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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의 동화(同化)

윤진섭

인간과 자연의 동화(同化)
[글로벌 노마딕 아트 프로젝트 2020-프랑스 ㆍ몽골ㆍ한국]전의 의미

                                             윤 진 섭(미술평론가)
                                          
Ⅰ.
 자연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한 대가로 발생한 ‘코로나 19(Covid 19)’가 점차 진정되는가 싶더니 다시 악화되는 조짐이 보인다. 이 질병이 인류에게 준 교훈은 “대자연 앞에 겸손하라.”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의 권위자인 최재천 교수는 이번에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사태의 본질은 아무 탈 없이 잘 사는 박쥐의 세계를 인간이 쳐들어가 들쑤신 사려 깊지 못한 행위에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의 이러한 진단에 적극 동의한다. 비단 박쥐뿐만이 아니라 나름의 질서와 고유의 생존 욕구를 가지고 살고 있는 다양한 동식물들에게 있어서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이처럼 공존이 아니라 정복과 피정복의 등식을 지닌 자연 대(對) 인간의 관계는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필시 공멸을 향해 치닫게 될 것이다. 그 끝은 어디가 될 것이며, 그 양상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이미 40년 전에 자연이 보내는 이상(異狀) 신호를 온몸으로 감지하고 자연에 관심을 가질 것을 인류에게 촉구한 자연미술(Jayeonmisul : Nature Art) 그룹 야투(Yatoo)의 활동이 옳았음을 최근의 팬데믹 사태가 웅변해 준다. 1981년, 공주와 대전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20-30대 젊은 작가들이 자연과 교감을 갖기 위해 산과 들, 해변으로 향했다. 이들은 ‘사계절연구회’를 조직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 하는 야외로 나가 야생의 상태 그대로 자연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들(野)에 몸을 던지다(投)’라는 뜻을 지닌 ‘야투’는 말 그대로 자연에 몸을 ‘맡기는’, 즉 ‘자연과 같아짐(同化))’, 혹은 ‘자연과 평화롭게 한 몸이 되는(同和))’ 행위를 의미한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데서 오는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그러한 갈등과 대립이 낳은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자연의 생태계를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생수(生水)라는 개념조차 없던 1980년대 초반에 결성된 야투의 창립 회원들은 마치 대지진을 경고하는 ‘연못 속의 메기’와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때문에 ‘코로나 19’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대재앙을 맞이한 현재, 야투의 회원들이 벌인 그간의 활동은 인류에게 보낸 경고의 메시지로 읽혀진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초기에 보여주었던 소박한 형태의 그룹 활동은 국제화되면서 더욱 조직화되었고, 현재 보는 것처럼 비엔날레 형태로 발전하면서부터 이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비엔날레’라는 제도화의 과정을 거친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당위에 대한 문제가 일각에서 제기될 수도 있지만, 팬데믹의 상황을 맞이한 현 상태를 감안하면 ‘글로벌 노마딕 아트 프로젝트(GNAP)’가 출범한 2014을 기점으로 세계적으로 확산된 자연미술 운동은 비단 국제미술계뿐만이 아니라 범지구촌적인 입장에서 행위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미술계의 그 어떤 활동이 자연과 생태의 문제를 이처럼 실감나게 수십 년에 걸쳐 집단적으로 온몸을 부딪치면서 인류에게 제기한 적이 있었는 지를. 7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발생한 대지미술(Earth Art)은 자연에의 동화라는 겸손한 태도가 아니라, 마치 자연과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 같은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아니었던가? 물론 자연에 동화하려는 제스처를 보여준 작가들이 세계적으로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이었을 뿐, 집단적인 운동이나 메시지는 아니었다. 이른바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면서 집단적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야투가 최초이다. 그동안 야투의 활동은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독일, 스위스, 영국, 일본, 멕시코, 미국, 프랑스, 몽골, 남아공 등등 수많은 나라의 언론들이 다룬 바 있다. 그것을 매개한 것이 바로 글로벌 노마딕 아트 프로젝트(GNAP)인 것이다. 

 2013년, 세계의 자연미술 관계자들이 공주에 모인 [국제자연미술기획자대회]에서 공식 결성된 글로벌 노마딕 아트 프로젝트는 이듬해인 2014년에 한국을 필두로 2015년 한국, 인도, 2016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 이란, 2017년에는 동유럽, 독일, 프랑스, 리투아니아, 터어키, 유럽, 2018년에는 영국, 2019년에는 멕시코, 독일, 이탈리아에서 열린 바 있다. 2020년에는 한국, 프랑스, 몽골에서 각각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사태로 인해 프랑스는 2021년 6월, 몽고는 7월로 각각 연기되었다. 그 대신 프랑스와 몽골 측은 참여작가들이 각자 현지에서 작업한 동영상을 모아 편집한 자료를 한국에 보냈으며, 이 동영상은 공주 자연미술센터에서 열린 [글로벌 노마딕 아트 프로젝트 2020-프랑스ㆍ몽골ㆍ한국]전에서 소개되었다. 


Ⅱ. 
 인간은 시간(Time)과 공간(Space)을 존재론적 조건으로 삶을 영위하는 존재다. 시간의 좌표(T)와 공간(S)의 좌표가 교차하는 지점에 머물다 사라진다. 

 그 점의 자취를 이으면 ‘선(線)’이 된다. 이 선이 일정한 방향을 지니고 움직이면 하나의 흐름이 되면서 자취를 남기게 된다. ‘유목(Nomadism)’은 바로 이 움직이는 선이 상징하는 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삶의 양식이자 근원을 묻는 행위이다. 그래서 글로벌 노마딕 아트 프로젝트의 참가자들이 벌이는 행위는 다름 아닌 ‘몸의 드로잉, 사유의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살아 움직이는 생물은 T/S 기반의 존재들이다. 그러나 인간과 동식물의 차이점은 ‘사유의 여부’와 ‘반성의 여부’에 있다. 사유가 문명과 문화를 낳는다. 동식물의 세계에 문명과 문화가 없는 이유이다. 반성이 철학과 종교를 낳는다. 동식물의 세계에 철학과 종교가 없는 이유이다. 또한 발달된 언어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이다. 인간은 말과 글 등 언어가 있기 때문에 동식물을 포함, 만물을 지배한다. 학문과 예술, 문화 등등 인간의 활동은 언어로 인해 더욱 정교해지고 고급화돼 간다. 만일 인간의 언어가 동물처럼 간단한 신호의 단계에 머물렀다면 오늘날처럼 발달된 문화와 예술은 축적되지 못 했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사유와 반성을 함으로써,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지나치게 물질을 추구하고 자연을 무자비하게 정복한 결과, ‘팬데믹’이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도래했음을 반성하고, 위기의 타개책이 무엇인지 문제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배의 관점에서 벗어나 자연과 생태에 대한 재고(再考)의 사유를 이끌어내고 있는 자연미술 운동의 의의라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이번에 한국과 프랑스, 몽골에서 전개된 글로벌 노마딕 아트 프로젝트는 ‘코로나 19(Covid 19)’라고 하는 예기치 못한 사태로 인해 본래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 하였다. 한국은 예정대로 워크숍이 이루어졌지만, 프랑스와 몽골은 여러 국적의 작가들이 각자 현지에서 진행하고 동영상을 보내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산과 바다, 강, 들, 숲 등등 자연의 품에 안겨 각자의  예술적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나는 제주도에서 열린 워크숍에 참여하여 작가들의 행위(performance)를 직접 보았다. 또한 프랑스와 몽골 측 참가자들의 행위가 담긴 동영상 자료를 통해 활동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몽골 측 참가자들의 행위는 간단히 편집된 것이기 때문에 전모를 충분히 파악하기에는 부족했다. 따라서 형평을 고려하여 나는 한국, 프랑스, 몽골 등 모든 참가자들의 작업에 관해 언급하는 대신 이들의 행위에 나타난 자연미술의 공통점과 의의에 대해 간략히 의견을 말하고자 한다. 

 국적이나 피부색, 인종, 문화적 배경, 언어, 풍토, 지리적 환경, 역사 등등 인간의 생존을 규정하는 제반 조건과 관계없이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자연미술 작가들은 자연에 동화되는 몸짓을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기존의 대지미술과 뚜렷이 구분되는 자연미술만의 특징이다. 서로 소통이 없이 오랫동안 떨어져서 각자 작업을 했지만, 자연미술가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보니 마치 한 가족처럼 친밀한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지구상에 공존하는 자연미술과 관련된 수많은 작가들과 단체, 행사들(각종 페스티벌, 전시회, 비엔날레, 트리엔날레, 학술세미나, 글로벌 노마딕 아트 프로젝트 등)이 짧은 시간에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한 자리에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동질성 때문인 것이다. 

 자연미술가들은 자연을 매개로 자연에 동화되는 심리적 동질감을 느끼는 가운데(자연 존중 사상) 각자 개성이 있는 예술적 행위를 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공통적 특징을 보인다. 첫째, 서사(narrative)와 스토리의 배제(반(反) 연극성(anti-theatricality), 둘째, 자연물을 통한 간단한 상징과 기호의 제시 및 이를 통한 소통의 의지 표출, 셋째, 문명적 물질의 거부(반(反) 문명), 넷째, 몸을 통한 행위의 원초성 표출, 다섯 째, 주거지에로의 회귀 의지, 여섯 째, 자연물을 이용한 최소한의 행위 지향, 일곱 째, 가공되지 않은 생짜의 자연물을 주재료로 사용 등등이다. 

 현재 세계의 자연미술가들은 이러한 행위의 유형과 특징을 보이는 가운데 지구촌이 처한 문제들에 대한 발언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생태의 위기에 대한 문제가 글로벌 이슈들 가운데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부상되는 현 상황에서 이들의 예술적 활동을 주목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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