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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와 이미지의 사이에서 : 현실부정을 통한 초월적 세계의 탐구

윤진섭

실재와 이미지의 사이에서 : 현실부정을 통한 초월적 세계의 탐구
윤 진 섭(미술평론가)

Ⅰ. 
 김강용은 그림을 그릴 때 체로 거른 작은 모래를 접착제와 섞어 캔버스에 판판하게 바르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그의 벽돌 그림의 첫 순서다. 무려 40여 년 이상의 세월을 벽돌을 그리는 일에 정진해 온 그에게 있어서 ‘벽돌’은 이제 세상을 보는 렌즈이며, 인간과 사물, 사건을 대하는 척도가 되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40년 이상의 세월을 벽돌과 함께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수적석천(水滴石穿))'는 옛말처럼, ‘초지일관(初志一貫)’의 자세가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그림 안에 모든 게 다 녹아 있다.”고.  
 그의 이 말은 자신의 그림 속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들어 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어떻게 해서 한낱 벽돌 그림에 삼라만상이 다 들어있다는 말인가? 그 이유는 김강용은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그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벽돌이 아니라, 마음에 이는 벽돌의 이미지, 즉 벽돌의 ‘상(像)’을 그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강용의 작업실에 실재하는 벽돌이 없는 이유이다.
  이를 플라톤(Platon)에 비유하여 이야기하자면 원상(原象), 즉 이데아로서의 벽돌의 이미지에 근접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국가>에서 침대의 비유를 들어 이데아론을 펼치고 있는데, 화가가 그린 침대는 진리, 즉 실재를 의미하는 이데아로부터 삼 단계나 떨어진 모방으로서의 침대이다. 즉, 현상계의 침대인 우리가 실제로 잠을 자는 침대는 원상인 이데아로부터 두 번째 떨어진 모방물인데, 화가는 목수가 만든 그 침대를 또 모방하였으니 세 번째 떨어진 모방이고, 이 침대는 그만큼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거짓을 유포하는 시인을 공화국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시인추방론’의 골자이다. 
  그렇다면 현재 김강용이 그리는 벽돌은 과연 어떤 성격의 벽돌인가? 그것은 화가가 그린, 벽돌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그린 모방으로서의 그림을 ‘초월한(beyond, hyper)’ 그림이다. 그것은 자기 부정의 결과이다. 이데아로서의 벽돌에서 세 번째 떨어진 모방물로서의 벽돌 그림을 초월하여, 다시 이데아의 세계로 다가간다고 하는 것은 곧 실재를 향해 나아가려는 초극의 몸부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할 때 지난 40년간의 벽돌을 매개로 벽돌에 의한(하이퍼리얼리즘), 벽돌을 위한(현재) 수행의 긴 과정은 그 자체 설득력을 지닌다. 
 김강용은 벽돌이라는, 어찌 보면 흔한 소재를 화두로 삼아 40년이 넘는 험난한 구도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몸은 그러한 길을 걷는데 꼭 필요한 방편이다. 그래서 스님이 선(禪) 수행을 하는 것이나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목적은 달라도 이른 결과는 같다는 말이 성립하는 지도 모른다. 아니, 비단 화가뿐만이 아니라 무명의 목수나 도공이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두 몸을 매개로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면 결국 자신이 걸어온 길을 통해 몸으로 닦은 렌즈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그림 안에 모든 게 다 녹아 있다”고 한 김강용의 발언이 이해됨직도 하다. 
  Ⅱ. 
 김강용이 70년대 중반에 당시 유행하던 극사실주의에 빠져 모래로 벽돌을 그릴 때만 해도 그는 벽돌의 겉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자 했다. 즉, 벽돌이 ‘벽돌 그 자체’로 보이길 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벽돌이었을까? 당시 만일 어떤 관람객이 전시장에서 벽에 걸린 김강용의 벽돌 그림을 보았다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야, 정말 기가 막히게 똑같이 그렸군!”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유행한 포토리얼리즘 또는 하이퍼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아 70년대 중반 한국에서도 ‘극사실주의’라고 불렀던 하이퍼리얼리즘적 경향이 성행하였다. 여기서 굳이 ‘-적’이라고 한 이유는 당시 한국의 극사실주의가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이나 극사실적 필치로 도시풍경을 그린 리차드 에스테스(Richard Estes:1932-  ) 류의 냉엄한 객관적 묘사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완전히 무르익은 포토리얼리즘 작가들이 많이 보이지만, 70년대 당시의 소위 하이퍼리얼리즘 작가들은 미국식의 아주 극단적인 묘사에는 이르지 못 했다. 그것은 당시 기술(技術)의 한계이거나 혹은 관점의 다름에서 오는 차이이기도 했다. 
  당시의 한국 사회는 1960년대 초반부터 비롯된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한창 건설의 붐이 일고 있었다. 창원, 여수, 인천, 구로 등지에 공업단지가 조성되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 아파트 단지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하이퍼리얼리즘은 이런 사회적 배경 아래 탄생되었다. 고영훈의 돌, 주태석의 철도 레일, 지석철의 쿠션, 조상현의 공사장 가림판을 그린 그림들이 [앙데팡당]전이나 [서울현대미술제] 등등의 대형 전시회에 모습을 드러내던 때였다. ‘벽돌’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김강용의 트레이드 마크가 돼 갔다. 1978년에 창립된 <사실과 현실> 그룹1)은 하이퍼리얼리즘을 통해 현실에 대한 발언을 집단적으로 시도한 단체였으며, 김강용도 이 그룹의 멤버로 활동한 바 있다. 

Ⅲ.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극사실주의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으로 기술돼 있는 김강용은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더 이상 극사실주의 작가가 아니다. 이것이 내가 앞에서 한국의 극사실주의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 이유이다. 그는 극사실주의 작가로 출발을 하였으나, 오랜 세월에 걸친 수련을 닦은 뒤 이제는 극사실주의를 넘어선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 ‘어떤’ 경지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현실에서 출발하였으되, 현실을 ‘초월’한 세계이다. 그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다소 길지만 다음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김강용의 작업이 아직도 벽돌에 관한 것으로 읽힐 수 있는 요인은 모래라고 하는 질료적 측면과 장방형의 입방체가 지닌 형태적 유사성에 기인한다. 이는 우리의 경험에 입각한 연상작용의 결과이다. 그러나 시점(視點)의 모순과 벽돌의 크기에 있어서 논리적 모순을 보이고 있는 그의 근작들을 분석해 보면 작품에 나타난 벽돌의 이미지들이 현실적 정황이나 실제의 벽돌이 지닌 본질을 떠난 것으로 파악된다. 1점 소실의 원근법적 체계를 무시한 다시점법의 도입, 크기가 제각각인 벽돌들, 벽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깔끔한 외양, 두꺼운 캔버스의 옆면과 거기에 묘사된 벽돌의 측면 등은 그의 작품이 대상으로서의 벽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모사의 차원에서), 이상화된 벽돌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김강용이 벽돌의 이미지를 화면 구성의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그것은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을 초월해 있다. 그가 보여주는 벽돌 이미지의 다양한 변주는 화면에 조형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지적 노력의 소산이다. 그는 리듬, 균형, 조화, 균제, 강조, 파격과 같은 다양한 조형원리를 통해 화면을 구성하며, 그렇게 산출된 작품들은 감상자에게 미적 쾌감을 준다.”  

   -윤진섭, <‘보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한 회화적 질문>, 2002년 박여숙갤러리 전시서문-



 Ⅳ. 
 김강용의 벽돌 그림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의 그림이 벽돌의 이상적(ideal) 형태에 가까이 다가간 모습이라는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다가간 것이라기보다는 ‘다가가는 중’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완성태(entelecheia)’를 향해 질료가 형상을 머금어가는 ‘가능태(dynamis)’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모래로 이루어진 낱낱의 벽돌은 모래 바르기와 그리기 등등 숙련된 오랜 노동을 거쳐 탄생하며, 개별의 벽돌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조합과 그로 인한 시각적 착시, 조화, 원근법의 부정과 다시점법의 도입 등등은 오랜 연구와 조형적 실험의 소산이다. 그 결과 벽돌의 이상적 형태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추상화(抽象化)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벽돌 그림 앞에 서서 관객들은 구상화라기보다는 한 폭의 기하학적 추상화(抽象畵))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최근 들어 시도하고 있는 흰색 계통의 작품들은 초현실적일 만큼 충격적인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를 내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얼굴을 희게 분장한 일본의 부토 무용수처럼 이질적으로 보인다. 부토 무용수들이 현실에서 떠난 효과(비현실)를 내기 위해서 얼굴을 희게 칠하듯이, 김강용이 오래 전부터 연구해 온 적, 청, 황, 백 등등 다색의 채색 기법은 이러한 초현실적 소외효과의 창출과 궁극적으로 그것이 가져다 줄 이상화 내지는 추상화(抽象化)와 관계가 깊다. 
 그의 그림이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빛과 그림자 사이의 시각적 트릭에 기인한다. 그의 그림이 얼핏 보면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은 그림자를 자세히 관찰하면 이내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광원의 거리에 따라 그림자들의 길이가 거리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데 그림 속의 벽돌들의 그림자는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일정한 면적과 비슷한 길이로 돼 있기 때문이다. 김강용의 그림에서 다시점의 문제는 바로 이런 시각적 트릭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은 그가 서양식의 일점 소실에 의한 원근법적 체계를 부정하고 구한말의 책거리 병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시점의 방식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방에 벽돌이 그려진 기둥 그림에도 이러한 시각적 트릭은 공존한다. 입체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평면 위에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와 환영 사이에서 파생된 이 이율배반의 관계는 70년대의 단색화와 개념미술에서 흔히 논의되던 ‘평면의 자기동일성’ 혹은 ‘평면의 자기동일증명’이란 명제를 낳았다. 비트겐쉬타인 류의 ‘동어반복’이란 개념과 함께 화단에서 자주 운위되던 이 말은 평면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제거하면 캔버스 표면이 드러나는 데서 오는 논리적 귀결에 대한 당혹감을 함축하고 있다. 결국 삼차원의 입체처럼 보이는 상에서 그림자를 제거하면 평면이 드러나니 실제와 이미지, 즉 허상의 관계를 ‘평면의 자기 동일성’ 내지는 ‘평면의 자기동일증명’이란 용어로 칭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강용의 벽돌 그림도 크게 보면 이 문제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요, 이에 대한 다각적인 조형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김강용이 주재료인 모래에 대해 기울이는 정성과 노력은 비상하다. 그의 작업실에는 국내는 물론 세계의 여러 곳에서 모은 각양각색의 모래들이 즐비하다. 그는 전문가적인 식견을 갖고 이 다양한 모래들을 작품의 적재적소에 활용해 왔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예컨대 동해안의 모래와 서해안의 모래에는 서로 다른 차이가 있는데, 동해안의 모래는 투명한데 비해 서해안의 모래는 탁하다는 것이다. 그는 벽돌 그림에서 각자 다른 효과를 낼 때 이 재료들을 구분하여 사용한다.    이처럼 모래를 사용하여 작업을 하는 김강용에게 있어서 모래가 지닌 의미는 각별하다. 그는 모래를 조형요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파악한다. 그것은 조형의 3대 기본요소인 점, 선, 면 가운데 최소의 단위인 점에 대한 유비(analogy) 이다. 점이 모여 일정한 방향성을 가질 때 선이 되고 선이 여럿 겹치면 면이 되며, 다시 면이 여러 개 모여 입체로 변모되는 과정을 그는 사회에 견준다. 그는 그것을 개인-가정-사회-국가로 진화,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 비유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합리적 관료 시스템의 체계가 작동하듯이, 그는 벽돌이란 개체의 이런 저런 조합을 통해 화면을 통어하는 것이다. 그의 그런 발상과 화면 운영 방식은 칸트(Imanuel Kant)의 용어를 빌리면 ‘구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에 따라 작가의 상상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낳게 된다. 이를 증명하듯 김강용은 70년대 이후 모래를 매개로 다양한 방법적 실험을 지속해 왔다. 초기의 모래를 사용한 벽돌 묘사에서 시작하여 80년대의 흙손으로 모래를 넓게 펴서 바르는 작업에 대한 묘사(<현실+상(像)> 연작), 90년대 이후의 파편화된 벽돌의 모습을 그린 작업에서 질서정연하거나 흐트러진 벽돌담의 다양한 표정을 담은 작업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다채로운 변신을 꾀해왔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비단 단색조에서 채색에 이르는, 눈에 보이는 색깔과 형태뿐만 아니라 재료의 사용에도 다양한 변화들이 수반되었다. 단일한 모래의 사용에서 출처가 다른, 따라서 모래의 질감과 크기, 색깔이 서로 다른 모래들을 한 화면에 공존시키는 방법이 도입되는가 하면, 순수한 모래의 사용과 채색의 병행 등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방법론들이 고안되었고, 다양한 실험을 거쳐 실천에 옮겨졌다


Ⅴ. 
 김강용의 작업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왜 변화가 없느냐는 질문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벽돌이라는 오래된 단일 소재가 주는 인상에 기인한 대단히 피상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의 작업은 거꾸로 아주 많은 변화를 점진적으로 겪어왔으며, 매우 풍부한 변형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작업은 늘 변화하며 진화해 가는 ‘과정의 예술’이며, 작업에 투입된 시간의 양적 축적이 대단히 큰, 한 마디로 엉덩이가 무거워야 가능한 ‘몸의 퍼포먼스’이다. 
 그처럼 지난한 과정에서 다채로운 실험들이 이어졌다. 단색조에서 칼라로의 점진적인 이행과 다시 칼라에서 단색조로의 환원, 그리고 그 사이에 기둥을 연상시키는 사각 입방체에 대한 실험이 있었다. 그는 삼년 전부터 흰색 모래에 채색을 가미하여 전체적으로 희게 보이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 작업 역시 다양한 변주가 실험되고 있으며, 그것은 대략 흰색과 유채색의 조합, 서양장기판을 연상시키는 체크무늬의 도입, 동일한 패턴의 반복과 배열에 의한 리드미컬한 화면 효과의 창출 등으로 요약된다. 
 이처럼 벽돌을 화두로 삼아 전개된 김강용의 치열한 실험은 결국 그림이란 무엇인가, 화가들은 무엇을 그리고, 왜 그리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들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이처럼 존재론적이며 현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는 김강용의 그림을 그리는 행위 속에는 철학적인 동시에 윤리적이며, 궁극적으로 삶의 실천이라는 태도의 문제가 담겨 있다. 한 마디로 말해 그것은 삶의 전일적인 수행의 문제이다.    
 마치 스님이 벽을 마주보고 선(禪) 수행을 할 때(면벽수행(面壁修行)), 처음에는 온갖 상념이 오가는 것처럼, 김강용 역시 사물의 실제와 허상 사이에서  숱한 조형적 혼선을 겪었다. 따라서 벽돌을 둘러싼 40여 년에 걸친 그의 실험과 도전은 결국 허상을 둘러싼 이미지 트릭과의 싸움이랄 수 있다. 그리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실재와 허상을 둘러싸고 파생되는 시각적 이율배반에 대한 장대한 서사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허상에 그칠 공산이 크다. 그러한 허상들의 난무 속에서 궁극적으로 어떻게 참나(진아(眞我))를 찾는가 하는 것이 선수행의 요체인 것처럼 2), 회화 역시 장구한 역사를 통해 풀리지 않는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에 갇힌 신세이기 때문이다. 상(像)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외부인가? 아니면 우리의 마음속인가? 김강용의 작업은 이처럼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는 하나의 과정처럼 보인다.        
                                     
<성곡미술관, 2020>



1)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생 8명으로 구성된 사실주의 성격의 미술단체이다. “현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내세움과 동시에 현실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극사실 회화를 집단차원에서 체계화하고자 한 단체이다”(한국미술단체 100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발행, 2013, 278쪽). 창립회원은 권수안, 김강용, 김용진, 서정찬, 송윤희, 조덕호, 주태석, 지석철 등이며 후에 공옥심, 김명기, 김승연, 윤세웅 등이 합류하였다. .  

2) (공즉시색(空卽是色), 시색공즉(是色空卽).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물질적인 세계와 평등 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뜻함. 원문은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며, 이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된다.그리고 범어(梵語) 원문은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로 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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