어에 대해 형식파괴적 성격이 짙다는 점에서 비록 그 내용이나 지향하는 목표는 다르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른바 아방가르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급진성은 이 두 경향을 관류하는 공통적 성격으로 기존의 미학을 해체하고 공격하는 데 그 주요한 목적을 두고 있다.”6)


 


 ‘무’동인과 ‘신전’동인 멤버들이 [가두시위]에서 행한 한국의 문화적 후진성에 대한 비판을 비롯하여 [한강변의 타살]에서 드러난 국전의 폐해에 대한 반발,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에 나타난 ‘제4집단’의 기성문화에 대한 비판과 기존체제에 대한 부정 등등은 초기 아방가르드 운동의 급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친 한국행위미술의 전개에 있어서 60년대의 해프너들이 견지한 비판과 저항의 정신은 그러나 매우 아쉽게도 7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급격히 지하화(地下化)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70년대의 이벤트는 활화산처럼 지상으로 분출했던 60년대 해프너들의 뜨거운 정념이 차갑게 식으면서 지하로 가라앉는 형국을 보였다. 이 무렵은 1972년의 10월 유신이 야기한 경색정국이 심화되면서 언론검열과 인권탄압이 자행되던 시절이었으며, 이처럼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는 이 땅에 이벤트가 처음으로 나타난 1975년 무렵에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건용의 〈논리적 이벤트(Event Logical)〉를 비롯하여 성능경의〈신문읽기〉, 김용민의 <걸레짜기>와 같은 이벤트는 이처럼 암울했던 시대에 나타난 행위미술의 가역적 풍경들이다.


 창립 초기부터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 강연과 토론, 그룹 스터디를 통해 전위미술에 대한 의식을 다진 바 있는 ‘S.T’그룹의 회원들은 해외로부터 수용된 개념미술과 오브제, 이벤트와 같은 신사조에 빠져들면서 현실과는 유리된 창백한 지식인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이건용의 <이리 오너라>, 성능경의 <신문읽기>, 김용민의 <걸레짜기>와 같은 은유적 풍자가 확대해석하면 체제비판으로 읽힐 수 있는 소지가 있었지만, 당시 그런 해석은 전무했다. 그 점에서는 작가들도 마찬가지여서 가령 성능경의 경우 자신의 작품이 언론검열을 풍자한 것이라는 식의 발언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예술작품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재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예술이 얼마나 매력적인 인간의 활동인가 하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행위미술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비롯한 풍부한 아카이브 자료들을 통해 관객들이 당시의 사회상은 물론 정치, 경제적 상황까지도 유추해낼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이 전시가 지닌 장점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7)


 


Ⅲ. 융합과 충돌의 드라마-80-90년대 퍼포먼스의 풍경들


 탕, 탕, 탕. 조용한 궁정동에 난데없이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10. 26사태8)의 서곡이었다. 이로써 60년대 초반부터 18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치가 종식되고 드디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3김씨의 등장으로 대변되는 ‘민주화의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1979년, ‘12. 12사태’를 통해 등장한 신군부는 광주시민들을 탄압하고 정권을 장악, 마침내 전두환 장군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0년대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상징하듯 경제적 풍요가 가시화된 시기이다. 1970년대의 경제적 도약을 바탕으로 80년대에 접어들자 3저 호황의 분위기에 편승한 경제적 풍요가 정치적 억압의 치부를 가릴 정도로 눈에 띄게 드러났다. 그러나 노동현장을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 군부통치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 나왔고, 이러한 저항은 1987년의 민주항쟁으로 집결돼 ‘6.29 민주화선언’을 이끌어냈으며, 급기야는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우여곡절 끝에 노태우 후보가 1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0년대의 퍼포먼스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태동되었다. 민주화의 꿈이 이루어지는 듯 했지만, 순식간에 물거품이 된 허탈감을 청년들은 통기타를 둘러메고 대성리 등 한적한 유원지를 찾아 달랬다. 당시 20대의 행위미술가들은 80년대 초에 결성된 거리 및 야외전을 통해 예술혼을 불태웠다. 1981년, 중앙대 출신의 ‘다무’그룹 작가들이 주축이 된 [대성리]전과 공주를 중심으로 한 ‘야투(野投)’의 창립, 그리고 이보다 앞선 1978년의 ‘대전78세대’와 1980년 [금강현대미술제]의 창립9), 1981년 대구의 [12월-퍼포먼스 동성로]10)전과 이교준이 기획한 [현대미술의 논리적 Vision](1982)11) 등등이 이 시기에 결성된 행위미술 관련 단체와 전시들이다. 


  1981년은 공주에서 제1, 2회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전이 열린 해였다. 자연을 무대로 펼쳐진 이 행사에 약 2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는데, 안치인, 이두한, 고현희, 나경자, 강정헌이 행위미술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보다 앞선 1980년에는 신탄강변에서 안치인, 송일영, 최병규, 지석철, 김익규 등이 [대전78세대]전 현장 이벤트를 행했다. 같은 해에 공주 금강에서 [금강현대미술제]가 창립되었다. 이 미술제는 야외 설치미술제의 성격을 띠었으며 ‘야투’, ‘대전78세대’와 함께 충남권 실험미술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 창립전에서 안치인, 송일영, 김영호, 김용익의 이벤트 발표가 있었다. 1981년 제2회전에는 안치인, 유동조, 이두환, 이기재, 홍현표가 퍼포먼스 발표를 했다. 1982년에는 제4회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전에서 고승현, 고현희, 신남철, 안치인, 유동조, 이기방, 이두한, 이응우, 이종협, 전원길, 정장직, 지석철, 허강, 홍오봉의 발표가 있었다. 같은 해에 안치인, 이두한의 2인 이벤트가 대전문화원에서 열렸으며, 1981년에는 [대전78세대]전이 열린 현장에서 안치인, 강정헌, 김영호, 김익규, 김철겸, 송일영, 신현태, 이두한, 지석철의 이벤트가 있었다.12) 


 이처럼 야외에서 행위미술이 벌어진 선례로는 1974년에 창립된 한국미술청년작가회가 주최한 일련의 행사를 들 수 있다.13) 이 행사들이 지닌 의미는 1970년대 중반에 시작해서 후반을 거쳐 80년대에 이르는 동안 야외 현장 퍼포먼스의 맥을 수립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야투’는 야외설치미술과 퍼포먼스 중심의 국제행사인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개최하고 있다.


 80년대의 한국 행위미술을 총칭할 수 있는 단어는 ‘장르의 융합과 토탈화’ 현상이다. 80년대 중반부터 미술인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 간의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퍼포먼스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14) 예술 장르 간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다양한 융합현상이 나타났다. 미술을 비롯하여 음악, 무용, 연극, 마임, 실험영화가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형태의 퍼포먼스가 발생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1981년에 동덕미술관이 주최한 [현대미술워크숍]전에 초대된 ‘S.T’, ‘현실과 발언’, ‘서울80’ 등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을 망라한 전위그룹은 동덕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갖는 한편, 수유리에 위치한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그룹의 발표양식과 그 이념’을 주제로 합동토론회를 가졌는데, 이는 이 시기 모더니즘 진영과 민중미술 진영 간의 화단 내 파워가 교차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 조짐은 일찍이 드러났는데,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많은 신생 미술그룹이 태동되었으며 이는 곧 전시로 이어졌다. 1980년의 [현실과 발언]전을 비롯하여 1982년의 [젊은 의식]전, [임술년]전, [두렁동인]전, [시대정신]전(1983), [토해내기]전(1983), [실천그룹]전(1983) 등 주로 현실참여적 성격의 전시회가 봇물을 이루었다.


 [현대미술워크숍]전 이후, 한국의 전위미술을 주도한 ‘S.T’ 그룹은 해체의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첨예한 전위정신의 충일도, 단단했던 회원들 간의 결속도, 지식 탐구를 위한 열정도 해이해진 가운데, 어느 날 한 차례의 격렬한 토론을 뒤로 하고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1978년, 리더인 이건용이 목원대 강의를 위해 대전으로 이사를 하면서 서울에는 행위미술의 공백기가 찾아왔다. 한국 행위미술사에서 이건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1975년 삼십대 초반의 나이로 이벤트를 시작해서 80을 바라보는 노경에 이른 현재까지도 현역 행위미술가로 활동 중이다. 성능경은 화단이 이념적 갈등을 치룬 80년대 초반에 공황장애를 겪는 등 심각한 삶의 질곡을 겪기도 했으나, 90년대 초반에 품바풍의 독자적인 퍼포먼스를 창안, 현재 중요한 전위작가로 부상하는 중에 있다.


 목원대 강사에서 군산대 전임으로 이어지는 이건용의 행보는 대전을 비롯한 중부권에 행위미술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원대의 안치인, 이두한을 비롯하여 군산대의 심홍재 등이 이건용의 대학 제자들이다.


 1986년, 이건용이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있는 아르꼬스모미술관에서 조직한 [’86행위설치미술제]는 전국의 행위예술가들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시는 오브제와 설치외에도 행위미술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이건용을 비롯하여 성능경, 안치인, 윤진섭, 강용대, 신영성, 이두한, 남순추, 고승현, 방효성, 김용문 등이 참가한 가운데 매스컴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았다. 이 전시를 계기로 전국의 행위미술가들이 서로 상면 내지는 재회를 하게 되었으며, 작가들은 상호 교류를 터 크고 작은 퍼포먼스 행사를 기획하였다.15)


 퍼포먼스가 전국적으로 전파되는 가운데 활성화를 이룬 80년대는 미술저널의 양적 팽창을 가져온 시기이다. 이는 선데이서울을 비롯하여 주간여성, 주간경향, 주간한국 등 선정적인 기사를 주로 다뤄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언론매체들이 해프닝을 취재했던 60년대 상황에 비하면 상당한 도약을 가져왔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공간’을 제외하면 변변한 미술전문지 하나 없던 궁핍한 60년대 시절에 그나마 현장을 발로 뛴 주간지 기자들이 있었기에 훗날 이 시기의 해프닝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나올 수 있었다.16) 이는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술전문지가 없어 자칫하면 공백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을 주간지가 대신했다고 하는 사실은 행위미술사 측면에서 보면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60년대의 척박한 사정에 비하면 80년대는 훨씬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공간’을 비롯하여 계간미술, 미술세계, 현대미술, 아트포스트 등 미술전문지들이 간헐적으로 행위미술을 다뤘지만, 이 무렵에도 건재한 ‘선데이서울’을 비롯한 몇몇 주간지와 일부 대중잡지의 퍼포먼스 보도는 현재 좋은 아카이브 자료가 되고 있다.  


 1980년대는 가시적인 경제적 호황과 종식되지 않은 군부통치가 엇갈린 갈등과 질곡의 시대였다. 미술계의 입장에서 볼 때, 민중미술의 확산은 반대급부로 70년대의 유산인 모더니즘 미술의 침체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무렵 민중미술이 땅위를 당당히 활보했다면 모더니즘 미술은 반대로 급속히 위축되는 듯한 인상이 짙었다. 민중미술의 기세등등한 모습의 극치는 104인의 작가에 의한 [삶의 미술]전17)이었다. 한국 현대미술의 변곡점을 맞이한 이 시기를 고비로 [힘]전(1985) 사태를 거쳐 1987년 7월에서 9월까지 이어진 노동자대투쟁18)의 시기에 이르면, 퍼포먼스도 대규모의 양상으로 진전돼 이한열과 박종철의 장례식, 노제 등등 군중집회를 통한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는 물론 미술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긴 하나, ‘남북이산가족찾기’(KBS TV)를 비롯하여 2002한일월드컵의 붉은 악마 응원, 그리고 최근의 태극기집회, 촛불집회에서 보듯이 퍼포먼스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동시에 대중화되는 추세를 띠고 있어 주목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퍼포먼스가 삶의 현장 속으로 파고 든 사례임을 말해준다.


 1986년대 중엽에는 전국에 흩어져 작업을 하던 행위미술가들이 서울에서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이들은 아르꼬스모미술관 주최의 [’행위설치미술제]와 [’86여기는 한국]전을 계기로 만나게 되면서 다양한 퍼포먼스 행사를 기획했다. 1987년 2월 20일부터 2월 26일까지 바탕골미술관에서 열린 [’80년대의 퍼포먼스-전환의 장(場)]전에는 이두한, 방효성, 신영성, 윤진섭, 남순추, 안치인, 문정규, 임경숙, 고상준, 조충연, 강용대, 박창수, 김영화가 참가하였다.


 1988년 6월 19일부터 26일까지 전북지역의 실험미술단체인 [쿼터그룹]전이 전북예술회관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 이이자, 김준수, 임택준, 박춘희, 심홍재가 퍼포먼스를 발표하였다. 나는 이 전시를 본 소감을 아트포스트에 기고한 리뷰에서 “이이자와 박춘희를 제외한 나머지 세 작가의 경우 퍼포먼스의 주요 경향 가운데 하나인 정치성과 제의성이 강하게 부각된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오늘의 상황에서 퍼포먼스라는 장르가 갖는 기능, 효용, 한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심홍재는 ‘죽음’이라는 흔하지만 여전히 묵직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 퍼포먼스가 지닌 실연의 의미를 여실히 드러내준 작가로 여겨진다.”고 평가하였다.19)


 이 무렵의 한국 사회는 폭압적인 군부통치에 저항하는 민주화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정부 사이에서 파생된 대립과 갈등이 심각한 국면을 노정하고 있었다. 황사바람처럼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불안한 정국이 애꿎은 노동자와 학생들의 피를 부르고 있었다. 행위미술가들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접하여 제의적 성격이 강한 퍼포먼스를 발표했다. 김용문은 1983년에 지리산 고사목지대에서 연 [매장, 그리고 발굴]전을 비롯하여 [수장제], [방사(放死), 방사(放邪), 방생(放生)]전, [애장]전을 통해 이 땅에 묻힌 억울한 영혼들의 ‘한’을 토우를 이용한 특유의 제의적 퍼포먼스로 풀어냈다.


 음울한 시대는 음울한 작품을 낳는 법이다. 대학로에서 발표한 김영화의 <죄다, 죄다>는 출산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여성의 문제를 부각시킨 퍼포먼스였다. 그녀는 탯줄을 연상시키는 검은 색의 긴 줄을 굽이굽이 서려놓은 다음, 일련의 행위를 통해 낮은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질문을 던지는  ‘여성성’이 강한  퍼포먼스를 발표하였다.


  1987년은 유독 행위작업의 발표가 많은 해였다. 아르꼬스모미술관에서 [1987-서울. 요코하마 현대미술]전이 열렸다. 당시 행위미술 국제전은 드물었는데, 이 전시에서 이건용, 안치인, 이케다 이치, 히그마 하루오의 퍼포먼스가 발표되었다. 같은 해에 대전에서 열린 [대전행위예술제]에서는 이건용, 성능경, 안치인, 김용문, 강정헌, 윤진섭, 방효성, 문정규, 심철종, 박창수, 이두한, 한건준, 심홍재, 임택준, 고상준, 조충연, 전일국, 김정명, 김명순의 퍼포먼스 발표가 있었다.


 80년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1989년에는 네 개의 큰 행사가 열렸다. 10월 26일부터 30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린 [’한일 퍼포먼스 페스티벌]에 참가한 작가는 고상준, 김사하, 김해민, 무세중, 문정규, 박창수, 심우성, 심철종, 심홍재, 이불, 임경숙, 조충연이며, 일본 측 작가는 겐이치 다케다, 치에코 토리이, 유지 아키모토, 도키코 오야마, 고지 오구시, 노부키 야마모토, 마리코 스즈키, 미슈다카 이시이이다. 축제적 성격을 띤 이 행사는 한일 양국의 행위미술가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 문화적 교감을 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보다 앞서 동숭아트센터에서 [동방으로부터의 제안]전이 열렸다. 이 전시에서 이건용과 방효성, 일본의 이케다 이치가 퍼포먼스를 발표했다. 이건용은 한국의 독을 이용하여 동경에서 가져온 물에 머리를 감고 비누물이 묻은 머리카락을 독의 언저리에 비비면서 ‘어머니’를 외치는 행위를 통해 가계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적 회고 시스템’을 주장하였다. 방효성은 동숭동 거리에서 무작위로 선택한 오브제와 동경의 거리에서 가져온 오브제, 그리고 관객의 소지품을 석고로 혼합하는 행위를 보여주었다20).


 1989년 7월 7일에서 17일까지 나우갤러리가 기획한 [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그리고 소통]전은 당시 활동하던 전국의 행위예술가들이 거의 망라된 축제적 성격의 행위예술제였다. 강용대, 김준수, 김재권, 남순추, 문정규, 방효성, 성능경, 신영성, 심홍재, 안치인, 이건용, 이두한, 이불, 이이자, 임경숙, 육근병, 윤진섭, 조충연이 참가하였다. 이 전시는 퍼포먼스 발표와 아카이브 자료 전시를 겸한 것으로 요즈음 유행하는 아카이브 전시의 선구적 사례이다. 이 전시에 참가한 작가들의 기록사진, 드로잉, 작가발언, 작업계획서, 행위의 결과물 등이 전시되었다21). 특기할 사항은 18명의 작가가 일주일동안 행한 작업을 미술평론가 김영재가 비디오카메라에 담아 자료로 남기는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퍼포먼스 분야에서 처음 있었던 일로서 훗날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 아시아문화전당이 주최한 원로예술인들의 구술채록사업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 선 것이었다.22)


 1989년 3월 26일부터 4월 2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89청년작가]전([젊은 모색]전의 전신)에서 열린 퍼포먼스 발표는 재야적 성격이 강한 퍼포먼스가 제도권으로 진입한 첫 사례이다. 따라서 이 행사는 1981년 창립 이래 퍼포먼스 작가를 초대한 첫 전시회이자 마지막 전시가 되었다. 당시 커미셔너인 미술평론가 윤우학은 안치인, 윤진섭, 이두한, 이불을 초대하였는데, 이들은 엄숙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앙 전시장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두한은 곤로에 꽁치를 굽고, 알몸의 전신에 석고를 바른 뒤 국부에 경광등을 대고 돌아다니는 소동을 부렸다.23) 윤진섭은 중앙전시장의 정면에 난 대형 유리창을 향해 180개의 계란을 투척, 행위 드로잉을 행했다. 이불은 몬스터를 연상시키는 기괴한 봉제 의상을 입고 전시장을 누비고 다녔고, 안치인은 요란한 음악에 맞춰 수 백 장의 카드를 뿌렸다. 당시 이 장면이 KBS TV의 ‘문화가 산책’에 소개됐는데, 이 프로를 본 한 국회의원이 이경성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게 예술이냐”며 항의를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24)


 1990년대에 접어들자 한국은 국제화 시대에 진입하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치룬 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한층 더 높아졌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한 한국에 대해 뉴스위크를 비롯한 외신은 “한국인들이 몰려온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미술관계자들이 잇달아 한국을 방문하는 가운데 1995년 광주비엔날레가 창설됐다.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상징하는 이 이벤트는 훗날 이 땅에서 벌어질 비엔날레의 홍수시대를 예고하는 문화적 사건이었다. 이 무렵이면 식자들이 포스트모던 문화의 전범으로 회자한 압구정동 문화가 생긴 지도 10년을 바라보는 시점이었다. 한국은 서서히 대량소비사회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의 한국사회가 국제화 시대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행위미술은 미술의 제도권 밖에 머물러 있었다. 행위미술에 관한 한, 이 시기의 특징은 서울의 공동화(空洞化) 현상과 맞물린다. 서울보다는 오히려 지역에 많은 행위미술의 거점이 생기고 지역을 중심으로 한 작가들의 활동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수원, 부천, 인천, 부산, 군산, 전주, 공주, 대전 등등이 행위미술의 거점도시들이다.25) 행위미술가들은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퍼포먼스 행사를 기획하거나 현대미술의 국내외 동향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다.


 1990년대 행위미술의 첫 스타트를 끊은 것은 수원의 행위미술가들이었다. 당시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원의 행위미술가들의 서울 활동은 뜸한 편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수원에서 미술을 독학한 실험작가 김성배와 교유한 김석환, 이경근, 황민수, 홍오봉은 릴레이 퍼포먼스 [다섯칸]전(수원, 선화랑)을 개최했는데, 이 전시는 ‘컴아트그룹’26)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컴아트그룹’ 은 문화게릴라적인 성격이 강한 단체로서 1993-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수차례에 걸쳐 [교감예술제]를 개최하는 동시에 한국, 중국, 일본 3국 공동으로 북경과 오사카, 동경에서 전시를 개최하는 동시에 행위미술을 선보였다.


 특히 이승택, 김석환, 이경근, 박이창식, 홍오봉, 황민수 등이 북경의 천안문광장과 자금성, 만리장성 등지에서 행한 퍼포먼스들은 공안의 눈을 피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검열에서 오는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이경근과 박이창식은 만리장성에서 퍼포먼스를 했는데, 이경근은 온몸에 신문지를 붙인 상태에서 라이반을 쓰고 이승택의 거대한 지구풍선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었으며, 그 옆에서 박이창식은 입으로 콘돔에 바람을 집어넣어 부풀리는 동작을 되풀이 했다.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을 찾은 관광객은 이들을 둘러싸고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이 행사에 초대된 이승택은 자전거의 짐칸에 커다란 지구풍선을 싣고 천안문 광장을 도는 퍼포먼스를 했다. 천안문사태의 여파가 채 가라앉지 않은 당시 중국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비밀리에 퍼포먼스를 할 수 밖에 없었다.27)


 1989년, [한일퍼포먼스페스티벌]에서 나체로 천장에 매달린 채 임신중절의 쓰라린 경험을 이야기하는 등 과감한 바디 퍼포먼스를 벌여 페미니즘적 관점을 드러낸 바 있는 이불은, 1990년에 몬스터를 연상시키는 그로테스크한 복장을 하고 김포공항과 나리타공항에서 거리 퍼포먼스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냐>를 벌여 시선을 끌었다.


 인천에 거주하는 신종택은 1990년 월미도 문화의 거리 야외무대에서 [신종택행위예술제]를 주최했고 이듬해에 [월미도행위예술제]를 조직하여 2천년대에 유행한 ‘행위예술제’의 첫 스타트를 끊었다. 같은 해, ‘스페이스 오존’에서 최정화가 기획한 토탈아트적 성격의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김형태, 이불, 오재원, 심철종(마임), 김사하(실험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여 즉흥성이 강한 실연을 보여주었다. 90년대 초반에 이반은 예술의 전당과 서울시립미술관 등에서 [비무장지대미술운동]전을 기획했는데, 여기서도 김석환, 이경근, 유도화, 조현재 등 많은 작가들이 퍼포먼스를 발표하였다. 


 1992년에 성능경은 동숭동 충돌소극장에서 <망친 영화가 더 아름답다>라는 퍼포먼스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와 함께 기존 가치의 전복을 꾀하고자 한 성능경의 의도를 보여준 퍼포먼스였다. 하용석은 부산의 자갈치시장, 불국사 근처 철길, 사천, 문경 등지를 도는 로드 퍼포먼스 <겨울의 전국일주>를 발표하였다. 이 해에 제1회 [삼천포행위예술제]가 개최되었다. 1993년에 이혁발은 <살아가기 또는 쇼쇼-촌스런 락카페, 노래방, 그리고 포천막걸리>를 인사동 제3갤러리에서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무거운 미술과 대비되는 ‘가벼운 미술’을 선언한 뒤, 노래방 반주기를 설치, 관객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유쾌한 퍼포먼스였다.


 한편, 광주에서는 김광훈, 윤명국, 방준호, 김춘기 등이 [’94 영호남 교류행위예술제]를 조직하고 광주, 대구, 부산을 순회하며 퍼포먼스를 벌이는 행사를 기획하여 고질적인 지역 간의 벽을 허무는 예술적 시도를 했으며, 대전의 문정규는 <음식문화>를, 수원의 김석환은 <산계를 지나며>를, 전주의 심홍재는 <For The Green 몸짓>을 전국 17개 지역에서 발표하였다.28)


 90년대에는 퍼포먼스가 사적인 담론을 위한 매체로 인식되는 경향이 짙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신세대 작가들에게서 두드러졌다. 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사회를 관류한 사회적 억압과 갈등이 해체되면서 집단으로서의 사회는 점차 개인으로 파편화되었다. 90년대의 퍼포먼스는 음향이나 조명을 이용하여 청각과 시각적 충격을 극대화한 80년대의 일반적인 퍼포먼스 양상과는 달리 그로테스크와 나르시즘 등 사적인 담론을 내면화하는 경향이 강세를 보였다. 이 시기에는 또한 에이즈를 비롯하여 신체, 젠더, 페미니즘, 홈리스 등 사회현상에 주목하는 퍼포먼스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Ⅳ. 2000년대의 국제화-상승과 교류를 위한 서곡


 1999년 12월 31일 밤 10시. 홍대 앞에 있는 씨어터 제로에 일단의 행위예술가들이 모였다. [난장, 밀레니엄 퍼포먼스 1999-2000]에 참가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이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준비한 퍼포먼스를 발표하였다. 속칭 ‘O원의 기획’29)이라 부른 이 행사는 야유, 개그, 소란, 무질서, 즉흥, 우연이 뒤섞인 ‘난장쇼’였다. 타들어가는 부채에 적힌 제문(祭文)을 낭독한 성능경의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작가들의 발표가 있었다. 이승택은 녹색의 대형 포도주병에 든 막걸리를 일회용 컵을 손에 쥔 관객들에게 따라주었는데, 병의 주둥이 부분에 과장되게 만든 남성기가 붙어있어서 그 곳에서 흘러나오는 막걸리는 마치 정액을 연상시켰다. 한 여성 관객이 받아 마실 때 객석에서 야유와 웃음, 그리고 야릇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국희는 무대를 어지럽히며 다양한 퍼포먼스를 했는데, 백미는 종반부에 대변을 보려고 했으나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실패한 순간, 줄에 걸린 장난감 강아지가 돌돌 거리다 움직임을 멈춘 장면이었다. 그 동작은 마치 한 세기가 저문 순간을 상징하는 듯 했다. 방제용 소독기가 든 관을 어깨에 메고 하얀 연기를 뿜으며 수원성을 한 바퀴 돈 김석환은 트럭을 타고 현장에 도착, 극장 앞 도로에서 관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의 이 퍼포먼스는 20세기의 종언을 맞아 구시대의 종식과 더불어 사악한 무리들을 방제하자는 의미를 지녔다.


 90년대에 들어서 겉으로는 행위미술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듯 했지만, 실제로는 소강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행위미술가들은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산발적으로 행위를 벌였으나,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네트워크를 형성, 다가오는 뉴밀레니엄 시대에 대비하여 국제적인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난장, 밀레니엄 퍼포먼스 1999-2000]은 전국 규모의 행위미술제로서 전국의 행위미술가들이 재규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는 [서울국제행위예술제(SIPAF)]의 창설을 계기로 국제화를 맞이하는 시기이다. 2000년 11월 17일부터 11월 19일까지 인사동 일대에서 벌어진 이 행사는 한국을 포함하여 9개국, 90여 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대규모 국제 이벤트였다. 호주의 스텔락(Stelarc)을 비롯하여 프랑스의 올랑(Orlan), 일본의 타스미 오리모토(Datsumi Orimoto) 등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작가들이 참가한 이 행사는 그동안 국내 미술계에서 변방으로 치부돼 오던 퍼포먼스가 제도권으로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퍼포먼스 섹션과 영상섹션으로 구분된 이 행사에 한국작가로는 김광철, 신용구, 이원형, 도지호, 김석환, 이반, 박이창식, 성능경, 안치인, 김영원, 심영철, 이상진, 이승택, 조계형, 홍오봉, 김현주, 김현국, 이건용, 김계현, 이미정, 정영훈, 채미현, 심현주, 정인엽, 한계륜, 이용백, 이상현, 오상길, 그림 올리버(독일) 등이 참가하였으며, 단체로는 아파홍 그룹, 파리길들이기, 중국로봇, 드림패션, 바디스트 시장, 아다지오, 회로도, 말장난, 안티프라민 등등이 참여하였다.


 2002년에 노암갤러리와 인사동거리에서 열린 [2002서울국제행위예술제](12. 27-28)는 ‘여성의 감수성’을 주제로 한국과 일본의 여성 퍼포머들을 초대한 행사였다. 한국의 김백기와 일본의 세이지 시모다가 커미셔너를 맡았으며, 한국에서 김은미, 김영아, 이미정, 문경자, 채송화, 소니아, 한영애가, 일본에서 아키오 츠바키하라, 준코 이가, 미치 노하라, 미야키 이누카이, 사카모토 나오코가 참여하였으며, 특별실연으로 문재선과 세이지 시모다의 퍼포먼스 발표가 있었다.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퍼포먼스의 발전과 확산에 기여하고 있는 단체는 김백기가 이끄는 코파스(KoPAS) 그룹이다. 2000년 3월에 창립한 코파스는 2002년 이후 [한국실험예술제(Korea Experimental Arts Festival)]를 매년 개최한 바 있으며, 현재는 제주도로 본부를 옮겨 [제주국제실험미술제]로 명칭을 바꿔 행사를 지속하고 있다.  


 ‘한국퍼포먼스 30년’이라는 테마로 열린 제1회 <2002한국실험예술제>(2002.8. 17-25, 씨어터 제로, 홍대앞 클럽 등)는 창립이후 수 차례의 발표회와 세미나를 통해 기획 역량을 축적한 코파스 그룹이 한국 퍼포먼스 30년사를 정리하는 책자 발간과 함께 좌담회, 사진전, 그리고 전국적인 작가를 망라한 퍼포먼스 실연을 통해 퍼포먼스의 대중적 확산을 꾀한 행사였다. 참여작가로는 성능경, 이건용, 강만홍, 무세중, 최소리+장군, 김석환, 이국희, 김종순, 임택준, 김광철, 김춘기, 김은미, 방효성, 엄경애, 이혁발, 신용구, 테러제이, 기엌, 마네트, 심철종, 정갑용, 조성진, 신도원, 김영아, 최진, 김용문, 박이창식, 심희정, 노재철, 한영애, 성백, 타이거백, 백운지, 문정규, 소냐한, 박성호, 신미아, 황민수, 김백기 등이었다.30)


 이듬해에 열린 <2003실험예술제>(2003.9.13-9.30)는 국제전 성격을 띠었다. 참여작가는 이탈, 류환, 변영환, 성능경, 이건용, 임택준, 박주영, 김광철, 문경자, 임순종, 정강자, 김백기, 한젬마, 문재선, 무세중, 심철종, 이윰, 방효성, 박이창식, 신도원, 김미경, 소니아, 한영애, 조영호, 심홍재, 채송화, 김현철, 최정혜, 이정희, 이수, 김석환, 김춘기, 테러제이 등이다. 또한 이 행사에서는 ‘1. 퍼포먼스, 표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2. 한국, 일본, 호주의 퍼포먼스의 특징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한국 퍼포먼스의 현황과 문제점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31) 


 2004년에 홍대앞에 있는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의미있는 국제 퍼포먼스 행사가 열려 눈길을 끌었다. [2004서울 콩그레, 10th International Congress for Art Performance-Seoul)]32)은 1987년에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새크라멘토에서 갤러리 소토도(SoToDo)의 발의로 시작된 국제 순회전인데, 10회를 맞이하여 한국에서 열렸다. ‘Welcome Gold’를 주제로 한 이 퍼포먼스 페스티벌은 “다국적 독점자본주의의 세계화로 인해 인류생존이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써 비판적인 행동주의 미학을 표방하였다. 이 행사에 한국에서 김윤환, 김현숙(강), 성능경, 안치인, 용해숙, 이온, 조영아, 조용신, 채송화, 한젬마, extra people, KoPAS, FERODO 등이 참가하였으며, 독일을 비롯한 12개국에서 38명의 작가가 초대를 받은 대규모 국제행사였다. 이 행사에 참여한 해외작가 중 일부는 5회 광주비엔날레의 5전시실에서 열린 ‘The Club’전에 초대되는 등 대대적인 호평을 받았다.33)


  퍼포먼스의 아카이브 자료 수집과 관련해서는 문재선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문재선 아시아 행위예술 아카이브 컬렉션’은 질량 (質量)면에서 주목할 만한데, 이 자료들을 통해 아시아 퍼포먼스의 현황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문재선은 2008년 [제1회 판아시아(Performance Art Network ASIA)]를 결성, 2012년까지 지속하였으나 현재 잠정적으로 중단된 상태이다.


 홍오봉이 운영하는 [부천퍼포먼스아트페스티벌(BIPAF)]은 2002년에 창설,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매년 부천역사에서 개최하는 이 행사는 장소특성상 대중과의 호흡을 중시하며, 국제전으로서 비록 저예산으로 운영되지만 내용은 알찬 퍼포먼스 페스티벌이다. 참여작가로는 일본의 세이지 시모다를 비롯하여 홍콩의 모키유(Mokchiyu) 등이 있으며, 국내작가로는 황민수, 김석환, 문정규, 성능경, 도지호, 김은미, 채송화, 박미루, 홍오봉, 김영원 등이 참가하였다. 도지호가 창설한 [김천국제행위예술제]는 2001년에 창설되었으며, 국제전으로서 경북지역 퍼포먼스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34)


 끝으로 이 시기에 활동한 작가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강성국, 권여현, 김계현, 김미루, 김백기, 김석환, 김영원, 김은미, 김주영, 노재철, 도지호, 류환, 무혜(문유미), 문재선, 문정규, 박이창식, 박주영, 배달래, 변영환, 성능경, 성백, 소니아, 신도원, 신용구, 신진식, 심영철, 심홍재, 안정, 안필연, 왕치(Wangzie), 유지환, 윤명국, 이건용, 이경호, 이승택, 이윰, 이탈, 이혁발, 임택준, 정연민, 조성진, 조은성, 채송화, 펑크파마, 한젬마, 홍오봉, 등등.




Ⅴ. 나가는 말


 한국 행위미술 태동 5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이 전시는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행위미술이 한국미술의 변방에서 일어난 예술적 사건들의 총체가 아니라, 한국 전위미술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새로운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위미술이 실험미술내지는 현대미술과 동의어로 간주돼 온 저간의 관례에 비쳐볼 때, 50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의 행위미술은 이제 그 면모를 낱낱이 드러냄으로써 역사적 검증과 평가를 받아야 할 단계에 도달했다. 이번 전시가 약 2천 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아카이브 자료들로 구성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사실 50년에 걸친 행위미술의 도정에서 생성된 각종 아카이브 자료들은 현재 전시되고 있는 양의 수십 배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전시기획 과정에서 이를 선별하는 일은 매우 힘들었는데, 한정된 공간에 효율적으로 배열하기 위해 많은 방법들이 검토됐다. 본 전시는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대구미술관이 주최한 이번 전시는 한국 행위미술 40주년을 맞이하여 2007년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전과 함께 한국현대미술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전시이다. 이 전시는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50년에 달하는 한국 행위미술의 역사를 실증적이고도 입체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는 점에서 향후 이 분야의 미술사 서술에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그동안 한국 현대미술사 기술에서 누락되었던 대구의 [12월-퍼포먼스, 동성로](1981), 대전의 [19751225](1975), [대전 78세대](1978), 공주의 [금강현대미술제](1980), [야투](1981), 수원의 [컴아트그룹](1990) 등등 지역에서 일어난 행위미술 운동을 발굴,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기존의 행위미술사를 보완했다는 점에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정상 초대작가들의 작품 소개에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던 것과 4부에서 전국의 수많은 퍼포먼스 페스티벌들의 방대한 아카이브 자료들를 충실히 반영하지 못한 일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도전과 저항의 이단아들전 도록 서문, 대구미술관, 2018>



1) [청년작가연립]전을 가리킴, 윤진섭, 한국행위미술50년사, 「Art in Culture」, 2018년 4월호, 91쪽.

2) 이 전시는 두 개의 파트로 구성되었다. 1부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 : 1960-80년대의 저항]과 2부 [한국 행위미술 50년 : 1967-2017]이 그것이다.

3) 1967. 12. 11-16 중앙공보관 전시실 전관에서 열렸으며, ‘무’, ‘신전’, ‘오리진’ 그룹이 참여하였다. 이 전시에 참여한 단체의 동인은 다음과 같다.

   ‘무’동인 : 김영자, 문복철, 이태현, 임단, 진익상, 최붕현

   ‘신전’동인 : 강국진, 김인환, 심선희, 양덕수, 정강자, 정찬승

   ‘오리진’동인 : 김수익, 서승원, 신기옥, 이승조, 최명영

4) 기존의 미술사에서 한국 최초의 해프닝으로 이것을 꼽는 것은 관례화돼 있다. 그러나 나는 [가두시위]가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보다 먼저 발표되었기 때문에「가두시위」를 한국 최초의 해프닝으로 삼고자 한다. 그 타당한 근거로는 당시 이 시위를 ‘한국 최초의 해프닝’으로 보도한 주간한국 1967년 6월 9일자 기사가 있다. 여기서「가두시위」가 한국 미술사상 최초로 나타난 ‘정치적 데먼스트레이션’이란 점이 중요하다. 이 해프닝은 이듬해에 벌어진 ‘한강변의 타살’과 함께 80년대에 나타난 정치적 아방가르드, 즉 민중미술의 선례가 되는 것으로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의 미술사가 구로다 라이지(黑ダライ兒)도 유사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는 미술사가 김미경이 ‘가두시위’의 전거로 삼은 1957년 11월 2일, 큐슈파(九州派)의 가두시위가 ‘앵포르멜 야외전’을 선전하기 위한 농민 축제적 성격의 퍼레이드인 반면, [청년작가연립]전 멤버들의 시위는 국전과 미술행정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시노동자의 정치적 데모를 연상시킨다고 지적하고 있다. 구로다 라이지(黑ダライ兒), 「 肉体のアナーキズム-1960年代ㆍ日本美術におけるパフォーマンスの地下水脈. グラムブックス, 2010, pp. 130-131. KuroDalaiJee, Anarchy of the Body:Undercurrents of Performance Art in 1960s Japan. grambooks.

5) ‘무체사상’을 이념적 배경으로 삼아 김구림이 결성을 주도한 토탈아트 지향의 단체이다. 1970년 6월 20일 소림다방에서 결성식을 가졌으며, 회원은 정찬승(미술), 방태수(일명 방거지/연극), 손일광(의상), 고호(판토마임) 이익태(영화) 등등 이었다.

6) 윤진섭, 한국의 초기 ‘해프닝(Happening)'에 관한 연구, 「예술논문집」, 대한민국예술원, VOL.49, 2010, 114쪽.

7) 여기서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후반에 걸쳐 전개된 해프닝과 이벤트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 도록에 실린 미술사가 조수진의 글을 참고할 것.

8)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 위치한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임.

9) 이러한 움직임은 80년대 초반의 행위미술이 서울보다는 지역에서 먼저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사례들이다. “1981년 야외에서 자연과의 교감을 꾀하는 작업에 주력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를 결성, 공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작업현장을 사진으로 기록, 자료집을 발행하였다. 임동식을 비롯하여 고승현, 강희중, 이응우, 고현희, 김해심, 정장직, 이종협 등등 충남권 작가들이 중심이 된 이 그룹은 8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대중의 관심이 적었던 자연과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꾸준히 작업을 전개, 훗날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창설하는 중심이 되었다.”

   윤진섭, 1980년대 한국 행위미술의 태동과 전개,「한국 행위미술 1967-2007」, 국립현대미술관 도록, 결출판사, 2007, 102쪽.

10) 참여작가는 이교준, 안승영, 박두영, 한용채, 여상규이다. 한편, 이보다 앞선 1980년 10월 17일 삼보갤러리에서 열린 [전개그룹]전에서 이교준과 안승영의 이벤트가 있었다.  

11) 대구는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의 창설에서 보듯이, 일찍부터 현대미술이 강세를 보인 도시이다. 김영진은 1978년 제4회 [대구현대미술제]에 참가하면서 대구 근교인 냉천에서 <Balloon+Visitors_List>라는 관객참여형 이벤트를 벌였는데, 이 작품은 관객들이 소원을 적은 종이를 고무풍선이 달린 긴 줄에 매달아 허공에 띄우는 것이었다. (김영진과의 전화 인터뷰. 2018. 4. 10). 70년대 후반부터 [대구현대미술제]를 중심으로 야외에서 현장 이벤트가 이루어졌는데 이 전시 또한 이러한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낙동강변에서 열린 이 전시에서 이벤트를 한 작가는 강용대, 김철겸, 박건, 안치인, 이두한, 이현재, 장금자, 홍현표 등이다.

12) 윤진섭, 앞의 책 102-103쪽 참고.

13) 야외작품을 위한 캠핑(1회:1975.8.1-4, 2회:1976.8.2-5, 안면도 꽃지 해변), 제3회 야외작업을 위한 피크닉(1976.10.24:경기도 광능숲)외 다수. 이 일련의 야외행사에서 회장인 정관모를 비롯하여 전국광, 유병훈, 임동식, 이일호, 장식 등 많은 회원들이 야외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이는 대부분 현장의 자연물을 이용한 즉흥적 행위였다. 1975년에 이종협, 징길호, 정장직이 창립한 대전의《19751225》그룹 역시 이듬해에 공주 내평리(유근영, 이종협, 정장직, 정길호)와 대탑 백사장(서진호, 유근영, 이종협, 정길호 참가) 일련의 야외 현장작업을 벌인 바 있다.       

14) 이러한 현상을 대변하는 것이 1988년 한국행위미술협회의 창립이다. 초대회장에 윤진섭, 부회장에 한상근(무용), 이두한(미술) 등이 선출되고 자문위원에 강국진, 김구림, 무세중, 성능경, 심우성, 이건용, 이만방이 위촉되었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윤진섭의 앞의 글을 참고할 것. 

15) 윤진섭, 1980년대 한국 행위미술의 태동과 전개,「한국 행위미술 1967-2007」, 국립현대미술관 도록, 결출판사, 2007, 103쪽.

16) 김미경의 박사논문「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00), 조수진의<‘제4집단’ 사건의 전말 :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미술사학보 제40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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