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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모던 회고전, 재평가를 위한 서곡

윤진섭

테이트모던 회고전, 재평가를 위한 서곡

윤진섭 (미술평론가)


Ⅰ.
 지난 1월 29일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1932-2006)의 14주기 기일(忌日)이었다. 살아서는 ‘세계적인 전위예술가’,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 ‘천재적인 작가’ 등등 화려한 수식어로 불린 그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간다. 

 백남준의 서거 14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는 경기도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를 비롯하여 그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 강남의 봉은사, 뉴욕의 한국문화원 등지에서 조촐하게 열렸지만, 생전에 백남준이 작가로서 누리던 명성에 비하면 이 또한 초라하기 그지없다. 
 나는 이처럼 불길한 소식을 접하며 이 자리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백남준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으며, 향후 그와 그의 작품, 그리고 국제적인 위상과 관련하여 그가 쌓은 업적에 대한 연구와 추모의 행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해 나갈 것인가? 등등. 

 이러한 질문은 백남준이란 국제 예술계의 걸출한 인물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하고 있지 못 하다는 일말의 반성에 기인한다. 말하자면, “모국인 한국이 그를 박대하고 있는데, 과연 세계의 어느 나라가 그를 기리는 과업을 수행한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백남준과 직접 관련된 국가로는 우선 미국과 독일, 그리고 일본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은 그가 예술가로서 입지를 굳힌 나라이자 생을 마감한 곳이며, 독일은 전위예술 활동의 초기에 그가 산 나라이자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국가관 황금사자상을 받게 한 나라이다. 일본은 백남준이 동경대학 미학미술사학과에서 음악미학을 공부한 곳이며, 그의 부인인 구보다 시게코의 모국이기도 하다. 

 반면에 백남준에게 있어서 한국은 태어난 곳이긴 하지만 청년기까지의 기억만이 그의 뇌리에 각인된 그런 곳이다. 그가 작고한 후 그의 유해가 미국과 독일, 그리고 한국에 각각 분산돼 보관되고 있는 이유 또한 이처럼 백남준의 특이한 삶의 유적(流謫)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남준은 평소 한국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기울였다. 가령, 그는 “왜 한국을 놔두고 외국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서 세계를 떠도는 문화상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백남준이 한 기자에게서 이 질문을 받은 것은 젊은 시절 고국을 떠난 그가 34년 만에 금의환향했을 때의 일이다. 1984년 당시 KBS TV가 백남준이 기획한 세계 최초의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well)>을 생방송으로 방영하면서 그는 일약 대중적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특집 인터뷰 프로에서 ‘예술은 사기’라고 한 그의 발언이 대대적으로 퍼져나갔는데, 이 말은 지금도 대중들 사이에서 빈번히 회자되고 있다. 

 전위(avant-garde)에 기반을 둔 문화 테러리스트이자 미적 아나키스트였던 백남준은 세계미술사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거장이지만, 현재의 평가나 위상은 그러한 사실과 현격한 거리감이 있다. 우선 그 자신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마르셀 뒤샹은 비디오를 제외한 모든 것을 이루어놓았습니다. 그는 커다란 입구와 아주 작은 출구를 만들어놓았지요. 후자가 비디오입니다. 그곳으로 나가면 우리는 마르셀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입니다.” 

  평소에 백남준은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마르셀 뒤샹에 대해 이처럼 평가했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마르셀 뒤샹(1887-1968)은 개념미술을 비롯하여 팝아트, 오브제아트, 설치미술, 사진, 퍼포먼스 등 현대미술(contemporary art)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백남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셀 뒤샹이 비디오라고 하는 미디어 아트의 새로운 영역은 간과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백남준은 그것이 마르셀 뒤샹의 명백한 한계임을 지적, 자신이 이 분야의 선구자임을 스스로 밝혔다. 

 그렇다면 국제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백남준의 위상은 과연 어떤가? 베니스비엔날레의 최고상인 황금사자상 수상을 비롯하여 카셀도큐멘타 참가, 그리고 휘트니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 초대전 등등의 경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백남준은 명실 공히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속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심의 핵에서 약간 빗겨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모종의 백인우월주의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는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도 확인이 된다. 다소 길지만 백남준이 차지하는 국제미술계의 위상과 관련, 적확한 지적이라 여겨져 여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주류 미술사학계와 미디어 이론 영역에서 백남준의 입지는 날로 좁아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1900년 이후의 미술사』에서 할 포스터를 비롯한 소위 ‘옥토버’ 학파는 백남준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비평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백남준 자체를 아예 다루지 않는 것이다. 미디어학자 빌렘 플루서, 미디어아트 이론가 로이 에스콧 등은 백남준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에서조차 백남준을 다루지 않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디어 관련 고전으로 손꼽히는 『뉴미디어의 언어』(레프 마노비치), 『재매개』(제이 데이비드 볼터 외) 등의 저작에서도 백남준을 제외시킨 공백이 유달리 커 보인다. 이러한 비판은 서구 백인 중심의 헤게모니에서 나오는 의도적 폄하이자 학문적 횡포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백남준의 귀환>,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이영철, 『백남준 :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 글 백남준, 엮은이 에디트 데커, 이르멜린 리비어, 백남준아트센터, 2010) 


 “예술은 텃세다. 보편성이 아니다.”라고 한 백남준의 말처럼, 일종의 문화전쟁터인 국제미술계에서의 각축을 둘러싼 암투는 비단 백남준의 경우를 들지 않더라도 공공연한 비밀에 속한다. 그리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추측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백남준 회고전을 개최하지 않은 사실과 무관하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Ⅱ. 
 이런 상황에서 세계의 정상급 미술관인 테이트모던(Tate modern)이 백남준의 회고전을 기획한 것은 역사에 기록될만한 일이다. 다소 정치적인 의미로 읽힐 위험을 감수한다면, 이번 테이트모던에서의 백남준 전시는 뉴욕의 모마(MoMA)를 비껴 지나갔다는 점에서 모마의 입장에서는 일말의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는 전시였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인용한 이영철의 글에 열거된 미디어 이론가들을 거북하게 만들 소지도 잔존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관한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리뷰 기사에서 제이슨 파라고(Jason Farago) 기자는 “유럽의 선도적 미술관인 테이트모던이 동시대의 다른 그 어떤 예술가보다 더 뚜렷이 미래를 내다본 사람에게 한 시즌의 가장 큰 전시를 헌정했다”고 보도하면서 상세하게 전시를 소개했다. 한편, 영국의 유력한 미술전문지인 프리즈(Frieze)의 토마스 맥물런(Thomas Mcmullan) 기자는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는 어떻게 예언자가 되었나(How 'the father of Video Art' became a prophet.)’라는 리뷰 기사를 통해 미래의 사회를 지배하게 될 인터넷의 도래를 예언한 예언자로서 백남존의 면모를 부각시켰다. 또한 그는 백남준의 다양한 초기 기술적 실험들을 둘러싼 비디오 작업과 존 케이지를 비롯하여 조셉 보이스, 샤롯트 무어맨과의 협업에 대해 언급했다.  


 영국의 유력한 매체인 가디언(The Guardian)의 비디샤(Bidisha)는 테이트 모던의 이번 백남준 회고전을 “이상하면서도 향수에 가득 찬 여행이자 급진적인 60년대 세대에서 ‘여피(yuppie)’ 시대로 넘어가는 이야기”로 비유했다. 그녀는 데이빗 보위, 잇세이 미야케, 키스 헤링을 통해 패션, 공연, 미술의 콜라보레이션을 시도한 위성쇼 ‘바이바이 키플링(Bye Bye Kipling, 1986)’ ‘손에 손잡고(Wrap around the World, 1988)’ 등을 언급하면서 동서의 화합을 꾀하고자 노력한 백남준의 활동을 소개했다. 

 이처럼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이번 테이트 모던 회고전을 집중적으로 소개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국제미술계에서 차지하게 될 백남준의 위상은 가일층 높아질 전망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남준에 대한 국내 미술계의 관심이나 평가는 아직도 한참 미흡한 수준이다.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국립현대미술관은 아카이브 중심의 백남준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사후약방문’격이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백남준의 생애나 업적,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에 대한 학술적(미술사, 비평 등) 연구를 비롯하여 미술시장에서 작품값을 둘러싼 문제점, 국제미술계에서의 위상 하락에 대한 대응책 등 백남준과 관련된 현안들이 산적해 있어서 이에 대한 사계의 관심이 요구된다.  
 

Ⅲ.
 작년 10월 17일 개막한 테이트모던미술관의 백남준 회고전은 테이트모던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의 공동기획으로써 백남준의 작품 200여 점으로 구성되었다. 2018년 기준으로 약 590만 명의 관람객이 찾은 테이트모던미술관은 모두 알다시피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미술관 중 하나이다. 그런 테이트모던에서 백남준의 사후 13년 만에 회고전이 열렸다는 사실은 향후 백남준의 위상과 관련, 중요한 지표가 될 전망이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국제적 위상과 관련된 일로써 백남준 예술에 대한 재평가의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상의 변화는 앞서 언급한 기존의 여러 부정적인 평가에 대한 교정에 싫든 좋든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인 이숙경(테이트 시니어 큐레이터)에 의하면 전시의 목적은 “백남준의 탈국가, 초국가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한다(동아일보, 2018년 10월 15일자 인터뷰 기사, 김민 기자). 이는 백남준의 예술관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키워드들로써, 50년대 초반이후 전개돼 온 백남준의 예술실험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잘 설명해 준다. 일찍이 50년대 초반에 홍콩을 거쳐 일본, 독일, 미국 등지로 이어진 백남준의 삶은 그 자체 유목민적인 것이었다. 이른바 ‘코스모폴리턴 맨(cosmopolitan man)’으로서 백남준의 삶과 예술은 한편으로는 동양과 서양 간의 벽 허물기이면서 동시에 미래에 다가 올 인간의 삶의 양태에 대한 기술적(technological) 접근과 관련된다. 이러한 백남준 예술의 특질은 1960년대 초반의 선(禪)과 연관된 퍼포먼스를 비롯하여 우연성과 비결정성 등의 개념이 중시된 플럭서스(Fluxus) 운동, 1974년의 ‘전자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 이른바 혼합문화론인 ‘비빕밥론’ 등등의 개념들 속에 잘 녹아 있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탈(脫)연대기적인 전시방법이다. 작품의 제작시기별 구분에 따른 선형적(linear) 구성이 아니라, ‘주제’에 따른 전시연출을 통해 나열식 구성이 지닌 인과론적 한계를 극복하고 작품의 심층적 의미 분석과 해석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보였다. 모두 12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회고전은 비유하자면 포도송이와도 같은 모양새라고 할 수 있다. <T.V 부처>(1974)를 필두로 <T.V 정원>(1974/2002)이 설치된 도입부를 지나면 일본식 나막신(게다), 장난감 자동차, 양철 물주전자 등등 발견된 사물(found objet)을 노끈으로 죽 매달아 놓은 작품(<바람을 위한 선>(1963), <준비된 피아노>(1963) 등등이 나오는 방이 죽 연결되는 식이다.  

 이번 회고전의 백미는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시스티나 예배당(A Sistine Chape)>일 것이다. 빔 프로젝터 36대가 투입된 이 대작은 원작인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 속 이미지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뽐내는 것과는 달리, 화려한 그래픽 이미지들과 만화 동영상, 팝적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분위기 속으로 관객들을 몰아넣는다. 실물보다 큰 등장인물들은 백남준의 친구들인 조셉 보이스,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 샬롯 무어맨 등이다. 

 12개의 전시실을 연결한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발길은 어느덧 끝 부분인 <몽골 텐트>에 가 머문다. 이 작품 역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이다. 백남준과 몽골은 깊은 연관이 있는데, 평소에 그는 자신이 몽골리안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징기스칸에 대한 백남준의 이해와 존경은 스스로를 가리켜 ‘황색재앙’으로 지칭한 것이라든지, 첫 개인전이 열린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갤러리 입구에 거대한 소머리를 걸어놓은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텐트의 안에는 청동으로 주물을 뜬 백남준의 데드마스크 여러 개와 <T.V 부다>가 놓여있어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풍겼다. 

 이번 전시에는 진귀한 아카이브 자료들이 다수 출품돼 난해한 백남준 예술의 이해를 도왔다. 재미있는 것은 샤롯트 무어맨이 TV브라를 걸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사진이 인쇄된 일본식 족자 아랫부분에 쓴 백남준의 문구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미래의 어느 날 줄리어드 음대의 입학 시험은 손가락의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슴의 크기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SOMEDAY ENTRANCE EXAM of JULLIARD WILL BE DECIDED NOT BY FINGER TECHNIQUE BUT BY THE SIZE OF BREAST)”. 샤롯트 무어맨의 큰 가슴을 빗댄 백남준 특유의 조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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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in Culture, 202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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