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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虛)의 바다

윤진섭

허(虛)의 바다

                                             윤진섭(미술평론가)


 여러 해에 걸쳐 나전과 옻칠기법을 연마한 김덕한의 작업은 이제 좁은 공예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최근 몇 년간 그가 심혈을 기울인 작업은 폭넓은 의미에서 ‘동시대적(contemporary)’이라고 칭할 수 있는 그런 부류의 것이다. 나전과 옻칠은 한국 전통공예의 중핵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기법을 빌어 왔을 뿐인 김덕한의 경우에는 그러한 굴레가 합당치 않아 보인다. 
 김덕한의 작업을 흔히 이야기하는 공예의 범주에 포함시키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목적이 ‘쓰임(用)’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 공예의 추세가 전통적인 ‘쓰임’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농후하지만, 김덕한의 경우는 순수미술의 영역인 추상회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성격과 의도가 분명하다. 
 김덕한이 자개와 옻칠기법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회화작업을 선보인 것은 2014년에 열린 첫 개인전의 주제인 “복제된 화면. 같지만 같지 않은 서로 다른 나의 모습들(Simple is not so simple)”이 아닌가 한다. 전통적인 나전에 옻칠기법을 적용한 자화상 연작을 통해 그는 미세하게 변하는 자개의 문양을 서로 대비시키는 가운데 “같지만 서로 다른”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2015년에서 16년에 이르는 기간에는 “비어있으나 차 있으나 모두 같다(Empty=Full)”는 의미에서 ‘공(空)’, 즉 ‘sunyata’를 주제로 작업을 했다. 이 시기부터 김덕한은 패널의 바탕에 칠한 후 굳은 다양한 색깔의 옻칠 도료를 사포로 갈아내 서로 다른 미묘한 색의 톤을 드러내는 작업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이 특유의 기법은 김덕한의 내공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예민한 손의 촉감으로도 두께의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즉, 색깔이 다른 데서 오는 시각적 차이만 존재할 뿐, 실제 중첩된 도료의 두께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이율배반이 성립되는 것이다. “빈 것이 곧 찬 것이고, 찬 것이 곧 빈 것이라는” 명제가 지닌 이 이율배반은 끊임없는 수련이라는 실천에 의해 뒤집힌다. 마음을 모아, 혹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망상과 허상의 이미지, 마음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이는 온갖 잡념과 싸우면서 사포를 미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급기야는 허(虛)의 바다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동일한 평면 위에 드러난 저 서로 다른 무늬들은 두께의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서로 다른 색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여기서 김덕한은 감각의 문제를 제기한다. 눈에 보이든, 손의 촉감으로 감지되든, 느껴지는 것은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기호와 상징들이 사라진 김덕한의 화면에서 시각장(visual field)을 교란시키는 저 얼룩과도 같은 이미지들의 출현은 검도에 비기면 정면 승부와도 같은 것이다. 2018년 빨레드 서울에서 가진 개인전 <겹쳐진 형상(Overlaid)>은 어떤 형태든 캔버스 위에 물감의 찌꺼기를 남기는 추상표현주의나 색면파(color field painting) 화가들의 그림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마치 옻칠 밥상의 표면을 손바닥으로 밀 때처럼 매끈한 김덕한의 화면 질감은 저 얼룩들이 과연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답은 아무래도 행위에 있는 것 같다. 수없이 반복되는 사포질과 그 사이에 오갔을 수많은 상념들. 자신을 잊기 위한 수행이 그러한 시각적 이미지와 실재간의 모순을 낳았으리라. 그것은 하나의 신비임에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도 모른다. 

 “너의 신비를 푸는 자는 알 수 있으리라. 이 세상의 모든 삶과 죽음이 무엇인가를.” 

 김덕한은 최근 들어 부쩍 미술계의 각광을 받고 있다. 작년에 빨레드서울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이 호평을 얻어 현재 다양한 가시적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올해들어서만도 인도예술제를 비롯하여, 홍콩에서 바젤기간 중에 열린 한국현대미술작가전(한국문화원), 역시 홍콩에 있는 화이트스톤갤러리의 <담(淡)>전에의 참가 등 괄목할 만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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