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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 용해된 물방울의 투명한 세계

윤진섭

한자에 용해된 물방울의 투명한 세계

                                               윤 진 섭(미술평론가)

 김창열(1929-   )이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1950년대 말엽, 전후(前後)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등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1957년 당시 6.25 전쟁이 가져다 준 경제적 궁핍과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서 일단의 젊은 미술인들이 그림을 통해 존재의 생생한 육성을 토해낼 때, 김창열은 그 주도세력의 한 사람으로서 미술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싸웠다. 만 스물여덞 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던 그는 김종휘, 문우식, 박서보, 장성순, 하인두 등등 ‘현대미술가협회’의 회원들과 함께 ‘앵포르멜(Informel)’ 풍의 추상회화 운동을 벌였다. 이 화풍은 원래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이었지만, 6.25 전쟁을 체험한 한국의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심정적 호응을 받아 한국적 상황을 그려내는데 일조하였다. 
 5.25전쟁을 통해 참혹한 인간성의 실종을 체험한 김창열은 훗날 이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앵포르멜의 말기에 그린 <제례>(1964년 작, 162x130cm)는 점액질처럼 찐득하게 흘러내린 물방울을 표현한 것으로, 이 작품이 바로 1970년에 등장하는 물방울 그림의 시초가 된 것이다. 
 1970년대에 파리에서 활동한 김창열은 이 시기에 화면을 영롱한 물방울로 가득 채우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물방울 연작이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76년 현대화랑 초대전을 통해서 였다. 당시의 한국 화단은 1950년대 후반 앵포르멜 미술운동을 벌인 동료화가들이 단색화를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무렵이었다. 박서보, 윤형근, 정창섭, 정상화, 조용익, 윤명로 등등 일단의 작가들이 미협을 중심으로 국제전에 참가하는 등 화단은 점차 국전에서 국제전으로 무게 중심이 이등하던 때였다. 이 시기의 화단은 비단 단색화뿐만이 아니라 개념미술, 극사실회화, 비디오 아트, 설치미술, 오브제 등 다원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은 극사실주의는 아니지만, 형태상의 유사성은 당시 화단에 유행하던 극사실주의의 확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창열은 캔버스 화면에 영롱하게 매달린 듯 보이는 물방울의 존재를 통해 물방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지점에 대한 이상적 상태를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이유는 전쟁을 통해 목격한 참혹한 모습(시체)을 통해 인간의 실존에 대한 강력한 의문을 고름의 형태로 표현한 바 있으며, 그 반대급부로서의 이상향을 투명한 물방울에 담아 그 염원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김창열의 화풍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물방울을 그린 캔버스의 밑바탕에 한자를 쓰기 시작하면서, 물방울은 한자들이 나열된 바탕 위에 자리잡게 된다. 이 한자쓰기는 유교적인 가풍과 어렸을 적부터 종이에 한자 쓰기를 연습하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제 만 아흔을 넘긴 노화가의 생이 물방울과 한자의 세계 속에 농축돼 가고 있는 것이다. 
                                            <헤럴드하트데이, 202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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