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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 대 현실, 이분법의 경계를 넘어서

윤진섭

관념 대 현실, 이분법의 경계를 넘어서

윤진섭 (미술평론가)


 인간이 살아있음을 의식하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생각의 방향을 과거로 돌릴 때이다. 육체적 아픔이나 즐거운 쾌락의 순간을 느끼는 것도 물론 지금 이 순간이지만, 지나간 옛일을 회상하는 것 또한 현재의 정신작용인 것이다. 더구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떤 일들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질 때, 그것들은 때로 일종의 초현실적 풍경으로 다가온다.  

 ‘더 높은 곳 대신에(In Lieu of Higher Ground)’라는 타이틀의 전시를 봤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전시에 출품된 초대작가들은 내가 작가로 화단활동을 시작한 70년대 중반에 만났고, 출품작들 역시 그런 의미에서 익숙한, 말하자면 내 기억 속의 원초적 풍경과도 같은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을 보며 나는 벌써 오래 전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나 자신의 자화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어찌 초현실적 풍경처럼 다가오지  않겠는가. 

 각설하고, 갤러리바톤의 이 기획전은 과거 70년대 모더니즘 미술을 지금, 이 자리에 소환하여 그 의미를 묻고 있다. 물론 전시장 사정상 많은 인원이 아니고 박석원(1941-  ), 박장년(1938-2009), 송번수(1943-  ) 등 세 작가에 국한되지만, 이 전시가 불러일으킨 의미의 파장은 만만치 않다. 

 우선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이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70년대의 화단사적 의미를 오늘의 시점에서 반추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이다. 박장년의 <마포 77-28>(1977, 마포에 유채, 116.5x130cm), <74 반응 B>(1974,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재료, 72x53cm), 박석원의 <적(積) 7726>(1977, 나무, 28x233x13cm), <적-대(積-對) 7918>(1978, 나무, 190x52x49cm), 송번수의 <가시>(1981, 종이부조, 73x53cm) 등등은 이 세 사람의 작가들이 이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40여 년 전에 제작된 작품들이 겹겹이 쌓인 시간의 켜를 허물고 지금 나의 눈앞에 ‘나타난(現前)’ 것이다. 이 ‘현전(現前)’이란 말 자체가 70년대 당시 흔히 보던 작품의 제목이고 보면, 그것이 지닌 ‘관념성’은 이념적으로 나뉘어 불편했던 8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미해결의 장(章)으로 남아있는 것. 이 전시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미해결로 남은 장을 다시 공론화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예술에 미해결이 있을 수 있는가? 예술이란 강물처럼 그저 그렇게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 즉 어떤 사건이 던진 파장과 그 파장의 의미를 오늘의 시점에서 되새겨 보는 일, 그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최근 미술계의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70-80년대를 겨냥한 아카이브 중심의 여러 기획전들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의미 찾기’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2천년대에 이르는 긴 시간의 폭을 지닌 이번 전시는 그런 견지에서 볼 때 일개 상업화랑의 전시라기보다는, 규모는 작지만 미술관 전시에 버금가는, 목적이 분명한 기획전이었다. 타피스리와 목판화(송번수), 회화(박장년), 목조각(박석원) 등 각 시기를 대변할 수 있는 정선된 작품들을 통해 각 작가들의 작품의 시간적 흐름은 물론,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성(物性)과 허상, 이미지와 실제, 존재와 비존재, 개념과 사물, 환원과 확산(이일) 등등 70년대를 관류한 어사(語辭)들은 과연 오늘의 이 시대에 음미될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세대를 초월하여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가능태로서의 답을 이 전시는 충분히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질문에 대한 응답은 물론 미술현장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가령, 세대를 초월하여 단색화와 같은 미니멀한 경향의 회화가 20-30대 작가들 사이에서 만만치 않은 비중으로 유행하고 있는 것 등등이 그것이다. 대체적으로 오늘날 20-30대 작가들은 개인적 서사, 즉 이야기의 서술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많은 섬세한 서사의 층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고 해석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이른바 일반화의 오류이다. 예컨대, 풍경은 대체로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어어, 저건 노란색이네. 저건 빨간색 일색이고. 그럴 때 시들어가는 무수한 흐릿한 색들.  비평이 바라봐야 할 지점이 분명 이것일진대, 광풍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미처 보지 못 했다. 70년대의 모더니즘 바람 속에서 민중미술의 씨앗을 보지 못한 것이나, 80년대의 민중미술 바람이 휘몰아칠 때 미약한 어떤 흐름을  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김종영미술관이 주최한 [새벽의 검은 우유(Black Milk of Dawn)](고동연, 심승욱 기획)는 앞의 전시와는 달리, 이야기(narrative) 중심의 기획전이다. 우선 전시의 제목 자체가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 이 제목은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시인인 폴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Todesfuge)’에 등장하는 문구에 서 빌려 온 것이다. 

 심승욱, 이세경, 연기백, 정재철, 정현 등 다섯 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는 각자의 독자적인 서사로 이루어진다. 폴 첼란의 ‘죽음의 푸가’에 나오는 시구를 녹아내리는 검정색 물질로 쓴 심승욱, 여러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섬세하게 그림을 그린 이세경. 오래된 침목이나 산불의 화재 현장에서 구한 나무를 사용하여 작업한 정현, 오랫동안 유목적 현장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실천해 온 정재철, 인간의 삶의 체취가 밴 벽지를 사용하여 설치작업을 한 연기백 등등 다섯 명의 시선은 다 같이 ‘지금 그리고 여기(hic et nunc)’, 즉 현실을 향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개인적 서사, 즉 개인이 바라본 풍경과 오늘의 현실에서 배태된 작가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갤러리바톤에서 전개된 세 개의 시선을 가리켜 단지 현실에서 떠난 관념적 시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있어서 현실이란 무엇인가? 예술가가 마주한 현실, 즉, 예술가로서 대면하고 살아가야 하는 당대의 현실이란? 그 현실의 언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가리켜 ‘모더니즘’이라고 했고, 지금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후자는 과연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 아니,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예컨대, 정재철의 작업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하고, 정현의 작업은 모더니즘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심승욱은 개념미술에 포함시키고? 그렇다고 한다면 연기백은 포스트 민중미술이고, 이세경의 작업은 관객참여형 퍼포먼스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비평은 답이 아니라 묻는 행위라는 점이다. 의미를 찾아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추적하는 행위. 비평적 시선은 과거를 더듬을 수도 있고 현재에 머물 수도 있으며, 미래를 향할 수도 있다. 비평은 예언은 아니지만 예측은 할 수 있으며, 통찰을 통해 미래를 앞당겨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미술의 불씨를 과거 70-80년대 모더니즘 미술의 잿더미 속에서 찾는 비평적 과업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단색화, (한국적)하이퍼리얼리즘, (한국적)개념미술, 설치미술, 오브제(입체), 퍼포먼스(이벤트), 비디오아트 등등 다원적 양상이 혼재했던 당시의 풍경에 현재 미술의 맥락을 연결시키는 작업,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서양의 사조와 어떻게 다른지 신원을 규명하고 정의내리는 작업, 즉 섬세하고 분류하여 새롭게 명명하고 역사성을 부여하는 지난한 작업을 해 나가야 할 시기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전시는 시기적으로나 성격적으로 거의 대척점에 서 있지만, 의미심장하며 시의적절한 기획이었다.
 
<Art in Culture,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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