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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물의 다양한 양태에 대한 관심

윤진섭

자연물의 다양한 양태에 대한 관심

                                윤 진 섭(미술평론가)

Ⅰ.
 안상철(1927-1993)은 전통이 중시되는 한국화단에서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관습에 과감히 도전을 시도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그는 작업 초기인 50년대 중후반에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1956-7), 부통령상(1958), 대통령상(1959)을 연거푸 수상, 그 공적으로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상당히 안정된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그 이면에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강렬한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가 국전에서 중요한 상을 연거푸 휩쓸던 1950년대 후반은 한국현대미술사상 거대한 변곡점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국전 중심의 기성 화단에 대해 ‘반(反)국전 선언’(1956)을 하는 등 저항적 태도를 보인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앵포르멜(Informel)’이라고 하는 비정형 회화를 주창, 전위와 실험의 기치를 올린 것이다. 당시 김창열, 박서보, 하인두 등 앵포르멜의 중심세력인 <현대미술가협회>의 회원들은 미술의 중심인 안국동 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혈기방장했던 이들은 통금시간이 가까워지면 술에 취해 안국동 로타리 인근, 덕성여고 안에 있는 미술교사 안상철의 관사를 찾는 일이 잦았다.   
 이 일화는 국전에서 중요한 상을 휩쓸 만큼 전통 수묵화에 몰두해 있던 안상철이 60년대 초반에 접어들어 어떻게 그림에 오브제를 수용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실험을 하게 됐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 준다. 그는   비록 앵포르멜 운동에 가담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점차 전위와 미술의 실험에 관심이 커져갔던 것이다. 이 무렵 오브제 작품이 어떻게 탄생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안상철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1962년부터 적극적으로 입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화면을 삼층으로 만들어 부피를 한 자 정도로 반입체화하여 바위를 나열하고 화면에 구멍을 뚫고 이중, 삼중의 깊이를 만들었다.” (연정(然靜)) 안상철-20주기 회고전, 도록, 안상철미술관, 2013, 90쪽)

 당시의 화단 정황을 살펴볼 때, 미술을 대하는 안상철의 이러한 실험적 태도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화면에 돌을 붙이는 행위는 당시 앵포르멜 작가들도 시도하지 못한, 말 그대로 파격이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오브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1967년 12월에 열린 [청년작가연립전]에서였으니 그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선 안상철의 오브제 작품은 한국미술사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Ⅱ.
 이번에 안상철미술관이 특별기획전으로 마련한 [소요하는 사물]전은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의 표정과 양태에 초점을 맞춘 전시이다. 돌을 비롯하여, 나무와 나뭇잎, 폐가에서 구한 낡은 문짝 등 소재 자체로 보면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자연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하찮게 생각될 지도 모를 이 사물들은 작가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어엿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안상철을 비롯하여 김해심, 안치홍, 연기백, 차기율 등 다섯 명의 작가는 다 같이 기존의 일상적 사물이나 자연물을 이용하여 오랜 기간 작업을 해 온, 중요하고도 이 분야에 비중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안상철은 오래 전에 고인이 되었지만, 오브제와 관련해서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선구적 위상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에 있는 작가이며, 나머지 4명의 작가 역시 현재 화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견작가들이다. 
 김해심의 나뭇잎을 이용한 설치작업은 자연에 대한 작가의 세심한 관찰이 돋보이는 작업이다. 생명이 지닌 경의에 바치는 송가(頌歌)와도 같은 이 작업은 얼핏 하찮아 보일지도 모르는 나뭇잎이 곧 세계를 이루는 기반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구멍도 숭숭 뚫린 구불구불한 나뭇잎”이지만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견고”(김해심, 작업노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설치작업은 나뭇잎들이 도달해야 할 안온한 거처로 숲을 상정하고 있으며, “곤충에게 몸을 내주어도” 푸르름을 잃지 않을 나뭇잎의 존재를 통해 이기심에 가득 찬 인간세를 빗대고 있다.    
 나뭇가지들을 모아 커다란 물방울 형태의 오브제를 만들고 그 주변에 돌들을 흩어놓은 안치홍의 작품은 가공하지 않은 생짜 그대로의 자연물을 다룬 것이다. 강가나 숲에서 주은 고사목이나 부목(浮木), 혹은 채취한 나뭇가지들을 다듬어서 조합한 이 자연의 오브제들은 신령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한 느낌은 아마도 기세 좋게 내닫는 동물들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일련의 설치작업에서 오는 것 같다. 대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신령스런 영기(靈氣)는 물방울을 연상시키는 오브제 작품에 이르면 다소 약화되는 것처럼 보이만, 그것은 거칠게 풀어 헤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지나치게 조형성을 강화시킨 데서 오는 것일 것이다.   
 차기율은 그동안 꾸준히 추구해 온, 작가의 감정이 이입된 돌과 드로잉을 병치하는 작업을 통해 마음에 비친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언젠가 나는 자연을 대하는 그의 이러한 태도를 물활론(animism)적 관점에서 다룬 적이 있다. 자연에 영혼과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는 이러한 관점은 감정이 이입된 대상으로서의 돌, 즉 그것이 사물이건 인간 또는 동물이건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마치 탐석(探石) 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돌을 드로잉이라는 형식을 빌려 마치 초상화를 그리듯 각각의 돌에 어두운 톤의 드로잉이 담긴 액자를 병치한 형식은 제목에서 ‘혼(魂)’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물활론적 의미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폐가나 생활현장에서 재료를 구해 다양한 형태의 설치작업을 해 온 연기백은 벽지나 낡은 문짝, 자개장 등 다양한 오브제를 통해 그 안에 스민 삶의 숨결을 불러내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작가들이 자연대상을 오브제로 삼아 자연과 인간 간의 감응이나 미적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에 비해 연기백은 삶의 직접적인 문제를 자신이 채취한 오브제를 통해 발언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연기백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비록 그가 미술의 제도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가 다루는 재료는 미술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삶의 구체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터전 안에서 사물들이 벗어날 때 어떻게 생명력을 잃게 되는가 하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안상철미술관의 이번 기획전은 자연과 우리의 생활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국내에는 ‘야투’나 ‘바깥미술’처럼 자연환경의 소중함에 대해 오래전부터 관심을 기울여 온 단체가 여럿 있지만, 이들의 활동상은 그 동안의 노력에 비해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외국의 경우는 다르다. 국내보다 오히려 이들의 활동을 잘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가령 중요한 국제적 미술 행사인 [예치고츠마리 트리엔날레]는 ‘야투’를 특별히 초대한 바 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고목나무나 돌에 일찍이 1960년대 초부터 주목한 안상철의 혜안이 이제 재평가의 기회를 맞고 있다. 그와 더불어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김해심, 안치홍, 연기백, 차기율 등 4인의 후학들은 오브제를 공통분모로 한 독자적인 작품세계로 자연과 생태가 중요한 의제로 부상되고 있는 작금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다. 그 의미를 오롯이 새겨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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