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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바다

윤진섭

침묵의 바다

                                         윤진섭(미술평론가)


 김승현은 1997년에 화단에 입문하여 현재까지 작업을 맹렬히 지속하고 있는 대구의 작가이다. 작가의 길로 들어선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 이름이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대작 위주의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그림에 대한 그의 내공이 상당함을 느꼈다. 단색의 작품들은 침잠한 듯 가라앉아 보였지만, 오래 응시할수록 강한 힘이 느껴졌다. 단순함에서 오는 그 느낌은 역설처럼 보이는 아주 강렬한 체험이었다. 
 김승현이 단색 위주의 작업을 시작한 것은 2007년 이었다. 그 때는 단색화의 열풍이 불기도 전이니 그림에 대한 그의 뿌리가 매우 깊은 것임을 말해준다. 대구는 현대미술의 메카로서 지난 70년대 이후 미니멀한 경향의 회화가 강세를 이룬 곳이다. 일일이 이름을 거명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작가들이 70년대 중반 이후 대구의 화맥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승현 역시 그러한 미니멀한 회화의 화맥을 잇고 있는 젊은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김승현의 작품은 침묵의 바다와도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색만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것을 내포한 색이다. 군청, 검정, 노랑, 암록색,  고동색 등 단일한 색깔들이 거대한 캔버스를 뒤덮고 있다. 관객들은 전시장 벽에 걸린 작품들에 다가가면서 비로소 한 가지 색깔로 보이는 그 작품들이 실은 빨강, 노랑, 파랑, 녹색의 미묘한 혼합물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작가가 수없이 반복한 지난한 행위의 결과물이다. 관객이 만일 벽에 걸린 커다란 캔버스의 옆면을 본다면 빨강, 노랑, 파랑, 녹색의 물감이 흘러내린 무수한 자취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승현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이 행위성은 그의 작품을 육화(肉化)시키는 요인이다. ‘육화’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체화(體化)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예술가가 품고 있는 의취(意趣), 다시 말해서 정신이 물감이라는 매개를 통해 캔버스 위에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육화요 체화인 것이다. 김승현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이 수행성은 그의 작품을 단색화에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이다. 연령적으로 볼 때 그는 후기 단색화 작가군(群)에 속하는 작가이다.  
 김승현이 2007년 이후에 단색화 작업을 시작했다고는 하나 기실 그는 그 이전인 1997년 이후부터 2007년 이전에 이르는, 약 10여 년에 걸친 작업에서도 역시 단순한 경향의 작업을 지속해 왔다. 2007년, 대구문화예술회관 에서 열린 개인전의 출품작들 역시 단색화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때 김승현은 단색으로 바탕칠을 한 캔버스 위에 걸쭉한 단색의 물감을 얹고 이를 다양한 크기의 쇠주걱으로 민 작업을 선보였다. 노랑, 검정, 파랑, 빨강, 녹색이 주조를 이룬 이 무렵의 작품에서 물감을 여러 번에 걸쳐 칠하는 행위의 반복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청색 바탕에 노랑, 금색 바탕에 검정, 청색 바탕에 빨강, 녹색 바탕에 검정색 물감을 덧입히는 가운데 행위의 족적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것은 동일한 행위의 반복이라기보다는 마치 전통적인 동양화의 사군자(四君子) 가운데 대나무 그림에서 한 획을 긋는 것과도 같은 방식이었다. 150호 사이즈의 캔버스 3-4점을 연이은 이 대작들은 나타난 결과를 볼 때 기계적이며 동일한 시각적 효과보다는 색의 강약에 따른 손맛을 드러냈다. 캔버스의 표면을 지나가는 종횡의 선의 띠들은 일정한 폭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같은 크기의 쇠주걱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김승현의 작업은 마치 스퀴즈로 민 실크 스크린 판화의 효과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그가 한 가지 색으로 밑칠이 된 캔버스 위에 물감이 묻은 쇠주걱을 손으로 밀 때 나타나는 효과가 마치 실크스크린 판화에서 물감을 스퀴즈로 밀 때의 방식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금색의 바탕 위에 대나무를 태워서 만든 가루를 접착제와 섞어 바른 검정색 그림은 김승현이 기존의 유화나 아크릴 물감과는 다른 효과를 줄 수 있는 안료를 개발하고자 애쓴 흔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천연재료의 개발은 그 후 지속되지 않고, 이후에는 다시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게 된다. 
 2007년 이후의 작품들이 그 이전과 다른 것은 물감층의 중첩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행위의 반복성의 등장은 캔버스 위에 균질하게 칠해진 물감층이 나타나는 2007년 이후의 작업에 이르러서 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캔버스 위의 색의 효과는 전적으로 발색에 의존한다. 김승현의 작품에서 이 발색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그것은 왜 그가 빨강, 노랑, 파랑, 녹색 등 원색을 교차해서 반복적으로 칠하는가 하는 행위에 대한 설명을 해 준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서 이 발색의 원리를 바탕으로 작업을 한다. 색은 같은 검정이라도 밑색에 따라 천차만별의 색채효과를 낳게 마련인데, 이는 물론 말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다. 그것은 작가만이 아는 신비의 영역이며, 정신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래서 김승현의 작업은 실패율이 높은 편이다. 
 김승현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기본적인 색으로 시작해서 기본적인 색으로 끝낸다”는 신조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현재 그의 회화관(繪畫觀) 이다. 빨강, 노랑, 파랑, 녹색은 그의 작업의 4원소이다. 그는 이 색들을 이용해서 마치 연금술과도 같은 과정을 거쳐 관객이 전시장에서 마주하는 색을 제조해내는 것이다. 이때의 색은 검정으로 보이는 색이라도 같은 검정이 아니며, 노랑색이라도 물감의 원색과는 다른 노랑이다. 작가의 사념(思念) 속에 든 색은 작가만이 알 수 있는 색이며, 작가는 그 색의 이상적인 최대치에 가까운 색을 이끌어내도록 노력하고 그 감정이 색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분야는 다르지만 동양화의 사의(寫意)에 비견될 수 있는 차원이다. 물감과 물감과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얻어진 캔버스 위의 최종적인 색깔은 작가와 관객과의 상호 소통과 공감을 전제로 한다. 김승현은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때 작업을 끝낸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할 때, “이것이다” 하는 순간의 느낌에 대한 기다림은 작가와 관객 사이의 감정의 교류와 그러한 감정의 공유를 위해 작가가 기울이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김승현은 그렇지 못한 작품을 전시할 때 한없이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그가 이번에 갖는 개인전이 무려 1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창작에 기울이는 그의 마음가짐이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번 개인전의 출품작들은 작업실에 산더미처럼 쌓인 대작들 중에서 수작(秀作)들 이다.  
 아크릴 물감을 묽게 희석시켜 넓은 붓으로 칠한 김승현의 대작들은 아무런 꾸밈이 없다. 크기가 커서 일종의 숭고미마저 느껴지는 그것들은 천천히 다가가거나 점점 멀어지면서 찬찬히 감상을 해야 제격이다. 그러는 가운데 붓맛과 색의 뉘앙스를 섬세한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단색화 류의 작품 감상은 수준 높은 교양과 안목을 필요로 한다. 이른바 작품의 ‘질’을 알아볼 수 있는 감식안의 소유자들은 높은 질적 수준에 도달한 작품을 감별해 낸다. 김승현의 작품이 그런 수준에 도달해 있는 지는 지금의 단계에서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어떤 지점을 위해 지금까지 오랜 동안 전시참여를 절제해 온 만큼, 그리고 40대라는 그의 연령을 고려해 볼 때, 향후 찾아 올 그날을 우리는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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