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단색화 : 심화와 확산

윤진섭

단색화 : 심화와 확산

윤 진 섭

Ⅰ. 한국의 단색화는 1960년대 초반에 첫 징후가 나타나서 중후반에 걸쳐 간헐적으로 전개된 뒤, 70년대 초반에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권영우는 1962년 제11회 [국전]에 화선지를 여러 번에 걸쳐 두껍게 바른 후, 손톱으로 긁은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그는 이 작품에 <무제>라는 제목을 붙였다. 김환기는 60년대 중반 경, 뉴욕에서 면포에 묽게 갠 청색 유성 물감을 사용하여 무수히 점을 찍어 나가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60년대 후반에 이르면, 김형대, 서승원, 박길웅, 이승조 등 몇몇의 작가에게서 흰색 계통의 단색 작품들이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1972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이동엽, 허황 등의 작품에서 본격적인 단색화의  경향이 나타났다. 단색화는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전 등을 통해 70년대 중반에 이르면 화단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이 무렵에는 획일화의 폐단 또한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Ⅱ. 한국현대사에서 1970년대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 시대였다. ‘희망’이란 근대화 정책을 통해 한국이 전례 없이 눈부신 경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요, ‘절망’이란 그러한 경제적 도약의 이면에 목표 달성을 위한 인권의 탄압이 상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색화는 이처럼 희망과 절망이 혼재하던 시기에 탄생한 ‘이념의 독자(獨子)’였다. 서구에서 발원한 다양한 미술사조들의 범람 속에서 독자적인 ‘미적 가능성’을 잉태한 그것은 당대의 미술제도에 힘입어 70년대를 통해 번창해 나갔다. 
 단색화는 당시의 미술계 상황에서 ‘전위’ 혹은 ‘현대미술’의 동의어로 간주되었다. 고답적인 [국전]의 위세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이 무렵, 단색화는 생소한 회화적 개념과 문법으로 인해 대중은 물론 심지어는 미술인들마저도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사조로 치부되었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평면성 개념을 중심으로 ‘미적 모더니티’의 발현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단색화였다. 그러한 까닭에 그것을 동시대 관객의 인식 수준에서 알아차리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 이유는 평면성을 둘러싼 미술의 문법이 매우 생소하고 난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근대의 소산이었다. 서구의 역사가 입증하듯이, ‘미적 모더니티’란 근대사회의 긴 역사적 터널을 통과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근(斤)’이나 ‘척(尺)’과 같은 전통적 도량형의 잔재가 채 가시지 않은 당대의 의식 수준으로선 이해가 난망한 일이었다. 이른바 근대가 체질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의 내면화란 기대 자체가 성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단색화를 포함, 당시에 유행한 하이퍼리얼리즘, 개념미술, 이벤트, 오브제, 설치, 비디오 아트 등등이 ‘서구적 아류’로 치부, 비판된 데에는 이러한 당대의 문화적 조건과 사회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던 데 기인한다.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조건과 상황에 대한 섬세한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그것을 단순히 ‘서구적 아류’로 치부할 때, 거기에는 부친살해의 ‘이디퍼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존재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단색화 발흥의 이면에는 일종의 화단정치적 복선이 깔려있었다. 그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전후(戰後) ‘앵포르멜 세대의 귀환’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미적 취향’의 문제가 개재돼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1956년, 동방문화회관에서 열린 [4인전]의 작가들, 즉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박서보에 의한 ‘반(反)국전 선언’은 그것이 다분히 정치적인 함의를 지닌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구태의연하고 고루한 ‘국전풍’에 대한 ‘취향’의 문제가 깔려 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이태 뒤인 1958년의 제4회 [현대]전에 이르러서 이다. 이른바 ‘비정형(Informel)’이라고 하는,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혼합한 추상회화가 전면적으로 부상되기에 이른 것이다. 비정형 회화는 미술평론가 이경성이 ‘미의 전투부대’라고 부른 현대미협의 멤버들, 즉 김서봉, 김창렬, 김청관, 나병재, 이명의, 이양로, 박서보, 안재후, 장성순, 전상수, 조동훈, 하인두 등등에 의해 반(半) 구상화풍에서 완전한 추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당시 이 전시를 본 방근택은 ‘한국 최초의 소위 앵포르멜의 집단적 출현’을 맞이하게 되었다며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우리는 이 앵포르멜 세대가 20여 년 뒤에 단색화의 주역으로 부상하게 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Ⅲ. 한국 단색화의 요체는 무엇보다 정신성, 촉각성, 행위성에 두어진다. 이 요체가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 속에 고르게 스며있다. 이들은 그러나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 안에서 서로 겹치거나 스며드는 가운데 궁극의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가령, 촉각성은 행위의 ‘반복’을 통해 마치 선(禪) 수행하듯 종국에는 고도의 정신성을 획득한다. 과정으로서의 단색화의 제작 방식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수행(performance)’이라고 할 수 있다. 이우환의 반복되는 선과 점의 행렬, 박서보의 반복되는 선묘, 정상화의 반복되는 물감의 뜯어내기와 메우기, 윤형근의 반복되는 넓은 색역(色域)의 중첩, 정창섭의 반복되는 한지의 겹칩, 하종현의 반복되는 배압(背壓)의 행위, 김기린의 반복되는 물감의 분무(噴霧) 행위 등 반복적 행위는 이들의 작품 속에 고르게 녹아 있다.  

Ⅳ. 한국의 단색화가 맨 처음 해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5년에 일본의 동경화랑이 주최한 [다섯 개의 흰색, 5인의 작가전]이었다. 당시 동경화랑 사장인 야마모토 다카시는 한국의 백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일찍부터 한국의 단색화에 주목하고 있었다. 일본의 미술평론가인 나카하라 유스케와 한국의 미술평론가인 이 일이 서문을 쓴 이 전시에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 황이 초대되면서 이들의 작품이 일본 화단에 큰 반향을 불려 일으켰다. 
 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일본의 모노하에 비평적으로 깊이 간여하는 동시에 작가로 활동하던 재일작가 이우환은 일본과 한국을 왕래하면서 70년대 당시 미협 부이사장(1970-1976)과 이사장(1977-1980)으로 재직하면서 화단의 중심 역할을 하던 박서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의 단색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일에 열중했다. ‘만남을 찾아서’란 제목의 평문으로 일본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이우환은 작가 및 평론가로 한국 화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미술협회의 행정력을 바탕으로 박서보와 이우환은 단색화를 비롯한 한국의 현대미술을 일본에 소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초의 대규모 기획전인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전](동경센트럴미술관:1977)을 비롯하여  [Work on Paper](동경화랑:1978), 대규모 순회전인 [한국 현대미술-70년대 후반:하나의 양상전](동경도미술관, 도지키현 근대미술관, 후쿠오카시립미술관:1983) 등은 이 시기에 일본에서 열린 대표적인 한국의 현대미술 관련 전시회들이다. 

Ⅴ. 그러나 1960-70년대의 시공간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Ⅱ장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각종 언론 통제와 공작정치를 통해 국민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 표현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색화 작가들의 침묵이 과연 서슬퍼런 군부통치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었는지 체제에의 순응이었는지는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치밀한 분석을 통해 밝혀지겠지만, 70년대 후반에는 군부통치에 저항하는 미술인들의 움직임이 집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실과 발언>은 그 대표적인 단체로 이른바 ‘민중미술’의 효시이다. 민중미술은 군부통치와 제도미술에 대한 비판을 통해 80년대에 이르러 더 많은 작가들의 호응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 화단은 ‘순수’와 ‘참여’로 양분화되기에 이른다. 
 
<Dansaekhwa 1960-2010s : Primary Documents on Korean Abstract Painting, 예술경영지원센터 발행, 원고, 2017>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