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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만 낯선 풍경들

윤진섭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들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주최하는 2018년도 <작가상>은 권여현에게 돌아갔다. 이 상은 제1회 수상자로 조각가 정현을 배출한 이래 한국화가 석철주, 사진작가 민병헌 등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중견 내지는 중진작가들을 선정, 매년 수상해 왔다. 동 협회는 이 상의 제정 취지에 대해 “자기 세계를 굳건히 지키면서 새로운 경지를 모색하는 작가에게 이 상을 수여”한다고 밝히고 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권여현에게 이 상이 돌아간 것은 지난 30여 년간 그가 보여준 왕성한 실험정신과 매체에 대한 개방적 의식, 그리고 철학을 비롯한 현대의 다양한 정신문화를 흡수, 소화하여 자기화하려는 꾸준한 욕망을 높이 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실로 권여현은 하나의 스타일(樣式)을 개발하면 평생토록 우려먹는 안주형(安主型)의 작가들과는 달리 다양한 변신을 거듭해 왔다. 나는 어느 글에선가 그런 그를 가리켜 ‘변신의 천재’라는 수사(修辭)로 그를 묘사한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권여현은 회화를 중심으로 오브제, 설치, 사진, 미디어 아트, 퍼포먼스, 그리고 최근에는 실험영화에 이르기까지 가히 전방위적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왕성한 활동의 배경에는 과연 어떤 요인이 잠재돼 있는가? 화단 데뷔 초기부터 그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 왔고, 또 그의 작품세계에 관한 글을 수차례에 걸쳐 쓴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좀 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정열의 원동력이 되는 심리적 요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처 모르는 게 많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작가를 다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작업이라는 것이 작가 자신도 완전히 다 알지 못할 만큼 불가해한 측면이 있으며, 더구나 우연적인 요소마저 감안한다면 특히 동시대미술에 나타나고 있는 저 다양한 개념적인 양태들은 작가를 일종의 신비스런 베일 속에 안치하기에 매우 적합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권여현의 작품이 어려워 보이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가 화면에 깔고 있는 허다한 지식의 원천 때문이다. 관객들이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림에 나타나고 있는 무수한 도상들의 출처(원전)를 알아야 하며, 나아가서는 그것들이 그에 의해 현재화되는 미술사적 내지는 문화사적 맥락은 물론 왜 그것들이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작가의 심리적 동인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그 이면의 실상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90년대 초반에 내가 그를 가리켜 ‘내밀한 독백형의 작가’라고 요해한 것처럼,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고 가는 명주실을 뱉어내듯이 의식의 화학적 변화의 결과물인 그의 진술에 대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권여현의 그림을 관류하는 도식은 ‘Y’라고 하는 시간축과 ‘X’라고 하는 공간축의 교차점이었다. 비유하자면 그는 바둑판처럼 두 축이 교차할 때 생기는 무수한 정방형들로 이루어진 판상에 정교한 의식의 풍경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작가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의 추이를 일종의 의식의 흐름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이러한 시도는 미궁처럼 복잡해 보이는 기호와 상징, 그리고 영상들로 가득 찬 작품들을 낳았다. 그 요체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90년대 초반에 쓴 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그것은 곧 ‘거울’과 ‘벌레’로 대변되는 두 개의 메타포이다. 전자는 ‘나르시시스트’로서의 작가 본연의 모습이고, 후자는 변신의 천재로서의 권여현의 면모이다. 이 두 가지의 메타포가 구체적으로 표상된 것이 다름 아닌 등장인물로서의 전경(前景)이라고 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X-Y의 두 축은 일종의 에피소드요 삽화로 후경층(後景層)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요소를 통해 그의 그림의 내용이 실은 이 두 개의 메타포와 요소들의 복잡한 변형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의식의 투영과 인식 지평의 확장-권여현 론(論), 1994>-



 그로부터 다시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것은 과연 어떻게 변했는가? 이제 권여현의 작품세계는 더욱 확장되고 복잡다기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단절이 아닌 연속의 양상을 띠고 진화해 온 그 세계의 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문화의 내면화이다. 이미 그는 90년대 초반에 산적(Kebab>, 깔때기, 물맷돌(water millstone)과 같은 일상용품의 등장을 통해 동서양의 명화들을 한 자리에 공존시키는 회화적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F. 니체와 춘원, 말러의 초상화와 혜원의 도상을 화면에 등장시키는 가운데 선형적(linear)이 아닌 리좀적(rhizomatic) 시간관을 도입시킨 것이다.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닌 맥거핀(Macguffin)1)의 세계는 이의 보다 정교하며 확장된 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다.



Ⅱ. 

 맥거핀 욕망이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인 권여현이 스스로의 내면세계에 빠져들면서 다양한 독서와 동서양 명화의 감상 체험에서 얻은 다채로운 개념의 그물망을 직조해 내고 그 안에 자신을 유폐시킨 미궁의 풍경이다. 이 개념은 역시 그가 고안해 낸 다른 두 개념들, 즉 ‘통합혼성체(Syntagm : syntagm+hybrid)’와 ‘뿌리줄기의 숲(Rhizome forest)’과 함께 그가 그려내고 있는 미궁을 탐사하는데 필요한 일종의 탐사지도와도 같다.2)    

 2007년에 발아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진화해 간 권여현의 숲 그림은 동서양 명화 이미지의 집합소이자 다양한 상징과 기호들의 저장고이다. 그의 숲그림은 한 번에 쓱 훓어보는 일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미세한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서 비밀을 풀어야 하는 ‘읽기’로서의 이해의 대상에 가깝다. 맥거핀은 이 과정에서 작가가 그림의 도처에 심어놓은 지뢰와도 같다. 무수한 동서양 명화의 이미지들을 차용하거나 번안 혹은 패러디한 그의 그림에서 가장 큰 난점은 관객이 그러한 이미지들의 원작과 나아가서는 출처와 관련된 배경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앞에서 철학과 미술사내지는 문화사를 언급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앞의 전제들을 관객이 무사히 통과했다 하더라도 작가가 깔아놓은 함정, 즉 맥거핀의 지뢰를 밟는 경우이다. 작가가 관객의 시선을 끌기위해 의도적으로 고정시켜 놓은 장치에 관객의 시선이 포획될 경우 작품의 올바른 이해는 빗나가기 일쑤이다. 그것은 어째서 그러한가?

 <Rhzome forest>, <박쥐-리좀>, <루 살로메의 숲>, <창세기의 숲>, <헬로 들레즈씨>, <프쉬케의 숲>, <아르테미스의 숲>, <<아폴론과 다프네의 숲>, <잔 다르크의 숲> 등등의 명제에서 보듯이, 그가 2008년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그린 수많은 숲그림들을 관류하는 특징은 칡넝쿨들이 사방에 엉킨 원시림을 소재로 한다는 점이다. 들뢰즈가 말한 리좀 개념의 상징물로 보이는 이 칡넝쿨은 일종의 그물망(net)의 메타포로 기능하며, 대상의 포획을 암시한다. 앞에서 최태만이 언급한 것처럼 철저히 손에 의존하는 그의 그림은 2009년에 발표한 그의 퍼포먼스 <구도자>에서처럼 오체투지에서 오는 고행의 연장으로써 신체성이 강조되는 고행의 산물이다. 그것은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는 무수한 그물망으로 뒤엉킨 그림에서 숨은 그림 찾기를 수행하듯 미궁 속에 숨겨진 암호를 풀어가는 지난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의 독해에는 난해한 텍스트의 이해를 위해 각주가 붙듯 무수한 참고물들이 필요하다.   

 권여현의 그림에는 문명에 의해 훼손되기 이전의 싱싱한 원시림이 펼쳐진다. 짙은 녹색과 파란 하늘, 비옥한 황토색의 땅으로 대변되는 이 이상향은 작가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비원(秘苑)이다. 그 곳에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 속에 나오는 도상3)을 일부 차용한 장면이 나타나기도 하며(<다이아나와 프리다 사슴>, 234x91cm, 캔버스에 유채, 2008), 숲은 루소의 소박한 풍으로 그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권여현은 근대 이전의 싱싱한 자연의 상태로의 회복을 동경한다.4)

 권여현의 2013년 작품인 <리좀 나무-폭포>(227x187cm, 캔버스에 유채)는 원시림 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묘사한 대작이다. 이 그림에는 이미 1990년대에 시도한 동서융합의 정신이 더욱 치열하게 나타나고 있다. 동양화의 근간인 기운생동에 의한 필력과 중국의 사혁(射赫)이 말한 골법용필, 그 중에서도 몰골법에 의한 사물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마치 아마존의 숲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장쾌하게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를 배경으로 수많은 벌거벗은 남녀들과 동물들이 나무 위에 서거나 거꾸로 매달려 있다. 한 두 사람은 이제 막 높은 나무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권여현의 숲그림을 관류하는 특징은 특유의 야생성이다. 거기에 벌거벗은 인간군상이나 명화 속의 이미지들이 마치 거미줄과도 같은 넝쿨들에 포획돼 있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그것들은 베일에 가려진 것이나 진배없다. 그것들은 아직 해독(解讀)이 채 안 된 미답의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문명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권여현은 자신의 숲그림을 통해 대중이 무뎌진 감각의 회복을 시도하기 바란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명화되기 이전의 동물로서의 인간, 즉 야생적으로 사고하고 숨쉬는 원초성의 회복을 꿈꾸는 것이다.   

 

1) 권여현이 고안한 ‘맥거핀 욕망(Macguffin desire)’을 가리킨다. 맥거핀은 공포영화의 거장인 알프레드 히치코크 감독이 고안한 영화기법이다. 작품의 전개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 하나 관객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고정시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다.  

2) 미술평론가 최태만은 권여현의 초기작업의 요체를 실존주의로 파악하고 작가가 제시한 제작 원칙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1) 견고한 배경과 얇게 그려진 인간, 2) 부분적 추상과 전체적 구상, 3) 단계적인 제작과정, 4) 각 부분의 다른 양식들, 5) 드로잉의 원리-과감한 두고, 날카로운 직선, 강렬한 광선, 전혀 다른 공간의 조합, 6) 전면 이질적인 추상적 형식은 색채와 내용에 의해 통합된다. (1987년 개인전). 최태만은 권여현의 작업에는 늘 손에 의한 그리기가 있다고 파악한다. 권여현, Macguffin 디자이어, OCI미술관 개인전 도록, 007쪽, 2013.

3) <난 불쌍한 사냥감>. 프리다 칼로는 이 그림에서 몸은 화살을 맞은 사슴으로 표현하고 사슴의 얼굴 대신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4)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권여현의 작업은 비단 회화뿐만이 아니라 설치, 오브제, 사진, 퍼포먼스,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다. 이 세계는 너무 방대하므로 이의 분석을 위해서는 별도의 장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 글에서는 2010년대 전후로 제작된 일부 작품만을 대상으로 삼았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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