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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회화들

윤진섭



침묵의 회화들

윤 진 섭(미술평론가)


 한국의 근현대미술사에서 추상화의 기원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른바 ‘단색화’의 관점에서는 1960년대 초반부터 7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추상화의 초기에 해당하는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로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이 추상화를 제작했다. 후대에 재현된 유영국의 합판을 이용한 릴리프 작품<작품 R3>(1938)과 곡선적인 리듬감이 두드러진 김환기의 <론도>(1939) 등등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추상화이다. 

 8.15해방 이후에는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유경채의 <폐림지 근방>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풍경에 대한 구상과 추상 화풍 사이의 절충적인 양상을 띤 것으로 국전사상 앵포르멜 풍의 추상이 나타나는 김형대의 <환원B>(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1961)을 거쳐 이승조의 <핵-F90>(문공부장관상/1968)과 국전에서 추상화로 최초의 대통령상을 수상한 박길웅의 <흔적 백 F75>(1969)로 연결된다. 

 그러나 단색화의 관점에서 보면 같은 추상화의 범주라고 하더라도 계보가 다르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은 1956년 ‘반국전 선언’의 주역인 박서보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국전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물론 심사위원이나 추천작가를 역임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국전에의 참가를 거부하며 도전적인 전위작가의 입지를 구축했다.
 
 수화 김환기를 비롯하여 윤형근,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서승원, 최명영, 이강소, 김태호 등은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형성한 주역들로서 단색화 작가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김환기는 1930년대 후반 일본 동경에서 전위적인 성격의 <자유전> 회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말해주듯 평생 새로운 예술을 향해 도전한 작가였다. 19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수상한 그는 그 후 뉴욕에 정착하여 훗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작)으로 대변되는 아름다운 청색의 점화(點畵)를 낳았다. 

 추상화 1세대인 김환기를 제외한 나머지 작가들은 다음과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다. 박서보, 정상화, 윤형근(이상 앵포르멜), 하종현, 서승원, 최명영, 이강소(이상 AG), 김태호(에스프리) 등 이다. 전후 한국 현대미술의 풍경에서 이들의 활동은 195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미술을 둘러싸고 이념과 태도, 방향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그것은 평면회화 중심의 앵포르멜 세대에 대해 탈평면을 주장한 AG 세대 사이의 전위적 관점 차이에서 빚어진 충돌이었다. 이러한 충돌이 단색화라는 구심점 아래 모이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 이후의 화단 공간에서 였다. 당시 이른바 ‘백색’ 미학으로 대변되는 단색화의 전국적 팽창과 국제화 추세가 형성되면서 화단을 점유해 나갔다. 


 노화랑이 신년기획으로 마련한 이번 초대전에는 작가당 정련된 작품 2점씩 총 18점이 출품되었다. 전부 단색화적 경향을 띤 작품들이다. 단색조로 이루어진 출품작들은 수화 김환기(1913-1974)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근작들이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각 작가들의 고유한 특색을 드러내면서 무르익은 화풍을 보여준다. 

 김환기의 <무제 22-Ⅲ-70 #158>는 작고하기 4년 전의 작품으로 부분적으로 채색의 점들이 나타나고 있으나 면포에 푸른색 점들이 번진 특유의 화풍이 나타나고 있다. <무제 09-Ⅴ-74 #332>는 작고하던 해에 제작한 것으로 촘촘하게 찍힌 점들 사이로 부채꼴 형태의 길들(직선)을 표현, 공간 분할에 의한 화면구성에 각별히 신경을 쓴 작품이다. 이러한 경향은 생애의 말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윤형근(1928-2007)의 <Burnt Umber & Ultramarine>이라는 제목의 작품 2점(1991, 1996)은 윤형근 회화의 특징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1991년 작품은 여러 번에 걸쳐 각기 다른 톤과 색의 물감을 칠한 까닭에 아사천에 번진 물감의 농담이 부드럽게 스민 차이의 효과가 드러나고 있다. 반면에 1996년에 제작된 작품은 색이 보다 검정에 가까우며 번짐의 효과도 적어 다소 엄격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박서보(1931-  )의 <ECRITURE NO.130201>(2013)과 <ECRITURE NO.110903>(2011)은 대략 2000년대 중반 들어서 나타나기 시작한, 사각형 모양의 형태가 화면에 등장하면서 다양한 화면구성을 시도한 스타일의 작품들이다. 2013년 작품은 화면의 정중앙 하단부에 위치한 긴 막대를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11년 작품은 긴 막대 형태의 도형이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보다 안정된 느낌을 준다. 

 정상화(11932-  )의 <무제 86-3-9>(1986)와 <무제 90-3-4>(1990)는 예의 반복적인 행위에 의한 캔버스에서 물감 칠하기와 뜯어내기 작업이 시작된 1970년대 초반에서 약 20년 정도 지난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이다. 따라서 중기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정상화의 작업은 초기와 중기에는 사각형의 단위들이 작고 정교한 느낌을 주는 데 반해, 말기에 올수록 사각형이 점차 커지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신체의 노화와 관련시켜 볼 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종현(1935-  )의 <Conjunction 19-57>(2019)와 <Conjunction 20-72>(2020)는 걸쭉하게 갠 유성물감을 캔버스의 뒤에서 밀어 마대천의 전면으로 맺히게 한 뒤, 넓은 붓으로 아래서 위로 밀어 맨 끝에 물감의 잔해들이 남게 한 물질감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붉은 색 계열(2019)과 옅은 회색 계통의 작품(2020)은 같은 방법론을 보여준 2002년 작품 보다 더욱 농밀하고 정교해 졌으며, 완성도 또한 높다. 

 최명영(1941-  )의 <평면조건_20-815>와 <평면조건_20-821>는 다같이 2020년 작으로 전자는 붉은 색, 후자는 회색조를 띠고 있다. 이 작품들은 외견상 70년대 중반의 <Equality> 연작의 연장선상에 서 있으나 전자가 손가락을 사용하여 물감을 밀어내는 방식을 사용한 반면, 후자는 붓을 사용했다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손을 사용한 작품들이 신체의 직접적인 투여를 보여준 반면, 후자는 붓을 사용함으로써 도구성이 강조되고 있다. 

 서승원(1941-  )의 <동시성 19-912>(2019)와 <동시성 19-913>(2019)는 다 같이 전기와 중기의 특징인 엄격한 기학학적 형태들이 해체되면서 나타난 형태의 소멸을 보여준다. 청색과 노랑, 그리고 베이지색 등 주조색이 점점 더 연해지면서 각 색역(色域)의 경계들이 흐려지는 것이 후기 <동시성> 연작의 특징이었다. 근작들은 색채가 더욱 엷어져 거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양태를 보여준다. 

 이강소(1943-  )의 <Serenity-18107>과 <Serenity 16085>는 서예에 기반을 둔 서체적 필획과 오리 이미지의 결합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아마도 이강소의 이런 류의 작품만큼 한국의 전통적 자연관과 공간감을 현대적 미감으로 풀어낸 작업도 드물 것이다. 필획 자체로는 거리에 따른 공간감을 표출할 수 없으나 오리라는 구체적인 사물의 도입에 의해 비유적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김태호(1948-  )의 <Internal Rhythm 2020-50)과 <Internal Rhythm 2020-51>은 캔버스 위에 다양한 색깔의 아크릴 물감을 여러 겹 중첩해서 칠한 뒤에 조각도로 섬세하게 깎아내는 고된 노동의 작업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겉으로는 청색(2020-51)과 연한 회색(2020-50)의 색조를 띠고 있으나 그 밑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다양한 색들이 내장돼 있어서 미묘한 발색과 함께 결과적으로는 단색으로 보이는 시각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적 중추를 이루는 초대작가들은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국내외 옥션에서도 작품 거래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는 저명한 작가들이다. 신춘을 맞이하여 열리는 이번 전시가 대중의 한국 추상미술 이해에 많은 보탬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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