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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표지로서의 물방울

윤진섭

문화적 표지로서의 물방울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김창열이란 존재의 미술사적 의미는 전후 한국 현대미술사에 있어서 최초의 전위미술 운동단체인 현대미술가협회의 창립 멤버1) 중 핵심 인물이란 사실에 있다. 1957년에 결성된 이 단체는 비정형, 즉 앵포르멜(Informel) 화풍을 추구했다. “미군의 군화 발에 묻혀 들어왔다”고 누군가가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한국의 앵포르멜은 2차대전이 끝난 뒤 실존주의의 물결에 맞춰 나타난 광포(狂暴)한 표현 양식을 보여준 유럽의 앵포르멜과 유사한 양상을 띠었다. 
 현대미술가협회가 주최한 [현대전]2)은 당시 뜨거운 추상을 선도한 이 단체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 단체의 회원들은 일제강점기에 초등과 중등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어에 익숙한 세대에 속했다. 일본 유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유학 세대에게 미술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만큼 일본 문화에 익숙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일본식 교육을 받고 청년기에 해방공간의 혼란을 직접 체험했으며, 한국전쟁이 야기한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목격했던 것이다. 앵포르멜이 미군의 군화에 묻혀왔다는 자조적 표현은 따라서 피폐한 전후의 문화적 상황과 정체성의 혼란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으로 전국토가 폐허가 된 상황에서 혼란을 딛고 일어서기란 그만큼 힘겹기도 했으려니와, 그 와중에서 자신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설정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으리라.  당시 앵포르멜 운동을 선도한 김창열은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선언문 속에 담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용해되어 있는 상태다. 어제와 이제, 너와 나, 그리고 사물들의 전부가 철철 녹아서 한 곬으로 흘러 고여 있는 상태인 것이다. 산산히 분해된 나의 제 분신들은 여기 저기 다른 곳에서 다른 성분들과 부딪쳐서 뒹굴고들 있는 것이다. 아주 녹아서 없어지지 아니한 모양끼리 서로 허우적거리고들 있는 것이다. 이 몸짓이 바로 나의 창조행위의 전부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고정된 모양일 수가 없다. 이동의 과정으로서의 운동 자체일 따름이다. 파생되는 열과 빛일 따름이다. 이것이 나에게 허용된 자유의 전체인 것이다. 이 오늘의 절대는 어느 내일 결정(結晶)하여 핵을 이룰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덥기만 하다. 지금 우리는 지글지글 끓고 있는 것이다.” 

1) 1957년 5월 1일부터 9일까지 미국공보원에서 열린 현대미술가협회의 창립 멤버는 김영환, 김종휘, 김창열, 김청관, 문우식, 이철, 장성순, 하인두 등. 여기서 1956년에 ‘반(反) 국전’을 선언하며 ‘사인전(四人展)'을 연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박서보 중에서 김영환과 문우식만 현대미술가협회의 멤버로 참여하고 김충선과 박서보는 빠졌다. 박서보가 현대미술가협회에 참가하는 것은 2회전에 이르러서이다.
2) 현대미술가협회가 주최한 회원전의 명칭이 ‘현대미협전’이 아니라 ‘현대전’으로 표기된 사실은 당시 전시회가 열린 화신화랑 입구에 걸린 현판(제3회 현대전(現代展))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화랑의 입구에서 현대미술가협회의 동인들인 하인두, 장성순, 김창열, 박서보, 전상수, 김청권 등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3) 중국국가박물관과 한국의 표화랑이 공동주최한 김창열전 도록에는 1961년 10월 1일부터 7일까지 서울의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현대미협의 전시에서 김창열이 이 선언문을 작성한 것으로 명시돼 있다. 그러나 당시 약간 후발주자로 참여하여 나중에 현대미협의 대표위원을 지낸 조용익(1934년생)의 연보에는 이 전시의 명칭이 [연립전(현대미협+60년미협)]으로 명기돼 있다. 조용익, 지움의 비움, 2015년 성국미술관 도록 참조. 

위 글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자신에게 허용된 자유의 전체를 ‘이동의 과정으로서의 운동’으로 본 김창열은 전위의 운동체로서의 앵포르멜의 정신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그것을 그는 ‘산산히 분해된 나의 제분신들’이 다른 분신들과 부딪쳐 뒹굴고 허우적거리는 상태, 즉 창조행위로 본 것이다. 비정형(非定形)을 뜻하는 앵포르멜은 마치 용광로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금속의 점액질처럼, 아직 고정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김창열의 앵포르멜 작품은 50년대 후반 당시 현대미술가협회의 대다수 회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검은 색과 갈색 위주의 형해화한 인체 표현처럼 어둡고 음습하며 우울한 미감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화풍은 앵포르멜이 과잉된 표현으로 인하여 지리멸렬해지기 시작한, 그래서 종래는 해체의 국면에 진입하기 시작한 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김창열의 <제례(祭禮)> 연작은 어두운 갈색 혹은 검정색 톤의 바탕위에 단순한 직선의 병렬이나 혹은 말라비틀어진 점들을 한바탕 거센 바람이 불어 할퀴고 지나간 것 같은 황량한 느낌을 노출하고 있다.     

Ⅱ. 
 한 연보에 의하면, 김창열의 가문은 유교를 숭상한 선비 집안이었다. 그의 조부는 지주인 동시에 인근에서 알아주는 명필가였다. 조부는 어린 손자에게 먹 가는 법, 붓 잡는 법, 획 긋는 법 등 서예의 기본을 가르쳤다.4) 이 때 배운 한문과 서예의 소양은 훗날 김창열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물방울 연작의 바탕으로 천자문에서 따온 한문 글자들을 배치하는 기본이 된다.  
 천자문이 김창열의 작업에 도입된 시기는 8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5) 이 시기는 김창열이 물방울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1970년으로부터 약 15년이 경과한 때였다. 긴 시간의 우회로를 돌아 드디어 동양의 문화적 정수인 한문과의 만남이 비롯된 것이다. 김창열의 60년 화업을 크게 구분할 때, 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후반에 이르는 앵포르멜의 시기, 70년대 초반에서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물방울의 시기, 그리고 80년대 중반에서 현재에 이르는 물방울과 한자와의 만남의 시기는, 일견 지루한 듯 보이지만 거기에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변형과 숙성의 등식이 놓여있다. 20대의 젊은 시절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은 바 있는 그로서는 장년에 찾아 온 안정된 기간을 거치면서 한자를 통해 우주의 철리를 통찰하는 시기에 당도한 것이다. 그것은 첫째, 물방울을 통해 둘째, 한자와의 만남을 통해 가능했다. 
 천자문과 물방울의 결합을 동양 특유의 우주적 관점에서 파악한 인물은 미술평론가 이 일이었다. 1970년대 초반 단색화가 한국미술계의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하여 점차 획일화를 향해 나아가던 추이를 미술현장에서 지켜본 이 일은 모더니즘의 옹호자였다. 그는 박서보를 비롯하여 권영우, 정상화, 정창섭, 윤형근, 하종현, 김기린, 서승원, 최명영, 최병소, 이동엽, 허황 등을 가리켜 ‘70년대의 작가들’이라고 통칭했다. 물론 김창열도 거기에 속했다. 이 일을 70년대 미술의 특징을 ‘원초적인 것으로 회귀’라고 불렀다.6)  이 일이 70년대라는 한 시대의 회화적 양상을 가리켜 ‘원초적인 것으로의 회귀’라고 부른 것은 동시대를 산 비평가의 통찰에 기대고 있다. 오늘날 단색화라는 명칭으로 국제적 용어가 된 이 회화적 양식의 본질은 오로지 ‘정신성’으로 수렴된다. 투명하고 맑은 동양 정신으로의 회귀는 김창열이 천자문으로 대변되는 한자의 세계로 복귀한 것과 동질의 관계를 갖는다. 그것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가?

Ⅲ.  
 이 글을 쓰기 위해 김창열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던 중, 나의 시선은 한 그림의 이미지에 머물렀다. 1964년에 제작한 <제례>(162x130cm)란 작품이다. 거기, '비정형(Informel)'의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그린 이 작품의 오른 쪽 상단에 점액질처럼 흘러내린 물방울이 하나 있지 아니한가! 이제 김창열의 전매특허가 돼 버린 물방울의 원형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단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앵포르멜이란 게 원래 물감을 캔버스에 짓이기거나 들이 붓는 스타일이다 보니 우연히 그런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모습은 물방울의 형태에 너무나 가까운 것이 아닌가? 단지 투명하지 못 하다는 사실만 빼고는 말이다.   김창열의 물방울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970년 무렵이었다.7) 1966년에서 8년까지 3년 동안 뉴욕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을 한 그가 비로소 파리에 정착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세계 현대미술의 메카로 부상하던 뉴욕에서 당시 한창 유행한 팝아트와 극사실주의를 체험한 김창열이 유럽 현대미술의 본고장인 파리로 옮겨가 기존의 앵포르멜과는 다른 신경향의 그림 스타일을 암중모색하던 때였다. 그는 한국전쟁 때 겪은 처절한 삶의 체험이 응고된 상징적 형태로 물방울을 선택했다. 그것은 처음에 맑고 투명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상처가 난 피부를 비집고 나온 고름처럼 찐득찐득한 점액질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1970년에 제작한 <제전(祭典)>(150x150cm)은 반복된 정방형의 틈 사이로 비저 나온 희거나 노란 점액질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처럼 불투명한 점액질이 맑고 투명한 물방울로 변모되는 시기는 대략 1972년 무렵이었다. 이 때 그린 <밤의 사건>(160x160cm)은 어두운 검정색의 바탕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물방울을 단 하나, 그것도 매우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크게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시작으로 이듬해부터는 ‘물방울’이란 제목의 본격적인 작품들이 탄생되기에 이른다. 그것들은 물방울의 존재 양태에 주목한 것이었다. 생마포 천이나 캔버스에 바른 모래 위 여기저기에 흩어져 존재하는 수많은 물방울들. 그것들은 풀잎에 맺힌 영롱한 물방울이거나 이제 막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방울의 생생한 모습 그 자체였다.
  내가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을 처음 본 것은 1976년에 열린 현대화랑 개인전에서였다. 그 때 본, 캔버스 위에서 영롱하게 빛나던 물방울의 모습은 실로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평범한 물감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 그것들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영롱한 물방울로 보이는 것은 차라리 경이에 가까웠다. 그것은 물방울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묘사한 극사실주의 기법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맑고 투명한 물방울의 존재를 통해 현실을 초월한 어떤 이상적 상태를 동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비현실적인 존재다. 현재 나의 눈앞에 보이되,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 다시 말해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항으로서의 존재자인 그것은 허상의 시각적 트릭이 빚어내는 드라마인 것이다.
  김창열은 유년시절에 할아버지에게서 서예를 배웠다. 종이를 아끼기 위해 한 장의 종이에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연습했던 이 추억이 작업과 연결된 것은 1986년 무렵이었다. 캔버스에 부드러운 톤으로 쓴 천자문 위에 예의 영롱한 물방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김창열의 그림에서 한자는 단정한 인쇄체거나 손으로 쓴 서체의 모습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들은 캔버스 상의 구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면서 김창열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다.8)

Ⅳ.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은 청년시절에 고국의 쓰라린 현실에서 목격한 여러 가지 상흔에서 비롯된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고자 한 데서 나온 자기 승화의 과정이다. 맨 처음 그것은 불투명한 점액질로부터 비롯되었다.9)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친 수련과 모색의 시기를 거치면서 불투명한 점액질은 마침내 투명한 세계를 드러내기에 이른다. 그것은 어둡고 암담하기만 조국의 현실이 가져다 준 무기력과 미래적 전망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현실에 대한 극복의 몸짓을 통해 가시화된다. 약 10여 년에 걸친 앵포르멜 운동의 고비마다 선언문을 작성하여 뛰어난 문재를 드러낸 김창열의 통찰이 시대의 증언으로 손색이 없는 것은 현실을 투명하게 직시할 줄 안 그의 문학적 재능에 기인한다. 악뛰엘의 선언문으로 작성된 그의 다음과 같은 글은 탁월한 그의 통찰이 빚은 결과이다.
  “해진 존엄들 여기 도열한다. 그리하여 이 검은 공간 속에 서로 부등켜 안고 홍소한다. 모두들 그렇게 현명한데 우리는 왜 이처럼 전신이 가려운가. 살점 깎으며 명암을 치달아도 돌아오는 마당엔 언제나 빈손이다.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광기뿐이다. 결코 새롭지도 않은 이 상태를 수확으로 자위하는 까닭은 그것이 이른바 새로운 가치를 사정할 수 있는 기본적인 생리이기 때문이다.”10)  

  ‘검은 공간’으로 묘사된 시대적 배경은 국민들의 자유를 옥죈 자유당 정권의 폭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민중의 봉기(4.19)와 뒤 이어 찾아온 군정(5.16)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앵포르멜의 작가들은 어두운 톤의 색과 거칠고 탁한 마띠엘로 커다란 화면을 뒤덮었다. 시대적 산물인 예술이 시대를 증언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앵포르멜이 당대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자적 혹은 예언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자명해 보인다. 
 앵포르멜로 화업을 시작한 김창열이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사회와의 부단한 접촉을 통해 무의식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심리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한 의지는 투명한 물방울의 형태를 통해 표출되었다. 마침내 파리에 둥지를 튼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파리, 서울, 도쿄, 뉴욕, 토론토, 베를린, 뒤셀도르프, 뮌헨,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대만, 북경 등 전 세계에 걸쳐 전시회를 가짐으로써 코스모폴리탄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이른다.      
 현재 파리와 뉴욕, 서울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국제적 코스모폴리탄인 김창열은 자기 정신의 원류를 한자에서 찾고 있다. 인의와 예지에 바탕을 둔, 동양의 뿌리깊은 문화적 전통에서 우러나오는 서도와 물방울의 만남은 지역적 특수성이 곧 세계적 보편성과 통한다는 금언의 뚜렷한 한 예인 것이다.                                                
 -김창열미술관 개관기념 세미나 발제문-


1) 1957년 5월 1일부터 9일까지 미국공보원에서 열린 현대미술가협회의 창립 멤버는 김영환, 김종휘, 김창열, 김청관, 문우식, 이철, 장성순, 하인두 등. 여기서 1956년에 ‘반(反) 국전’을 선언하며 ‘사인전(四人展)'을 연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박서보 중에서 김영환과 문우식만 현대미술가협회의 멤버로 참여하고 김충선과 박서보는 빠졌다. 박서보가 현대미술가협회에 참가하는 것은 2회전에 이르러서이다. 
2) 현대미술가협회가 주최한 회원전의 명칭이 ‘현대미협전’이 아니라 ‘현대전’으로 표기된 사실은 당시 전시회가 열린 화신화랑 입구에 걸린 현판(제3회 현대전(現代展))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화랑의 입구에서 현대미술가협회의 동인들인 하인두, 장성순, 김창열, 박서보, 전상수, 김청권 등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3) 중국국가박물관과 한국의 표화랑이 공동주최한 김창열전 도록에는 1961년 10월 1일부터 7일까지 서울의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현대미협의 전시에서 김창열이 이 선언문을 작성한 것으로 명시돼 있다. 그러나 당시 약간 후발주자로 참여하여 나중에 현대미협의 대표위원을 지낸 조용익(1934년생)의 연보에는 이 전시의 명칭이 [연립전(현대미협+60년미협)]으로 명기돼 있다. 조용익, 지움의 비움, 2015년 성국미술관 도록 참조. 
4) 김창열, 앞의 도록 연보 143쪽 참조. 
5) 이 일, <김창열의 천자문과  물방울>, 인공갤러리 도록, 1991. 표화랑의 도록에서 재인용.   “ ‘천자문’이 김창열의 작업에 도입된 시기는 아마 1986년 경일 것이다. 이 시기에 김창열은 물방물의 모티프와 배경을 연관시키기 위한 새롭고도 지속적인 실험을 계속했다. 그 결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물방울들이 어두운 색상의 비정형적 표면에 의해 둘러 싸여지거나 대비되었고, 다른 하나는, 물방울들이 한자(漢字) 위에 놓여졌다는 것이다. 때로 문자들은 물방울들과 짝을 지우면서 형체가 해체되었다......이렇게 설명하면 너무 단순화하는 위험이 있지만, 천자문에서 처음 나오는 두 개의 표의문자이자 우주를 지칭하는 ‘하늘 천’과 ‘따 지’에 특히 흥미를 갖고 있는 나로서는, 김창열의 작품에서 ‘천자문’이 하늘을 의미하고 물방울들이 땅을 의미하며,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하나의 세계 즉 예술가의 고유한 예술 세계를 형성한다고 봤다. ” 
6) “이 글의 첫머리에서 나는 일군의 ’70년대’ 작가들을 들기는 했으나 과연 이들의 개별성, 특수성을 묶을 수 있는 공통된 예술적 기조 내지는 발상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한 마디로 그들의 발상의 근원을 규정짖자면 그것은 ‘원초적인 것으로의 회귀’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으리라.....미술적 문맥으로서 보다는 정신적 기조로서의 이 ‘원초적인 것으로의 회귀’, 그럿을 우리는 ‘원초주의(原初主義)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일, <70년대의 작가들>,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재인용. 
7) “마구간에 정착한 첫 해에, 나는 서른 살 이후로 가장 추운 겨울을 보냈다. 마구간은 외따로 떨어져 있었고, 벽과 창문도 전혀 튼실하지 못했다. 얼음 같이 차가운 바람을 전혀 막아주지 못했다. 난방기구라곤 작은 곤로하나 밖에 없었다.    나는 도교나 불교의 수도승과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내가 특정한 신을 경배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종교적 깨달음을 추구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물방울을 만난 것이 바로 그때였다. 나는 그 마구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내가 지금의 아내를 만난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김창열 회고의 글 중에서, 표화랑 도록, 159쪽에서 인용.  
8) 본 장은 한국경제에 기고한 필자의 글을 인용한 것임을 밝혀둠.  
9) “끈적끈적한 점액의 층이 나를 감싸고 있다. 나는 나의 육체를 명확하게 볼 수도 없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다. 혁명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나는 온 힘을 다해 요동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간다 . 나의 생각과 계획조차도 아무 성과 없이 다시 무기력해진다. 김창열, <나의 비전>, 대한일보, 1962. 표화랑 도록에서 재인용. 
10) 김창열, 악뛰엘 선언문 3. 1962,



삶의 흔적과 사연, 캔버스에 이슬처럼 맺히다
윤진섭

한국의 대표적인 원로화가 김창열(80)은 화업 반세기 동안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그려 국제 화단에서 물방울 화가로 통한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미국 뉴욕아트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하고 1970년대에는 프랑스로 이주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그에게 그림은 시각적인 현상에 시적 충동을 끌어들여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화폭에 아침 이슬처럼 맺힌 물방울은 정적인 미감을 한껏 뿜어낸다.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투명하게 녹여낸 모습이 언젠가는 조용히 사라질 것처럼 다가온다. 존재의 부재인 ‘비움의 미학’이 여기에서 나온다.

김창열의 작품에 물방울이 등장한 첫 사례는 1964년작 <제례>(162×130㎝)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회화 운동인 앵포르멜(Informel · 비정형)의 말기에 그려진 이 작품에는 오른쪽 상단에 점액질처럼 흘러내린 물방울이 하나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돼 있다. 그의 전매 특허가 돼 버린 물방울의 원형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단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앵포르멜이란 게 원래 물감을 캔버스에 짓이기거나 들이붓는 스타일이다 보니 우연히 그런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모습은 물방울의 형태에 너무나 가까운 것이 아닌가? 단지 투명하지 못하다는 사실만 빼고는 말이다.

김창열의 작품에 물방울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70년 무렵이었다. 1966년에서 1968년까지 3년 동안 뉴욕의 아트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을 한 그가 비로소 파리에 정착하던 시기였다. 그는 당시 세계 현대미술의 메카로 부상하던 뉴욕에서 한창 유행한 팝아트와 극사실주의를 체험한 후 유럽 현대미술의 본고장인 파리로 옮겨가 기존의 앵포르멜과는 다른 신경향의 그림 스타일을 암중모색했다. 그는 6 · 25 전쟁 때 겪은 처절한 삶의 체험이 응고된 상징적 형태로 물방울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 맑고 투명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상처가 난 피부를 비집고 나온 고름처럼 찐득찐득한 점액질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1970년도에 제작된 제전(祭典 · 150×150㎝)시리즈는 반복된 정방형의 틈 사이로 삐져나온 희거나 노란 점액질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처럼 불투명한 점액질이 맑고 투명한 물방울로 변모되는 시기는 대략 1972년 무렵이었다.

이때 그린 <밤의 사건>(160×160㎝)은 어두운 검은색 바탕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물방울을 단 하나, 그것도 매우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크게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시작으로 이듬해부터는 물방울이란 제목의 본격적인 작품들이 탄생되기에 이른다. 물방울의 존재 양태에 주목한 것이다. 생마포 천이나 캔버스에 바른 모래 위 여기저기에 흩어져 존재하는 수많은 물방울들. 그것들은 풀잎에 맺힌 영롱한 물방울이거나 이제 막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방울의 생생한 모습 그 자체였다.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76년 갤러리현대의 개인전을 통해서다. 캔버스 위에서 영롱하게 빛나던 물방울의 모습은 실로 관람객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평범한 물감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 물방울들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영롱한 진주처럼 보여 차라리 경이에 가까웠다. 그의 그림들은 물방울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묘사한 극사실주의 기법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맑고 투명한 물방울의 존재를 통해 현실을 초월한 어떤 이상적 상태를 동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비현실적인 존재로 다가왔다. 현재 나의 눈앞에 보이되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 다시 말해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항으로서의 존재자인 허상의 시각적 트릭이 빚어내는 드라마로 느껴졌다.

김창열은 유년시절에 할아버지에게서 서예를 배웠다. 종이를 아끼기 위해 한 장의 종이에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연습했던 이 추억이 작업과 연결된 것은 1986년 무렵이었다. 캔버스에 부드러운 톤으로 쓴 천자문 위에 예의 영롱한 물방울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김창열의 그림에서 한자는 단정한 인쇄체나 손으로 쓴 서체의 모습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캔버스 상의 구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면서 그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이다.

현재 파리와 뉴욕,서울을 왕래하면서 작품활동을 하는 김 화백은 예술활동의 원형을 한자에서 찾고 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바탕을 둔, 동양의 뿌리 깊은 문화적 전통에서 우러나오는 서도와 물방울의 만남은 지역적 특수성이 곧 세계적 보편성과 통한다는 문화계의 오랜 불문율을 입증한 사례이다. 서울 이태원동 표갤러리(02-543-7337)의 김창열 개인전(29일까지)에서는 물방울을 소재로 한 김 화백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 한국경제 2009.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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