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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멀고도, 아주 가까운

윤진섭

아주 멀고도, 아주 가까운

                                         윤 진 섭

 정영한의 작품에 대한 나의 가장 강렬한 기억은 이른바 바다와 관련된 이미지들이다. 2008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에 정영한은 상당히 큰 대작들을 출품했다. 그 작품들에는 멀리서 흰 포말을 일으키며 눈앞으로 달려드는 짙푸른 파도나, 푸른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크게 클로즈업시켜 화면 가득히 그린 장미꽃이나 사과가 담겨 있었다. 그 그림들은 아주 매혹적이어서 바다와 관련된 젊은 시절의 추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 때의 그 느낌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리라. 전시장 안의 관객들의 표정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까. 

 그들은 아주 빼어난 작가의 묘사력에 감탄하면서 넋을 잃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정영한이 그린 바다 풍경들은 발터 벤야민(Water Benjamin :1892-1940)이 정의한 ‘아우라(aura)’의 본래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란 글에서 아우라를 가리켜 “유일하고도 아주 먼 것이 아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회적인 현상”으로 정의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이해하기 좀 난해하니 실제 사례를 들어보자. 벤야민은 두 개의 예를 든다. 어느 여름날 오후 조용한 정적 속에서 저 멀리 지평선 위에 드리워진 산줄기나, 그림자를 늘어트린 나뭇가지 하나를 보는 것. 벤야민은 바로 그것이 산과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쉬는 일이라고 했다. 

 기술복제 시대에 맞이하게 될 아우라의 상실은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가중된 '시뮬라크르(simulacre)’의 문제와 겹쳐 미술에서 사물의 ‘현존’의 의미를 묻는 더욱 풍부하고도 다양한 방법론들을 낳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컴퓨터에 의한 포토샵 작업은 이미 고전이 돼 버렸으며, 최근에 얼책(facebook)이나 인스타그램 등등 다양한 SNS 매체 상에서 유행하는 변신 앱(여성이 남성으로 혹은 남성이 여성으로 변신하게 만드는 정지 혹은 동영상 앱)은 현재로선  극한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정영한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지속해 온 풍경작업을 마감하고 2016년부터 포토샵을 이용한 이미지 작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포토샵에서 합성하거나 변형한 기존의 이미지를 그대로 출력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그리는 방식을 유지했다.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나 사물을 그리는 전통적 방식이 아니라, 웹(web) 상에 떠도는 이미지를 선택하여 그린 뒤, 거기에 특정한 단어나 문구를 결합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이미지와 언어를 결합하는 방식은 존 발데사리(John Baldesari : 1931-2020)가 대표적이거니와, 정영한은 발데사리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대략 2016년 무렵이니 네 해가 지났다. 이번에 금호미술관에서 발표한 <이미지-시대의 단상> 연작은 마치 컴퓨터로 출력한 이미지를 방불케 하는데 사실 이 작품들은 캔버스 위에 손으로 스케치하고 그 위에 채색을 가해 완성한 것들이다. <LOST>, <TIME>, <MYTH> 연작에서 제시된 이미지와 언어의 관계는 의미상 일치하는 것들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들도(따라서 소외효과를 낳는) 있다. ‘TIME’지의 폰트를 그대로 차용한 <TIME> 연작에는 각기 표정이 다른 파도의 모습들이 배경에 그려져 있다. 

 정영한의 이번 출품작들에는 작가로서 자신의 존재와 위상에 대한 고민이 읽혀지는 것들도 있고(예술가들을 소재로 한 연작), ‘상실(LOST)’이라는 시대적 키워드를 앞세운 것들도 있으며(가령 ‘80만원 세대’를 연상시키는), 정의(JUSTICE), 삶(LIFE), 청춘(YOUTH)처럼 가치중립적이며 보편적인 의미를 띤 단어가 등장하는 것들도 있다. 그 어느 것이 됐든 작가가 처한 현실적 고뇌의 분비물들이리라. 

사족 : 모든 작품의 언어가 영어로 된 것은 아무리 선의로 해석하려고 해도 다소 거슬린다. 무엇보다 소통에 지장이 많다. “MUST GET BACK”을 “회복해야만 한다”라고 즉석에서 번역할 수 있는 한국인 관객이 과연 얼마나 될까? BTS의 한글 가사를 따라 부르는 세계 팬들의 피부색과 인종을 초월한 열정을 생각하면, 한글 사용이나 아니면 적어도 한글과 영어를 같이 사용하는 방안도 심도있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아트인컬처,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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