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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혁신

윤진섭

창조와 혁신 

                                              윤 진 섭(미술평론가)

Ⅰ.

 1999년에 창설된 청주공예비엔날레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 뜻 깊은 자리를 맞이하여 우리는 과거를 회고하고 다가 올 미래에 대해 새로운 각오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x)과 공간(y)이라는 두 축을 토대로 날줄과 씨줄이 상호 교차하는 지점을 현재의 관점에서 정확히 파악해서 청주공예비엔날레의 바람직한 위상과 미래적 전망을 확립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창설 초기부터 현재까지, 공간적으로는 청주에서 발원하여 한국과 아시아, 그리고 세계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청주공예비엔날레가 이룩한 저간의 업적을 살펴봄으로써, 과거와 현재에 관한 분석을 토대로 미래적 전망이 도출될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안에 무려 20년에 걸친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지난 행사를 이 자리에서 전부 다 살펴보는 것은 무리일뿐더러 또 그럴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정신이며,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차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기 때문에 현재를 논의하는 이 자리에서 때로는 과거가 소환되기도 할 것이며, 미래적 전망을 위해 현재 또한 논의선상에 오르게 될 것이다.



Ⅱ. 

 흔히 현대를 가리켜 ‘글로벌 시대’라고 한다. 발달된 교통기관과 통신매체로 인하여 세계의 시민들은 ‘지구촌 시대’를 실감하고 있으며, 컴퓨터를 비롯하여 스마트폰 등 각종 첨단의 통신매체를 소지한 인류는 유목민으로 하루를 바쁘게 살아간다. 게다가 페이스북(facebook)을 비롯하여 트위터(twitter), 인스타그램(Instagram) 등 다양한 SNS 매체들은 국경을 초월하여 인류의 친교와 결속, 대화를 매개한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9년, 청주공예비엔날레가 창설될 당시만 하더라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 전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현재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4차 혁명을 비롯하여, 빅데이터,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로봇공학, 3D프린팅(3D Printing), 드론, 가상현실, 증강현실, 클라우드, 자율주행, 블록체인 등등과 같은 용어들은 지금도 전통의 현대화 내지는 현대와 전통의 대화라는 아날로그적 화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입장에서는 넘어야 할 큰 산들이 아닐 수 없다. 이상이 바로 오늘날 청주공예비엔날레를 둘러 싼 변모된 환경에 관한 것들이다.  

 따라서 오늘날 청주공예비엔날레1)가 맞이한 현실과 환경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와 관련하여 어떤 구체적인 전략을 세울 것인가 하는 데 화제의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비엔날레가 지닌 진취적이며 도전적인 성격과 모험을 중시하고, 과거의 전통에 대해 미학적 도전을 감행해 온 세계 비엔날레의 보편적인 역사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의제는 매우 합당해 보인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의 서두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밝힌 이유이다.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 하는 잡다한 ‘내용’의 나열이나 서술보다는,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를 반추하고 내일에는 더욱 나아지려는 의지와 열망, 추진력, 도전의식, 과거의 사문화된 전통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형식을 창출하려는 투철한 의지의 표명 등등 ‘정신’에 천착해 들어갈 때 청주공예비엔날레의 미래적 비전이 열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Ⅲ. 

 전통적인 의미에서 볼 때, 손을 비롯한 신체의 연장으로써의 ‘공예(Craft)’는 예술의 다른 장르에 비해 미적 측면보다는 쓰임 즉, 실용(實用)을 보다 중시해 왔다. 공예가 지닌 이러한 형식적 제약은 자연스럽게 회화나 조각과 같은 순수미술(fine art)의 장르에 비해 표현의 한계를 낳았다. 즉 공예에 있어서의 표현은 용도, 즉 목적에 따른 부수적 효과로서의 장식적 기능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현대공예의 특징인 탈장르 현상은 공예가 기능에서 벗어나 점차 순수한 표현의지의 발현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독자적인 형식을 지닌 도예가 조각과의 혼융을 통해 ‘도조(陶彫 : 도예 +조각)’란 신조어를 낳은 경우가 그것이다.

 이처럼 공예가 기능에서 벗어나 순수한 표현의지의 발현 쪽으로 나아가는 현상은 고유의 법식(rule)을 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던 고대의 예술개념, 즉 그리스어의 ‘테크네(techne)’의 개념에 반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 개념이 법식을 기준으로 삼아 길쌈에서 토지의 측량에 이르는 포괄적인 인간 활동을 ‘테크네’로 간주한 이면에는 뮤즈 여신에게서 받은 영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을 예술가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시인은 예술가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의 예술 개념은 당시에는 단순히 ‘기술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서양의 경우, 고대부터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기술’을 놓고 벌어진 예술 개념의 변천은 주로 예술가의 지위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일정한 법식을 좇아 제작하는 도자, 목칠, 섬유, 금속과 같은 오늘날의 공예는 ‘범상한 기술(crafts)’2)에 속하는 것이다. 범상한 기술과 ‘훌륭한 기술(fine arts)’을 가르는 기준은 육체노동의 여부에 있었다. 그 결과 정신적인 측면이 강한 자율적인 예술(liberal arts)은 평속(vulgares, common)의 기계적인 예술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취급되었다.3)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기술의 개념이 어떻게 해서 근대에 이르러 ‘순수미술(fine art)’이 확립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 현대의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을 계기로 마침내 파국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예술 개념의 긴 역사적 과정에 대한 서술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은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는 점,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예술의 개념과 위상에 대해 고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업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비엔날레가 첨단의 미학적 담론을 생산하는 당대 예술의 발신 기지이며, 최신의 기술과 방법론을 선보이는 경연장인 동시에 예술의 실험과 도전을 위한 예술가들의 의식의 각축장인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에 관한 다양한 문제의 제기는 매우 긴요하다.



Ⅳ. 

 포스트모더니즘이 문화와 예술의 분야에 미친 지대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예술간 경계의 철폐와 다원주의의 확산, 그리고 예술 개념의 다변화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문화와 예술에서 나타난 특징은 과거로의 회귀, 즉 ‘모던(modern)’을 넘어서 ‘모던 이전(pre-modern)’으로 넘어가는 원환 운동의 징후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예술과 일상의 결합은 플럭서스(Fluxus) 퍼포먼스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개념적으로는 동굴 속의 제의(祭儀)로 대변되는 선사시대 예술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유사한 징후가 나타난 것은 훨씬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일어난 쿠르트 쉬비터스(Kurt Schwitters)의 ‘메르츠의 집(Merzbau)’과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Fountain)’(1917)의 등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성용 소변기에 붙인 ‘샘’이라는 이름을 통해 뒤샹이 선언적으로 표명한 레디메이드 미학과 플럭서스 퍼포먼스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인 ‘관객참여(audience participation)’는 다 같이 예술과 일상의 결합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이는 예술이 ‘미(美)’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가치의 추구에서 실제를 통한 생활 속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며, 관객참여에서 보듯이 예술과 삶 사이에 견고하게 드리워진 울타리를 허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차원은 다르지만 예술이 생활 속으로 복귀했다는 의미는 공예의 본질인 ’쓰임(用)‘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의 그릇이나 가구가 실생활에서 쓰인다는 것은 곧 삶과 예술이 하나가 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예술과 일상이 오롯이 포개져 하나의 동심원을 그릴 때, 삶과 예술 사이에는 비로소 간극이 사라지게 된다. 수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브릴로 박스(Brillo)를 복사한 앤디워홀의 ‘Brillo Box’는 목수가 만든 원래의 박스와 워홀의 공장(factory)에서 만들고 실크로 상표를 전사한 작품으로서의 ‘박스’가 구별이 안 되는, 예술과 일상의 완벽한 합치를 보여주었다. 아더 단토(Auther Danto)는 워홀의 이 작품을 들어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으나, 예술은 변신을 거듭하며 아직도 항진 중이다.

 공예가들이 ‘쓰임(用)’의 본령에서 벗어나 순수한 표현 쪽으로 가려는 성향을 보이는 심리의 이면에는 지위 격상에 대한 열망이 은근히 내포돼 있다. 이는 육체노동이 강조되는 ‘테크네’에서 ‘순수미술(fine art)’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카테고리에 속하고자 했던 선인들의 욕망이 미분화된 형태로나마 아직도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예는 ‘쓰임’이라는 공예로서의 정체성을 지닐 때 가장 아름답다. 문제는 공예가 시대의 변화에 맞춰 어떻게 변모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며, 다가올 4차 혁명의 시대에 어떻게 적응해 나가느냐 하는 화두에 담겨 있다.

 퍼포먼스에 있어서 관객참여는 예술의 양태를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이 퍼포먼스의 기원이 고대 농경사회의 제의(祭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이유는 현대예술에서 퍼포먼스의 등장이 예술과 일상이 분화(分化)되기 이전의 상태를 동경하는 20세기 초반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다다(Dada)와 미래파의 연행으로 대변되는 이 시기의 문화적 소란과 사건은 현대판 제의(祭儀)로서 인류의 조종(弔鐘)에 바치는 희생적 공물(供物)이었던 것이다.

 퍼포먼스와 직접적인 양상은 다르겠지만 청주공예비엔날레는 가능한 한 많은 관객참여 형태의 작품들을 포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프리모던(premodern)’으로 선회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지고 그럼으로써, 사회의 안녕과 민주적이며 건강한 시민의식을 북돋우는 축제의 장으로써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Ⅴ.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나는 소셜 네트워킹(SNS)을 다룬 한 논문에서 나의 얼책(facebook) 활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바 있다. “새로운 창조는 손끝에서 나온다.(New creation comes out of the fingertips))”4) 백남준의 ‘달은 가장 오래된 인류의 티브이’라는 발언을 연상시키는 이 말은 스마트폰이 지배하게 될 사물 인터넷(IoT) 시대의 유비쿼터스 기술 환경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글을 쓸 때만 하더라도 지하철 안에서 모바일 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10명 중 서너 명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열이면 열 사람 모두 손에 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간주돼 온 창조력은 기술의 발전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다. 스마트폰에 깔리는 앱 중에서 가령 어떤 저작 도구는 그림에 재능이 없는 사람도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주며, 이들은 동호회를 결성,  얼책(facebook)에 계정을 마련하고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요셉 보이스(Joshep Beuys)가 오래 전에 한 “누구나 예술가”란 발언이 현실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면 반드시 부정적인 측면이 따라오는 법, 가령 장차 인공지능(AI)이 제작한 작품에서 저작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도출된다. 그 뿐만 아니라, 로봇이 만드는 그릇과 공산품에서 예술과 비예술 간의 경계의 문제, 3D 프린팅에서 예술가와 일상인의 구분 문제,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에서 리얼리티와 가상의 문제 등등 산적한 미학적 과제 앞에서 풀어야 할 숙제들은 많다. 

 이러한 제반 문제들은 모두 첨단의 담론 생산기지인 비엔날레에서 논의될 성질의 것들이다. 이론과 창작이 한 자리에서 맞물려 돌아가고, 첨단의 지식인들과 예술을 사랑하는 대중이 즐겨 찾는 비엔날레는 미래의 기술공학과 예술이 만나 미래 문화의 좌표를 그려나가는 성소(聖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윤리가 종교를 대신해야 할 이 시대에, 삶의 현장에서 벌어진 고대 제의(祭儀)의 정화의식을 오늘에 되살림으로써 구태의연한 제도와 인습의 때를 씻는 창조적인 축제의 마당으로 청주공예비엔날레가 거듭 태어나길 바란다. 

                       <2019 청주공예비엔날레 학술세미나 원고>



1) 참고로 1999년 제1회 청주공예비엔날레부터 2019년 현재까지 각 행사별 기간과 주제, 전시감독 명, 장소는 다음과 같다.
제1회, 기간 : 1999. 9. 30-10. 31, 주제 : 조화의 손(Hand of Harmony),  큐레이터 : 장동광, 장소 : 청주 예술의 전당
제2회. 기간 : 2001. 10.5-10. 22, 주제 : 자연의 숨결(The Breath of Nature), 전시감독 : 장동광, 장소 : 청주 예술의 전당
제3회, 기간 : 2003. 10. 1-10. 19, 주제 : 쓰임(USE), 전시감독 : 최공호, 장소 : 청주 예술의 전당
제4회. 기간 : 2005. 9. 30-10. 23, 주제 : 유혹(Temptation), 전시감독 : 오원택, 장소 : 청주 예술의 전당, 청주 첨단문화단지, 국립청주박물관
제5회. 기간 : 2007. 10.2-10. 28, 주제 :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 Deeply and Slowly), 전시감독 : 책임큐레이터 김군선, 장소 : 청주 예술의 전당, 청주 문화산업단지
제6회 기간 : 2009. 9. 23-11 .1, 주제 : 만남을 찾아서(Outside the Box), 전시감독 : 이인범, 장소 : 청주 예술의 전당, 청주 문화산업단지
제7회 기간 : 2011. 9. 21-10. 30, 주제 : 유용지물(有用之物) : Nothing just new but necessary), 전시감독 :정준모, 예술감독 : 박남희, 장소 : 구 청주연초제조창
제8회 기간 : 2013. 9. 11-10. 20, 주제 : 익숙함 그리고 새로움(Something Old Something New), 전시감독 : 박남희(기획전 1), 가네코 RPS지(기획전 2), 초대국가 : 독일, 장소 : 구 청주연초제조창
제9회 기간 : 2015. 9. 16-10. 25, 주제 : HANDS+확장과 공존, 전시감독 : 조혜영, 예술감독 : 알랭 드 보통, 전병삼, 장소 : 구 청주연초제조창
제10회 기간 : 2017. 9. 13-10. 22, 주제 : HANDS+품다, 장소 : 구 청주연초제조창
제11회 기간 : 2019. 10. 8-11. 17, 주제 : 미래와 꿈의 공예-몽유도원이 펼쳐지다, 예술감독 : 안재영, 장소 비엔날레 행사장 및 청주시 일원

2) 청주공예비엔날레의 명칭이 ‘Cheongju Craft Biennale’임을 상기할 것.

3) Wladyslaw Tatarkiewicz, History of the Concept of Art from A History of Six Ideas, 예술개념의 액사-테크네에서 아방가르드까지, 김채현 역, 열화당, 1987, 27쪽.

4) 윤진섭, “현실 혹은 가상? 나의 페이스북(facebook) 체험기”, 유럽문화예술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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