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컴아트’는 소통을 의미하는 ‘communication’과 예술을 뜻하는 ‘art’의 합성어이다. 이 그룹은 1990년 1월 1일 당시 수원에 거주한 이경근, 김석환, 황민수, 허종수, 홍오봉, 최병기 등 30대 초반의 젊은 실험미술 작가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것이다. ‘대중과의 소통’과 ‘기존 예술형식의 부정’을 모토로 수차례에 걸쳐《교감예술제》를 개최하는 등 수원에 전위예술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슈룹(Shroop)’은 우리말로 ‘우산’을, 산스크리트어로는 ‘높은 곳에서 전체를 조망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그룹 역시 1990년에 김성배, 이윤숙, 도병훈, 전원길, 강성원, 안원찬을 주축으로 결성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정한 조형이념이나 고정된 규율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 이 그룹의 특징이다. ‘슈룹’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우선 이 글에서는 논지에 맞춰 ‘컴아트 그룹’의 중국 북경과 연계된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23) ‘컴아트 그룹’의 6년간에 걸친 치열한 활동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그것은 그것이 아니다전》에 수록된 나의 글「꿈과 열정,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 결성에서 해체까지-컴아트 그룹 6년의 활동 전말기」를 참고하라.
24) 김석환의 회고. 김석환과의 전화 인터뷰(2017. 7. 21).
25) 일본 작가들이 컴아트 그룹과 함께 북경 전시에 참가한 것은 이듬해인 1994년이었다. 한편, 『경향신문』 1992년 8월 27일자 문화면 기사는 「중국미술 잇단 서울 나들이, 수교타고 한중교류전 러시」라는 제하에 “호암미술관의 중국 고궁미술관 소장품전을 비롯하여 월전미술관, 동산방, 진화랑 등 국내 유수의 화랑들이 한중교류전을 각각 기획, 풍부한 가을 시즌을 예고하고 있다”며 당시 한국 미술계에 기류를 형성하기 시작한 중국 미술 특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26) 베이징 민생미술관의 부관장인 구어샤오엔의 글에 의하면 가오밍루(高名潞) 기획의《중국미술전》이 중국 정부의 탄압을 받아 전시중단이란 사태를 낳은 직접적인 원인은 작가들이 전시 개막일에 행한 일련의 행위예술에 기인하기도 했지만, 직접적인 빌미를 제공한 것은 샤오루(Xiao Lu, 肖魯)와 탕송(Tang Song, 唐宋)이 전시개막식에서 벌인 ‘총기발사사건’ 퍼포먼스였다고 한다. 구어샤오엔,「약술 : 1976-1995년 중국 아방가르드 미술」,『an 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Project 1 부산비엔날레 도록), p. 31.
27) “1993년 ‘닭의 해’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1월 5일 0시, 수원의 중심가에 위치한 장안문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사모관대를 비롯한 자유분방한 복장을 한 이들은 젯상(祭床)을 진설하고 출문제의(出門祭儀)를 거행하기 시작했다. 젯상의 한 가운데에는 T.V모니터가 설치되었고, 거기에는 장안문(長安門)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비쳐졌다. 수천 년 전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문명과 문화의 전래경로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첫 출발의 의식인 셈이다. 대표인 이경근에 의해 제문이 낭독되고, 참여작가 전원의 신고를 알리는 절이 행해졌다. 이들이 중국에 입국하기 위해 행선지를 인천항-천진-북경 간의 수로와 육로를 택한 것은 일종의 역사적인 탐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문화와 중국문화 간의 ‘근친적(近親的)’ 접근을 꾀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가교가 되는 셈이다.
1월 6일 0시, 인천과 천진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의 선상에서 행해진 하나의 퍼포먼스는 이 행사가 갖는 의미에 상징성을 더하는 것이었다. 대표인 이경근이 참여작가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소지(燒紙)를 올리고, 행사개요가 입력된 디스켓이 든 투명 플라스틱 용기를 서해 바다에 수장(水葬)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이 일련의 퍼포먼스는 행사전체를 이벤트(사건)化하려는 이들의 실험정신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했다.”
윤진섭, 「성곽도시의 전통건축과 관광자원 활용, 수원국제비엔날레」,『가나아트』( 1994년 1.2월호, p.61).
28) 윤진섭,「꿈과 열정,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 결성에서 해체까지-컴아트 그룹 6년의 활동 전말기」,《그것은 그것이 아니다전》(수원아이파크미술관, 도록), p .37.
29) “한중일 전시를 얼마 앞두고 북경에 갔더니 한국에 있을 때 약속했던 사안들이 하나도 실행에 옮겨진 게 없었다. 무엇보다 전시장 확보가 문제였다. 전시장 없이 어떻게 행사를 치룰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한국으로 연락, 김영광 의원의 도움을 받았다. 마침 북경 주재 한국 대사가 엣날 김영광 의원의 부하였다. 그래서 김의원이 연락, 대사의 주선으로 수도사범대학과 접선이 되었다. 대학 측에서 마침 전시장으로 쓰고 있던 공간에 ‘수도사범대학미술관’이란 간판을 걸어주어 무사히 전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렇게 해서 일이 풀렸다.” (김석환과의 전화 인터뷰, 2017. 10. 15.) 이와 관련하여 1994년 수도사범대학미술관에서 열린 한중일 전시《지금, 동(東)의 꿈(蒙)》전의 일본측 커미셔너인 우에다 유조의 술회는 이때 겪었던 심리적 고충이 어떠했는지 당시 상황의 이해를 위해 여기에 인용한다. ; “1994년 10월, 나는 베이징의 수도사범대학미술관(首都師範大學美術館)에서 중국, 한국의 친구들과 함께《중국ㆍ국제교감예술제-중국, 한국, 일본》(지금 동(東)의 꿈(夢)》전시와 동일한 전시임. 이 당시 우에다 유조는 리플릿을 직접 제작했는데 거기에 한문과 영문으로 ‘지금, 동의 꿈’을 표기했으나 여기서는 하나만 적었음. 필자 주)을 기획했다.....(중략)......당시 우리는 참여 작가와 함께 나리타공항에서 베이징 공항으로 작품을 수화물로 운반하여 전시를 했다. 베이징 출입국관리소에서 짐검사를 하는데 일본의 하치야 카즈히코(八谷和彦)의 <시청각 교환 머신>이라는 작품의 도청기 등의 기자재가 스파이 행위에 위배되는 바람에 나는 세관에 붙잡히고 여권을 빼앗긴 경험이 있다. 나는 정치적 불온분자, 위험분자로 여겨져 신원증명을 요구받았다. 함께 베이징공항에 도착한 친구들을 먼저 세관 밖으로 보내고, 나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일본대사관에 연락할 수 있도록 친구를 대기시켰다. 캐리어 속에는 도청기와 닮은 기계부품들과 함께 일본 공항에서 산 마일드세븐 담배를 100갑 정도 실어서 그 담배를 베이징의 세관원에게 건네주고 통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긴급사태를 예측해 일본에서 가져온 수도사범대학미술관의 관장의 사인이 들어간 초청장을 제출하고 세관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사실 그 미술관의 초청장은 워드로 작성된 한자만 있는 초청장으로 (심지어는 비닐을 끼워서 복사했으며) 마치 베이징으로부터 팩스로 보내진 것처럼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서 가독성이 떨어지도록 초점이 어긋나게 작성한 초청장이었다. 즉 ‘공문서위조’로 멋지게 보이는 ‘미술관으로부터의 초청장’이었다. 나는 베이징 공안에서 어려움 없이 빠져나와 무사히 공항을 나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중국, 한국, 일본의 그룹전이 개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도사범대학미술관에서는 중국의 리시엔팅(Lixianting 栗憲庭), 한국의 윤진섭, 일본의 타니 아라타(谷新), 미나미시마 히로시, 그리고 중국의 조선족인 윤길남 미술평론가와 함께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그러나 겨우30분밖에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중국공안부로부터 중지명령을 받게 되었다.”
우에다 유조, 「보편적인 예술의 역사」,『an 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Project 1 부산비엔날레 도록』pp. 142-3). 참고로 이 전시에 참가한 한중일 3국의 작가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국:왕루엔(王魯炎), 왕광이(王廣義), 왕지안웨이(汪建偉), 구더신(顧德新), 왕유신(王友身), 웨이광칭(魏光慶), 리용빈, 송똥(宋冬) 한국:이승택(李升澤), 이경근(李勁根), 김석환(金錫煥), 황민수(黃敏秀), 최효원(崔孝媛), 안영준(安泳俊), 최필규(崔弼圭), 최준걸(崔俊傑), 박창식(朴昌植), 김 중(金 中) 일본:우에다 유조(上田雄三), 미사와 겐지(三澤憲司), 아베 마모루(阿部 守), 니시 마사키(西雅 秋), 곤도 토시노리(近藤等則), 다카하시 칸(高橋 寬), 미야마에 마사키(宮前正樹), 하치야 가즈히코(八谷和彦), 시부야 히로유키(涉谷浩之)
1994년 10월 25일 오후 4시부터 북경 수도사범대학 세미나실에서 있었던 학술심포지엄에 참가한 발표자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국:리시안팅(栗憲庭), 구시안팡(顧丞峰), 시안지지안(錢志堅), 한국:윤진섭(尹晋燮), 김진숙(金眞淑), 일본:타니아라타(谷 新), 미나미시마 히로시
30) 우에다 유조, 위의 책, p. 143.
31) 발상 면에서 보자면 황민수의 이 퍼포먼스는 자금성을 향해 중지(中指)를 치켜세우고 찍은 아이 웨이웨이(Ai Weiwei)의 작품 <원근법 연구(A Study of Perspective)>(19995-2002) 보다 2년 정도 빠르다.
32) 홍오봉, 필자에게 보낸 메시지 중에서. 2017. 10. 15.
33) 그러나 그나마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당시의 해프닝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공간』을 제외하고 변변한 미술잡지가 없던 상황에서 이러한 언론매체들이 없었다면 이 부분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는 매우 빈약했을 것이다. 미술사가 조수진의 연구에 기대면 1964년 창간된『주간한국』을 필두로『선데이 서울』,『주간경향』,『주간여성』등 본격적인 주간지 시대가 열리면서 해프닝에 대한 대대적인 취재가 이루어졌다. “<제4집단>은 이처럼 가히 ‘주간지의 시대’로 불릴만한 언론 환경에서 등장해, 주간지 기자들의 주요 취재 대상이 되면서 대중오락 잡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조수진)할 수 있었는데, 이는『공간』을 비롯한 주류 미술언론이 해야 할 일을 당시 지식인들에게 저급한 매체로 여겨지던 대중지들이 대신한 꼴이 된 셈이다. 당시 정강자나 정찬승에 대한 『선데이 서울』을 비롯한 주간들의 흥미본위의 선정적 보도 내용과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는 조수진의 다음 논문을 참고하라. 조수진,「<제4집단> 사건의 전말 :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국립현대미술관, 2015), pp. 75-102,
<색인어>
전위예술(Avant-garde art), 해프닝(Happening), 퍼포먼스(Performance Art), 실험과 도전(experiment and challenge), 겁 없는 전사들(strong-hearted explorers), 컴아트 그룹(Com-art Group), 도전정신(challenge spirit)
<참고문헌>
구어샤오엔,「약술 : 1976-1995년 중국 아방가르드 미술」,『an 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 Project 1 부산비엔날레 도록, 2016, p.31
김미경,「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경계를 넘는 예술가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1999년도 박사학위 청구논문, 2000
레나토 포지올리, 박성진 옮김, 『아방가르드 예술론』, 1996
우에다 유조, 「보편적인 예술의 역사」,『an 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 Project 1 부산비엔날레 도록, pp.142-3 윤진섭, 『글로컬리즘과 아시아의 현대미술』, 사문난적, 2014
윤진섭 외, 『공간의 반란-한국의 입체, 설치, 퍼포먼스 1967-1995』, 미술문화, 1995
윤진섭,「꿈과 열정,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 결성에서 해체까지-컴아트 그룹 6년의 활동 전말기」,《그것은 그것이 아니다전》도록, 수원아이파크미술관, 2017
윤진섭, 「성곽도시의 전통건축과 관광자원 활용‘수원국제비엔날레」,『가나아트』, 1994년 1.2월 호, p.61
정강자, 『꿈이여, 도전이여, 환상이여』, 소담출판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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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ig Owens, Byond Recognition-Representation, Power, and Cultur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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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목록>
도판1. 해프닝, 한강변의 타살, 1968
도판2. 가두시위, 무동인과 신전동인, 1967
도판3, 투명풍선과 누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1968
도판4, 컴아트 그룹, 작업일지전, 팜플릿, 1990
도판5, 컴아트 그룹, 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전 도록표지, 1993
도판6, 홍오봉, 나는 누구인가?, 1993
도판7, 김석환, 한국과 중국의 대화, 북경 자금성, 1993
도판8, 한중일 3국의 작가들이 전시장 입구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장면, 1994
도판9, 박이창식과 황민수의 즉흥 퍼포먼스, 북경 만리장성, 1994
도판10-1, 황민수, 원근법-몸의 확인, 북경 자금성, 1993
도판10-2, 황민수, 원근법-몸의 확인, 북경 자금성, 1993
도판11, 컴아트 그룹 동경전 전단지, 1995
국 문 초 록
세계는 지금 자국(自國)의 이익을 좇아 빠른 속도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더욱 거세지고 있으며, 가공할 힘을 지닌 국제 금융자본의 무차별적 침투는 약소국의 삶의 질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아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이 재음미되어야 할 당위성은 경제와 정치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바로 이러한 세계 판도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 문화와 예술이 경제와 정치에 예속돼 가는 현상은 더 이상 분석의 고삐를 늦출 수 없는 시급한 사안이다. 차제에 아방가르드 미술이 다시 논의되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예술이 자본에 종속돼 가는 징후가 더욱 짙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여파로 미술시장은 서구로의 쏠림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바, 비록 중국이 부상 중에 있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아시아의 힘의 약화로 풀이된다. 미술의 경우,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아트 페어, 옥션, 미술관 등등 각종 제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래와 담함, 공모를 통해 서구 중심의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바, 이는 앞서 말한 신자유주의의 물결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척박한 환경에서 출발했다. 60년대의 해프닝은 당대의 사회현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몸으로 저항했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퇴폐와 불온세력으로 몰리면서 4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하다가 좌초되고 말았다. 그러나 해외 미술 정보의 부족, 창작 여건의 미비, 대중의 몰이해, 경제적 궁핍 등 어느 모로 보나 좋지 않은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프닝은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60년대의 해프닝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와는 달리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딤으로써 ‘현실주의’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의 해프닝을 한낱 서구적 아방가르드 아트의 재탕이나 아류로 본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입장으로 앞으로 더욱 심화시켜나가야 할 부분이다.
전위적 관점에서 한국의 행위예술을 다룬 이 글은 소위 ‘논리와 사유’의 시대로 통칭되는 70년대의 이벤트와 ‘융합과 확산’으로 대변되는 80년대의 퍼포먼스를 건너뛰고 90년대 수원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컴아트 그룹>의 전위적 활동에 서술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 이유는 이 그룹에 속한 행위예술가들이야말로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60년대 해프닝의 실험적 전통을 계승하여 과감한 도전정신과 급진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90년대 초반 당시 중국은 1949년 정부수립 이후 ‘죽의 장막’이라 부를 정도로 폐쇄된 사회체제를 유지해 왔는데, 그런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시도한 이들의 용감한 행동은 전위의식의 발로라는 점에서 되새겨볼 충분한 가치와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컴아트 그룹>의 활동이 재음미되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기존의 미술사적 서술이 중앙과 지역 간의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했다는 사실에 있다. 25년 전에 수원이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이 그룹의 활동 전체를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그 중에서 김석환, 이경근, 홍오봉, 황민수, 박이창식 등 행위예술가들이 보여준 아방가르드적 행동은 소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다.
아방가르드 아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환되는 예술의 분야이다. 세계가 위기에 부딪쳤다고 판단될 때 아방가르드는 긴급제기의 형식으로 재소환돼 음미되고, 분석되어지며 새로운 위치 찾기의 시도가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시도의 이면에는 그것이 지닌 견제구로서의 탁월한 기능이 감춰져 있다. 이른바 세계를 지키는 파숫꾼으로서 아방가르드의 전사들은 호전적인 자세와 정의에 대한 불굴의 정신으로 인간정신을 일깨우는 역할을 자임해 왔던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아방가르드 아트에 대한 관심과 보다 심화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