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1960-70년대의 단색화 : 심화와 확산

윤진섭

1960-70년대의 단색화 : 심화와 확산

                                         윤진섭

Ⅰ.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단색화가 차지하는 위상은 과연 무엇인가? 1957년을 본격적인 한국 현대미술의 기점으로 간주하는 미술사, 비평계의 일반론을 수용한다면, 1970-80년대의 한국 화단을 점유한 단색파의 등장은 1950년대 후반에 출범하여 60년대 중반에 종언을 고한 ‘앵포르멜/비정형(Informel/ Bijunghyung)’ 세대의 ‘화단 재탈환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굳이 ‘작전’이라는 말을 사용한 까닭은 전위(avant-garde)가 본래 군대 용어에서 차용된 사실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전이 전쟁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까지 활동한 일군의 ‘탈(脫)’ 회화 세대, 즉 <무>, <신전>, <오리진> 동인 등이 연합한 [청년작가연립전](1967) 세대와 <신체제>, <S.T(Space & Time)>, <A.G(Avant-garde)>, <제4집단> 등의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집단들의 격렬한 저항적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해프닝을 비롯하여 대지미술, 오브제, 설치미술 등 평면을 벗어난 미술의 새로운 방법론들이 앵포르멜 세대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일의 <<한국ㆍ‘70년대의 작가들>>(1978)은 박서보를 비롯한 앵포르멜 세대가 한국미술협회를 중심으로 화단의 헤게모니를 장악, ‘단색화’라는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화단을 획일화한 이후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가 ‘70년대의 작가들’이라고 통칭한 사람들은 권영우, 김용익, 김진석, 박서보, 윤형근, 이동엽, 진옥선, 최병소, 김기린, 김창열, 이우환 등 단색파(Dansaekpa)의 핵심 멤버들이며, 이들이 바로 동경의 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한국ㆍ현대미술의 단면전]의 초대작가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김구림, 이강소, 심문섭과 같은 탈회화적 경향을 보이는 실험 작가들이 포함돼 있으니, 이는 한국 현대미술을 일본에 소개한다는 명분하에 한국 현대미술의 경향을 골고루 담으려는 목적으로 짐작된다. 이일은 전후 한국 현대미술을 분석하는 키워드로 ‘환원’과 ‘확산’을 내세웠는데, 환원은 주로 단색화 계열을, 확산은 탈회화의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작업을 지칭한다. 
  
 한국현대사에서 1970년대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 시대였다. ‘희망’이란 근대화 정책을 통해 한국이 전례 없이 눈부신 경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요, ‘절망’이란 그러한 경제적 도약의 이면에 목표 달성을 위한 인권의 탄압이 상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색화는 이처럼 희망과 절망이 혼재하던 시기에 탄생한 ‘이념의 독자(獨子)’였다. 서구에서 발원한 다양한 미술사조들의 범람 속에서 독자적인 ‘미적 가능성’을 잉태한 그것은 당대의 미술제도에 힘입어 70년대를 통해 번창해 나갔다. 
 재일화가 이우환과 한국화단과의 관계는 이 시기 화단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1950년대 후반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우환은 60년대 후반에 작가 겸 평론가로 일본 화단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는 세끼네 노부오, 스가 기시오와 같은 모노파(Monoha) 작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우환은 박서보를 비롯한 단색파 작가들과 교류를 갖게 되면서 한국 작가들을 일본에 소개하는 중개자 역할을 했다.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 사장의 조선 백자에 대한 관심은 훗날 한국 단색화가  해외에 소개된 첫 사례인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이우환의 <<한국 현대미술의 문제점>>과 일본의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의 글은 한국 단색화를 둘러싼 문제점과 특색, 시대적 배경, 그리고 전망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데, 특히 나카하라 유스케의 글은 단색화에 관한 한 기념비적인 전시인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의 서문으로서 외국인의 관점에서 본 한국 단색화의 세계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평면성 개념을 중심으로 ‘미적 모더니티’의 발현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단색화였다. 그러한 까닭에 그것을 동시대 관객의 인식 수준에서 알아차리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 이유는 평면성을 둘러싼 미술의 문법이 매우 생소하고 난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근대의 소산이었다. 서구의 역사가 입증하듯이, ‘미적 모더니티’란 근대사회의 긴 역사적 터널을 통과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근(斤)’이나 ‘척(尺)’과 같은 전통적 도량형의 잔재가 채 가시지 않은 당대의 의식 수준으로선 이해가 난망한 일이었다. 이른바 근대가 체질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의 내면화란 기대 자체가 성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박서보를 비롯하여 하종현, 정상화, 권영우, 이우환, 서승원, 최명영 등의 인터뷰 기사는 당시 작가들이 무엇을 생각했으며, 어떤 이념과 미학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문헌들이다.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미적 모더니티가 막 발아하던 당시에 작가들이 무엇을 고민했는지, 그리고 서구라는 산을 넘기 위해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대응을 해야 했는지 하는 절실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술평론가로서 이일(1932-1997)의 역할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귀국하여 196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부임한 그는 비단 단색파 뿐만 아니라, 1960년대 후반이후 작고한 1997년까지 한국의 추상미술과 실험적인 전위미술의 형성과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환원’과 ‘확산’으로 요약되는 그의 비평적 키워드는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문화예술계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을 ‘확산’으로 해석하는 등 매우 예지적이며 암시적이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비단 60-70년대뿐만 아니라, 9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글을 접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화단에 끼친 그의 막강한 영향력을 말해준다. 권영우, 김기린, 박서보, 정상화, 서승원, 최명영, 윤형근, 허황 등 단색파 작가들에 대한 이일의 비평문들은 단색화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도울 것이다. 한편,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70년대 단색화의 특징을 ‘비물질화’로 규정하였다. 물질이 아닌 비(非)물질로서의 정신성을 단색화의 특징으로 든 것이다. 이우환과의 인터뷰와 윤형근에서 관한 평문을 통해 70년대 당시 단색화에 대한 그의 사고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단색화 발흥의 이면에는 일종의 화단정치적 복선이 깔려있었다. 그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전후(戰後) ‘앵포르멜 세대의 귀환’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미적 취향’의 문제가 개재돼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1956년, 동방문화회관에서 열린 [4인전]의 작가들, 즉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박서보에 의한 ‘반(反)국전 선언’은 그것이 다분히 정치적인 함의를 지닌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구태의연하고 고루한 ‘국전풍’에 대한 ‘취향’의 문제가 깔려 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2년 뒤인 1958년의 제4회 [현대]전에 이르러서 이다. 이른바 ‘비정형(Informel)’이라고 하는,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풍의 추상회화가 전면적으로 부상되기에 이른 것이다. 비정형 회화는 미술평론가 이경성이 ‘미의 전투부대’라고 부른 현대미협의 멤버들, 즉 김서봉, 김창렬, 김청관, 나병재, 이명의, 이양로, 박서보, 안재후, 장성순, 전상수, 조동훈, 하인두 등등에 의해 반(半) 구상화풍에서 완전한 추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당시 이 전시를 본 방근택은 ‘한국 최초의 소위 앵포르멜의 집단적 출현’을 맞이하게 되었다며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우리는 이 앵포르멜 세대가 20여 년 뒤에 단색화의 주역으로 부상하게 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한국 단색화의 요체는 무엇보다 정신성, 촉각성, 행위성에 두어진다. 이 요체가 전기 단색파 작가들의 작품 속에 고르게 스며있다. 이들은 그러나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 안에서 서로 겹치거나 스며드는 가운데 궁극의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가령, 촉각성은 행위의 ‘반복’을 통해 마치 선(禪) 수행하듯 종국에는 고도의 정신성을 획득한다. 과정으로서의 단색화의 제작 방식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수행(performance)’이라고 할 수 있다. 이우환의 반복되는 선과 점의 행렬, 박서보의 반복되는 선묘, 정상화의 반복되는 물감 뜯어내기와 메우기, 윤형근의 반복되는 넓은 색역(色域)의 중첩, 정창섭의 반복되는 한지의 겹칩, 하종현의 반복되는 배압(背壓)의 행위, 김기린의 반복되는 물감의 분무(噴霧) 행위 등 반복적 행위는 이들의 작품 속에 고르게 녹아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일본의 모노하에 비평적으로 깊이 관여하는 동시에 작가로 활동하던 재일작가 이우환은 일본과 한국을 왕래하면서 70년대 당시 미협 부이사장(1970-1976)과 이사장(1977-1980)으로 재직하면서 화단의 중심 역할을 하던 박서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의 단색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일에 열중했다. ‘만남을 찾아서’란 제목의 평문으로 일본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이우환은 작가 및 평론가로 한국 화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미술협회의 행정력을 바탕으로 박서보와 이우환은 단색화를 비롯한 한국의 현대미술을 일본에 소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초의 대규모 기획전인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전](동경센트럴미술관:1977)을 비롯하여  [Work on Paper](동경화랑:1978), 대규모 순회전인 [한국 현대미술-70년대 후반:하나의 양상전](동경도미술관, 도지키현 근대미술관, 후쿠오카시립미술관:1983) 등은 이 시기에 일본에서 열린 대표적인 한국의 현대미술 관련 전시회들이다. 

 그러나 1960-70년대의 한국 사회를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각종 언론 통제와 공작정치를 통해 국민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 표현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색화 작가들의 침묵이 과연 서슬퍼런 군부통치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었는지 체제에의 순응이었는지는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치밀한 분석을 통해 밝혀지겠지만, 70년대 후반에는 군부통치에 저항하는 미술인들의 움직임이 집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실과 발언>은 그 대표적인 단체로 이른바 ‘민중미술(Minjoong Art)’의 효시이다. 민중미술은 군부통치와 제도미술에 대한 비판을 통해 80년대에 이르러 더 많은 작가들의 호응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 화단은 ‘순수’와 ‘참여’로 양분된 채 80년대를 마감하게 된다. 

        <Dansaekhwa 1960-2010s : Primary Documents on Korean Abstract Painting, 예술경영지원센터 발행, 원고, 2017>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